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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리 “뻔뻔함이 자유로움을 가져다줘요”

2024.03.22박나나, 신기호

김태리의 기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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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새 드라마 <정년이>는 어느 정도 진행되고 있어요?
TR 이제 반 정도 돼 가고 있는 것 같아요. 아직 넘을 산이 많네요.
GQ 작품을 웹툰으로 먼저 만났을 때가 궁금해요.
TR 제 얼굴을 상상하며 읽히는 장면이 많았어요. 작가님이 <아가씨>의 ‘숙희’ 얼굴을 모티프로 그리셨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는데, 아, 그래서 그랬구나 싶었어요. 캐릭터의 외형 외에도 성격이라거나 행동들 또 정년이의 성장 스토리들에도 공감이 크게 됐어요. 다듬어지지 않은 거칠고 무모하고 당돌한 모습들과 가슴을 뛰게 하는 방향으로 곧장 달려가는 모습들에서 이십 대의 제 모습을 봤던 것 같아요.
GQ ‘정년이’는 소리 하나는 타고난 인물이잖아요. 시작부터 커다란 숙제가 생긴 셈이에요.
TR 작품을 하겠다고 다짐한 순간부터 소리 연습을 시작했어요. 장영규 음악감독님이 권송희 선생님을 소개시켜줬고, 2021년부터 지금까지 배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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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소리 배우기’는 어땠어요? 처음이었어요?
TR 네, (활짝 웃으며) 판소리, 정말 너무너무 재밌어요. 이 재미가 어느 정도냐면 작품 때문에 배우는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정도였어요. 늘 내가 원해서, 내가 즐거우니까 배우고 있다는 생각이었던 것 같아요.
GQ 말은 이렇게 해도, 그럼에도 과정은 고되었을 거라 감히 짐작이 돼요.
TR <스물다섯 스물하나>에 이런 장면이 있어요. ‘희도’가 딸에게 성장에 대해 이야기해주는 장면인데, 성장이라는 건 이렇게 쭉 올라가는 게 아니라 계단처럼 움직인다고. 그래서 순간마다 절대로 넘어서지 못할 것 같은 거대한 벽이 너를 가로막을 텐데, 그 순간이 바로 성장 직전의 순간이라고. 말씀해주신 고된 순간이라면 꼭 이런 순간을 마주했을 때였던 것 같아요.

블랙 싱글 브레스티드 코튼 재킷과 쇼츠, 브러시드 레더 로퍼 가격 미정, 모두 프라다.
블랙 싱글 브레스티드 코튼 재킷과 쇼츠, 브러시드 레더 로퍼 가격 미정, 모두 프라다.

GQ ‘소리의 벽’이라는 거, 넘기가 쉽지 않았을 것 같아요.
TR 수업을 항상 기다렸고, 매번 설레는 시간이었는데, 안 될 땐 너무 답답하고 답답해서 눈물이 날 때도 있었어요. 또 그렇게 안 되던 게 되는 순간이면 정말 어떻게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고요. 어느 순간부터는 늘 ‘정년이’를 떠올렸던 것 같아요. ‘얘도 이런 순간이 있겠지?’ 하고요. 그래서 지금 배우는 과정들, 느끼는 감정들을 최대한 기억하려고 노력했어요. 매번 느끼는 너무나 높은 벽 앞에서 좌절하고 다시 이겨내고, 좌절하고 다시 일어나고 그 반복이 만들어준 정년이의 모습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으며 이겨냈어요. 그 과정 전체가 즐거웠어요.
GQ ‘소리’만큼 ‘여성 국극단’이라는 배경도 새로웠어요.
TR 저도 너무 흥미로웠어요. 어째서 이 매력적이고 흥미로운 소재가 지금까지 드라마화나 영화화된 적이 없는지 의아할 정도였어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배우가 판소리를 해야 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요. 적당히 배워서는 안 되는 정도로요. 주인공 뿐만 아니라 등장인물 거의 모두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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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작품 안에서 다시 작품을 펼쳐야 하는 현장도 굉장히 분주하겠죠?
TR 매번 현장에서 꼭 나오는 말이 있어요. 배우든 스태프든. “우리 지금 정말 새로운 거 하고 있는 거 같지 않아?” 정지인 감독님도 이거 한 작품이 아니라 몇 작품을 동시에 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말씀하시고요. 사실 그렇죠. 작품 안에서 몇 번의 각기 다른 공연이 올라가기 때문에 매 극중극마다 다른 캐릭터, 의상, 소품, 무대, 연출 등 모든 파트가 분투 중에 있어요.
GQ ‘새로움’ 앞에서 드는 감정을 극단적으로 꼽으라면 두 가지가 떠오르는데요, 기대 또는 두려움이 아닐까 싶어요. 태리 씨는 <정년이>라는 작품이 주는 새로움 앞에서 어느 쪽에 더 가까운 감정을 느꼈어요?
TR 두려움은 딱히 없었어요. 기대라면 이런 거요.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하잖아요. 예를 들면 제가 펜싱이라는 걸 알고 나서부터 올림픽을 굉장히 즐겁게 봤거든요. 그것처럼 소리도 아주 조금만 알면 여러 즐거움을 알게 될 텐데, 그래서 이 소리의 매력을 많은 사람이 알 수 있게 <정년이>가 잘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이런 기대는 커요. 이 장르가 우리 드라마를 통해 조금이나마 많은 분과 친숙해지면 좋겠다. 이런 즐거움이 있다는 걸, 이런 우리나라만의 예술이 있다는 걸, 역사가 있다는 걸, 우리나라를 떠나서 외국에도 알리고 싶다. 이런 거, 진짜 너무 기대되는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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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오늘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연기는 기세다”라고 말하는 태리 씨의 태도를 발견하고서 용수철 튕기듯 고개를 끄덕였어요. 이렇게 생각하게 된 배경은요?
TR 제가 첫 무대 위에서 느꼈던 그 재미는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해보면, 그건 ‘자유로움’이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죠? 대본이 있고 이야기는 정해져 있는데, 그러니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닌 일인데도 자유롭다니. 그럼 또 또 생각해보면 그때의 ‘자유로움’은 잘 몰랐던 시기에만 느낄 수 있는 것 같은 거죠. 그런데 이제는 시간이 꽤나 흘렀고, 많은 것을 보여줬고, 그럴수록 다시 이런 것도 저런 것도 해보면서 돌파해내야 하고, 이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아는 것도 익히는 것도 많아지는데, 또 이게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오히려 어느 순간엔 갇히게 되는 것 같고요.
GQ 나름의 기준이 하나둘씩 생기면서부터요.
TR 네. 그렇게 어느 순간이 오면 생각이 굳기도 하고, 몸이 굳기도 해요. 이 상태에 내가 함몰되지 않기 위해 계속 뻔뻔한 상태를 만들어주는 게 연기에서 굉장히 중요한 것 같아요. 그 뻔뻔함이 자유로움을 억지로라도 가져다줄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진짜로 현장에서 자주 외쳐요. “(쩌렁쩌렁 큰 목소리로) 연기는 기세다!” 이렇게. 막 다 같이 외치기도 해요. 소리도 지르고.(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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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대답을 들으며 떠올려보니 ‘기세’라는 태도가 새삼 아름답게 느껴져요.
TR 아까 말씀하셨다시피 딱 연기에만 국한되는 얘기가 아니잖아요. 각자의 일을 기세 좋게 하면 되니까. 가장 자유로운 상태를 만드는 마법 같은 주문?(웃음) 그런데 이 생각을 언제 했더라. 지금 생각을 좀 해볼게요. (몇 분의 고요함이 지나고) 사람이 도돌이표 같아요.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생각을 한 번만 한 게 아니야, 예전에도 했던 생각이고, 얻어낸 답이었고. 그런데 우린 그걸 자연스럽게 또 잊어요. 왜냐하면 내 상태나 주변 환경은 고정값이 아니니까요. 변하니까요. “연기는 기세다”라는 생각도 스멀스멀 잊고 지내다가 어느 순간 다시 떠올랐던 것 같아요. 떠올랐는데 기분이 되게 좋은 거죠. 마음이 편안해지면서 내일이 기대도 되고. 그때부터 좀 많이 외쳤네요.(웃음)
GQ 연기를 두고서 치열하게 고민하고, 태도도 바꿔보는 성실함은 어떤 마음에서 기인하는 것 같아요?
TR 배우라는 직업은 주변 상황과 사람들이 계속해서 변해요. 작품마다 환경도, 사람도 달라지죠. 새로움을 이해하고 해결하는 제 접근법은 그것밖에 없는 거예요. 답이 없는 문제긴 한데 굳이 굳이 찾아보자고 하면, 그건 ‘잘하고 싶어서’인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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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그동안 다채로운 장르, 몰아치는 이야기들, 반짝이는 인물들, 요동치는 갈래들을 지나왔잖아요. 배우로서 결국 무엇을 얻었다 생각하나요?
TR 저는 경험이라는 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요, 얻었다면 경험치요. 왜, 게임으로 치면 얻은 경험치로 스탯을 찍을 수 있잖아요. 포인트처럼요. 스탯을 찍으며 게임 캐릭터의 능력을 키우는데, 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그렇게 살금살금 얻은 경험으로 다음 시야가 조금 밝아지는 것 같아요. 지금 현장을 보면 드라마를 처음 하는 친구들이 굉장히 많은데, 물론 이건 제 생각입니다만, 그들이 갖고 있는 고민은 대부분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는 것들 같아요. 경험이 해결해줄 수 있는 것들.
GQ 지금의 대답이 후배들에게 좋은 조언이 될 수 있겠어요.
TR 사실 저는 너무너무, 조언을 다 해주고 싶어 하는 편이긴 합니다. 아, 그런데 그분들이 불편하지 않을까 싶어서 조심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크크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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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요즘 김태리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것들에 대해 물으면요?
TR 딱히 없어요. 행복에 대해 생각하기를 멈춘지 꽤 된 것 같아요. 그냥 지내요. “아, 행복하다!” 하는 순간이야 당연히 있겠지만 그걸 만나기 위해 지내지는 않는 것 같아요.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쉰다. 거기에 집중하며 지내고 있어요.
GQ ‘그냥 지내고 있음’에 대해서 좀 더 물어도 될까요?
TR 갈수록 그런 것 같긴 한데, 작품에 들어가면 배우의 영역 밖에서 살지는 않는 것 같아요. 계속 작품과 관련된 생각만 떠오르고···. 그래도 일상에 대해 생각을 좀 해보자면 그런 막힌 순간에도 할 수 있는 것, 그러니까 사람을 챙기는 일에는 조금 의식을 가지려고 해요. 순간이지만 문득 어떤 사람이 떠오르면 연락을 해본다든지, 누굴 만날 일이 생기면 작은 선물을 준비한다든지 하는 식으로요. 이런 작은 위로들을 저도 되게 많이 받아봤거든요.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그런 마음 씀씀이가 기분 되게 좋더라고요.
GQ 태리 씨가 연기만큼 사랑하고 아끼는 존재에 대한 물음이 실은 마지막 질문이었는데 조금 전 대답에서 얻은 것 같네요.
TR 네, 그런 존재라면 주변 사람들요. 혹여나 제가 불행하더라도 그 사람들은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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