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한 지 2년여가 되는 지금, 로저 페더러는 자신을 이끄는 신선한 긴박감에 대해 풀어놨다. 그는 다른 삶의 리듬을 찾았고 시간의 중요성을 짚어보고 있다.
베벌리 힐스의 높은 곳에 자리한 시츠-골드스타인 하우스는 존 라우트너가 디자인한 경이로운 건물로 테니스 코트와 잉어가 사는 연못이 있으며, 거실에서 이제 막 봄으로 접어드는 로스앤젤레스의 전경을 감상할 수 있다. 이 집의 주인인 NBA의 영원한 팬 제임스 골드스타인은 지난 2016년 언젠가 이 집을 LA 카운티 미술관에 기증하겠다고 약속한 바 있다. 그러나 골드스타인이 빌 클린턴, 칼 라거펠트, 드레이크 등 다양한 유명 인사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여전히 벽에 걸려 있고, 거실 한구석에는 낡은 CD 컬렉션(퓨어 파차 서머 2014, 클럽 생 트로페 2006)이 쌓여 있다. 이곳은 영화 <위대한 레보스키>에서 제프 브리지스가 모더니즘 소파에 누워 센 화이트 러시안에 취해 꿈에 빠지는 장면을 촬영한 곳이기도 하다. 지금 로저 페더러는 듀드가 앉았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경치를 감상한다.
로저 페더러는 영화를 본 적은 없지만 샴페인 브랜드의 촬영을 이곳에서 진행한 적이 있어 익숙하다고 말한다. 로저 페더러다운 이야기다. 실제로 보는 페더러는 생각보다 키가 살짝 크고 눈은 녹갈색에 가깝다. 마흔두 살이 된 지금도 그는 프로 테니스 선수 시절처럼 우아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인다. 대화를 나누던 소파에서 일어날 때 우리 둘 다 무의식적으로 신음을 냈지만.(페더러가 1,500회 이상 프로 테니스 경기에 출전했고, 그랜드슬램에서 20회 우승했다는 사실은 신경 쓰지 말자. 나는 그저 다양한 앉은 자세로 그 승리를 지켜본 사람일 뿐이었는데도 똑같은 소리를 냈다.) “어제는 허리가 괜찮았는데요.” 페더러가 웃더니 허리를 살살 두드리며 말한다.
페더러는 지난밤 아카데미 시상식에 두 번째로 참석했다. (첫 번째는 2016년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레버넌트>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을 때였다. 또 다른 로저 페더러다운 이야기다.) 사실 눈물을 글썽이며 2022년 9월 저녁 런던 레이버컵에서 은퇴를 발표하기 전에도 그는 프로 선수로서는 드물게 스포츠 이외의 세계에도 관심을 가져왔다. 그는 윔블던부터 멧 갈라까지 레드 카펫의 단골손님으로 오랫동안 활약해왔다. 페더러는 “아는 선수 중에는 호텔, 클럽, 호텔, 클럽, 룸서비스, 하루 종일 스포츠 시청, 이런 일상을 되풀이하는 사람도 있죠”라고 말한다. 이는 페더러의 방식이 아니었고, 앞으로도 아닐 것이다. 그는 사교적이고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부상으로 인한 왼쪽 무릎 수술이 요인이 되어 은퇴한 페더러는 아내와 네 자녀와 함께 고향인 스위스를 비롯해 도쿄, 태국, 남아프리카공화국 등지를 정기적으로 여행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는 디자인 분야에도 발을 내디뎠는데, 가장 최근에는 아이웨어 브랜드 ‘올리버 피플스’와 협업해 이번 주 세련된 선글라스 라인을 선보인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지 1년 반이 지난 지금, 그는 여전히 선수 시절 의지했던 그 유연함과 집중력으로부터 힘을 얻고 있는 것 같다. 페더러는 “좁은 테니스 마인드에 머무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아요”라고 말한다. “옛날에는 레드 카펫이나 스몰 토크를 끔찍이도 두려워했지만, 지금은 밖으로 나가 사람들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하는 것이 매우 매력적으로 다가와요.”
어째서 그걸 두려워한 거죠?
그러니까, 이게 뭐야?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대체 왜 이걸 입어야 해? 10대일 때는 으레 이런 생각을 했죠. 으악, 넥타이라니, 숨막힌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정장을 더 자주 입어 정장 입는 것에 편해져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블레이저나 재킷에 청바지를 입고 넥타이를 매기도 했고, 카디건에 넥타이를 매기도 했어요. 의식적으로 그런 스타일의 옷차림을 하며 노력한 거죠. 그렇게 정장 차림에 익숙해지려고 했어요.
정말 운동선수 같은 대답이네요. “아, 그냥 훈련해야지” 같은 느낌이에요.
“훈련해야죠.” 저라면 정장에 익숙해지도록 스스로 훈련했을 거예요. 그런데 사실 정장은 입을 일이 거의 없고 주로 시상식 때만 입는데, 시상식에 가면 너무 불편하고 긴장돼서 당황스러워지는 거죠. 그래서 올바른 마음가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은퇴 생활은 어떤가요?
이게 말이 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안심이 돼요.
어떤 면에서 안심이 되나요?
지난 몇 년 동안 무릎이 많이 아팠어요. 점점 끝이 다가온다고 생각했죠. 그렇게 모든 게 마무리되고 공식적으로 은퇴를 하니, 심호흡을 하면서 “와, 정말 좋다”라고 말하게 되더군요.
우울하거나 슬픈 게 아니라 행복했다고요?
당시에는 고통스러웠죠. 힘들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에요. 런던에서 은퇴하는 순간도, 그 순간까지 이어진 모든 일도요. 물론 나중에 하이라이트를 보거나 사람들이 “은퇴하는 그날, 기분이 어땠어요?”라고 물어보면 회상에 젖게 돼요. 그러면서 하이라이트를 보여주는 거예요. ‘세상에, 정말 저걸 또 봐야 해?’라고 생각하게 되죠.
은퇴한 날 밤에는 눈물을 터뜨리셨죠?
네, 그땐 정말 감정적이었으니까요. 항상 나와 함께했던 무언가가 영원히 사라지고, 아무리 되찾고 싶어도 되돌릴 수 없게 되었으니까요. 열차가 역을 떠난 셈이죠. 물론 그것도 괜찮은 일이고, 저도 괜찮다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하루아침에 “그래, 별거 아니네”라고 할 수는 없잖아요.
궁극적으로 원하는 엔딩이었다고 생각하시나요?
당연하죠. 그것보다 더 좋다고 할 수 있어요. 경기가 끝나고 악수를 나눈 뒤 상대가 그냥 휙 가버릴 때. 아니면 상대가 코트에 있는데 마이크를 잡아야 할 때. 코트에 홀로 있을 때. 관중석에는 친구들이 있는데 1라운드에서 질지, 결승에서 질지 아무도 모를 때. 그런 순간이 항상 두려웠거든요. 모든 사람이 그런 상황을 겪는 건 아니죠. 모든 사람이 마지막이 될 날이 언제인지 아는 것도 아니고요. 괜찮은 척하고, 말 몇 마디를 하면 갑작스레 모든 게 끝나요. 그러고는 다음 경기로 넘어가고 쇼는 계속되죠.
다음 선수가 다시 나와서 테니스 공을 치기 시작하고요.
별거 아닌 일이지만 쇼는 계속돼요. 전 항상 코트에 혼자 남겨질까 봐 두려웠어요. 제가 항상 바랐던 건 팀에 속하는 거였고,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그래, 오늘이 바로 그날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었어요. 솔직히 말하자면 날짜는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금요일 밤에 모두에게 경기를 보러 오라고 한 적이 있어요. 레이버컵 경기 다음에는 토요일과 일요일이 남아 있었죠. 그래서 그냥 놀고, 쉬고, 즐길 수 있었어요. 여전히 팀에 속해 있었기에 안락한 기분이 들었죠.
경기를 하는 동안에도 은퇴를 상상한 적이 있나요?
물론이죠. 훈련이든 뭐든 하려고 차를 타고 가다 창밖을 보면 그런 생각이 떠오르는 거예요. 은퇴하면 어떨까 하고요. 아니면 어디에서 은퇴하지? 어떻게 은퇴하지? 얼마나 더 뛸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이 떠오르죠. 인생에 대한 생각과 내 아이들, 그리고 이 여정의 행방은 어떨지 같은 걸 생각하다 보면요. 그런데 선수라면 전부 그러지 않을까 생각해요. 2009년 프랑스 오픈에서 우승하고 샘프라스의 기록(그랜드슬램 14회 우승)과 동률이 되었을 때부터 은퇴에 대한 질문을 받아왔어요. 사람들은 “뭔가 더 이룰 수 있는 게 있나요?”라고 물었죠. 그럼 저는 이랬어요. “좋은 질문이네요. 그런데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선수로서 뛰는 건 좋아하니 어찌 되든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요.
평생을 한 가지 방식으로만 살아오셨죠. ‘나는 프로 테니스 선수고, 그게 내 정체성이다’라고 생각하셨을 테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더 이상 프로 테니스 선수가 아니게 되었잖아요.
아니게 되었죠. 은퇴를 했으니까요. 누가 “무슨 일을 하세요?”라고 물어보면 사실 저도 모르겠어요. 은퇴했으니까요. 이상한 일이죠.
‘난 뭐 하는 사람이더라?’ 같은 생각이 들었던 적도 있나요?
테니스가 제 정체성이나 다름없었지만 하루 종일 오직 테니스만 했던 건 아니었죠. 대부분의 시간은 아빠, 남편, 아들로서 보냈어요. 테니스는 취미였다가 직업이 된 편이죠. 하지만 항상 스스로를 순수하게 테니스 선수로만 규정짓지 않으려고 노력했어요. 테니스를 할 수 없게 되거나 잠시 내려놓더라도 다른 모든 것이 여전히 저한테 남아 있었죠. 그런 마인드셋이 커리어 내내 제 힘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해요. 어느 날 사고가 나서 테니스를 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경기가 없어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현역일 때는 그렇게 생각하더라도, 어느 순간이 되면 정말로 그렇게 살아야 하잖아요.
사실 은퇴 후의 삶으로 뛰어드는 게 그리 복잡하진 않고 제법 간단한 것 같아요. 평소에도 바쁘게 살고 있거든요. 전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는 걸 좋아하고 사교적이니까요. 그래서 그냥 방에 혼자 앉아 있는 시간이 없었던 게 항상 도움이 된 것 같아요. 은퇴 후 두 번인가, 애들은 학교를 가고 아내는 다른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서 집에서 혼자 ‘이제 뭐 하지?’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기는 해요. 잘 모르겠네요. 꽤 어색한 순간이었거든요. 그러니 그런 순간이 있으면 안 되겠죠. 더는 그런 게 없었으면 좋겠어요. 다시는.
은퇴한 후 시간을 대하는 방식이 바뀌었다고 생각하시나요?
좋은 질문이네요. 기분이···, 어땠더라? 옛날보다 요즘 더 시간이 중요하다고 느끼는 것 같아요. 나이 탓인지는 모르겠는데,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것 같아요. 아직 이뤄야 할 일도, 해야 할 일도 많죠.
은퇴 후에는 옷과 신발에 이어 이제는 선글라스까지 디자인하셨죠. 그 과정에서 어떤 걸 느끼셨나요?
훌륭한 사람들, 훌륭한 인재들과 함께 일할 기회가 생기니 나만의 선글라스가 있다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러면 누가 적임자겠어요? 바로 올리버 피플스죠. 얼마나 멋지겠어요? 캘리포니아는 스위스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완전히 다른 세상이잖아요. 어떻게 아이디어를 구체화하고 실현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되더군요. 투어 때문에 일 년 내내 따뜻한 곳만 다니면서 인생의 80퍼센트를 여름에 보내서인지 선글라스를 더 많이 쓰고 싶게 되더라고요. 무엇이 영향을 미쳤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재밌겠다 싶었어요.
패션에 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었을 텐데요. 무엇이 계기가 되었나요?
물론 여행을 다니면서부터죠. 제 아내인 미르카는 세 살 연상이에요. 항상 우아하고 자동차, 시계, 패션에 관심이 많았죠. 그게 취미였어요. 아내는 외향적이고, 여기저기 많이 다니기도 했어요. 제게도 영향을 많이 주었죠. 박물관을 간다든가, 사람들을 만난다든가, 좀 더 사교적인 사람이 되게끔 말이에요. 우리가 연애를 시작한 게 제가 열여덟 살 때인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였거든요. 그렇게 패션 세계에 발을 내딛게 된 것 같아요. 여러 도시를 방문하다 보면 매일 청바지에 운동화, 오버사이즈 티셔츠를 입을 수는 없잖아요. 그리고 점점 더 성공한 테니스 선수가 되면서 레드 카펫에도 서게 되었죠. 정장을 입어야 하는데 매번 같은 넥타이를 맬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요.
지금 조 사비아, 아시프 카파디아 감독과 함께 은퇴 전 마지막 현역 생활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 중이신데, 그렇게 결정한 계기가 뭔가요?
솔직히 말하면 제가 결정한 게 아니에요. 설명하기 어렵네요.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거든요. 책을 쓰는 일과도 같잖아요. 전 책을 쓰고 싶지 않았어요. 제 이야기를 쓸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그럴 생각은 애초에 없었어요. 그런데 막상 끝이 다가오고, 레이버컵이 시작되자 뭐라도 기록해두는 게 좋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그냥 내 자신의 이야기, 아이들, 친구, 코치, 팀을 위해서라도 말이죠. 그러면 어깨너머로 조금이나마 찍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러면 뭐라도 남잖아요. 원래는 주위에 사람이 있는 걸 싫어해서 비하인드 신을 기록한 게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서 촬영팀이 왔는데 경기 전, 경기 중, 경기 후에 찍을 만한 게 나올 거라는 말을 했어요. 그랬더니 조가 영상이 너무 많은데, 정말 잘 나와서 공유하지 않기에는 너무 아까울 것 같다고, 1시간 분량 정도라도 저한테 보여주겠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긴 한데 일단 보여달라고 했죠. 정말 감정적이고 보기 힘든, 하드코어한 영상이었어요. 그래서 미르카, 제 에이전트 토니와 함께 경기를 보면서 계속 감탄을 내질렀어요. 그러다 보니 어느새 인생의 마지막 12일을 다룬 1시간 30분 분량의 다큐를 제작하게 되더라고요. 얼마 전에 상영회가 있었는데 정말 하드코어했어요. 여섯 번 정도 울었어요.
왜 울었어요?
아까도 이야기한 고통스러웠던 순간이 정말 많았거든요. 끝이 다가오고 종착점이 눈앞에 있죠. 그건 아름다운 일이에요. 하지만 저한테도 그런 시기를 보는 건 감정적으로 힘들죠. 시청자가 이걸 어떻게 볼지 궁금해요. 그래도 좋게 봐주시지 않을까요. 많은 운동 선수에게도 제 은퇴 과정을 보는 게 좋은 일일 거예요.
고통이라는 말은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렇죠. 정신적으로, 감정적으로 말이에요. 말 그대로 전신을 관통하는 느낌이죠. 마치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 같아요. 직접 보시면 혀를 내두르실 겁니다.
전에도 그런 감정을 느끼신 적이 있나요?
그랜드슬램 경기 때 그랬죠. 지금 떠오르는 건 2021년 윔블던 때 후베르트 후루카츠와의 마지막 경기에서 세트를 연속으로 내줬을 때네요. 세 번째는 6대 0이었죠. 코트에서 내려오니 무릎이 너무 아파서 더 이상 경기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경이었어요. 그래서 그때 마지막 윔블던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죠. 그런 다음 기자회견을 준비하면서 예상 질문을 미리 생각해두는데, 분명 무릎에 대한 질문이 나오겠다 싶었어요. 그랬더니 머릿속이 빙글빙글 돌고 불꽃이 튀면서 그제야 윔블던에서 진 게 실감나더라고요. 전 최선을 다했는데 말이죠. 이게 제가 할 수 있는 최대치였어요. 사실 여기까지 온 것을 생각하면 정말 좋은 경기를 펼쳤다고 생각했죠. 이 모든 경험은 완전히 혼이 쏙 빠질 정도였어요. 전부 생각지도 못한 방식으로, 아니면 그러면 안 됐던 방식으로 일어났기 때문이죠. 6대 0으로 진 세 번째 경기도, 기자회견도, 제가 느꼈던 감정, 두려움, 불안감, 모든 것이 다 그랬어요. 정말 하드코어했죠. 그래서 은퇴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아요.
테니스가 그리워요?
사실 그립진 않아요.
정말요?
네. 그 질문을 많이 받는데, 그립진 않아요. 정말 평화로운 기분이 들어요. 무릎과 몸과 마음이 더는 테니스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라고도 생각해요. 나도 저 샷을 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뭐, 지금은 가능할지도 모르겠죠. 하지만 전부 쏟아낸 기분이 들어요. 노력이라면 뭐든 해봤으니까요. 그래서 지금은 정말 평화로워요. 아이들과 함께 테니스를 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난생처음 아내와 함께 코트를 예약했죠. 화요일 3시에서 4시 사이에 코트를 쓸 수 있냐고 물어봤어요. 그냥 가서 치면 재밌을 것 같아서요. 한 달 전인가, 두 달 전인가? 레슨을 받는 아이들 옆에서 테니스를 쳤는데 너무 재미있더라고요. 테니스를 좋아했으니까요. 한때는 은퇴 후 테니스 코트 위에서 더는 발전할 필요가 없는 순간이 오면 어떻게 될까 항상 생각했어요. 포핸드를 놓치는 것도, 실력이 오르는 것도 이제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죠.
아직도 실력은 출중한가요?
그럼요. 진짜 웃긴다니까요. 며칠 전에 토니의 아들이 스탠포드 신입생이라서 거기로 테니스 경기를 보러 갔어요. 그러다 무언가를 하는 걸 보고 토니의 아들에게 포핸드 리턴을 할 때 이렇게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죠. 대표팀 굿즈들을 입은 차림새로 라켓을 들고 포핸드 리턴 타이밍을 맞추고 있었는데, 아직도 잘되더라고요. 녹슬지 않았죠. 자전거 타는 거랑 같아요. 그러고는 다른 연습을 한 다음 포핸드의 다양한 유형별로 차이점을 설명해줬죠. 루프한 것, 빠른 것, 날카로운 것, 뭐 여러 종류가 있거든요. 그런데 전부 치는 게 아직도 완벽하더군요. 아직도 실력이 죽지 않은 게 놀라웠어요.
아직도 테니스 경기를 보시나요?
하이라이트를 보죠. 아이들 일도 있고, 다른 일도 있으니 바빠서 풀 매치를 보기는 힘들어요. 아마 풀 매치는 작년에 한 번 봤을 거예요. 그래도 매일 하이라이트와 스코어를 체크하죠. 사실 저도 놀랐어요. 그냥 손을 턴 후에는 신경 쓰지 않고 살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아는 선수가 많다 보니 계속 확인하게 되더라고요.
라파엘 나달이나 노박 조코비치가 우승할 때마다 사람들이 당신을 떠올리는 건 당연한 일 같아요. 오랜 라이벌 관계에 있었으니 역사적으로 비교도 하게 되는 것 같고요. 당신도 그 선수들을 의식하고 있나요? 특별히 주시하고 있다던가.
물론 결승전에 진출했다거나, 나달이 복귀했다거나, 노박이 신기록을 경신했다거나 하는 일은 다 알고 있죠. 다 좋은 일이잖아요? 하지만 제가 ‘이 경기는 꼭 봐야지’라며 일정을 비우지는 않아요. 그래도 꾸준히 지켜보는 중이죠. 특히 노박의 상승세가 기뻐요. 계속 잘하고 있으니까요. 나달은 본인이 원했던 만큼 많이 출전하지 못한 게 안타까웠어요. 여름에는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기를 바라요. 비록 인디언웰스와 도하 대회는 기권했더라도 분명 다시 탄력을 받아 계속 이어갈 수 있을 거예요.
수년 동안 함께 코트에 섰던 사람들이죠. 이제 TV를 켜면 그들만 코트에 있고 당신은 없잖아요. 그럴 땐 어떤 기분인가요? 특별히 느껴지는 게 있나요?
오히려 좋은 기분이에요. 제가 런던에서 앤디 머레이, 노박, 나달, 비외른 보리를 비롯한 모든 선수 옆에서 은퇴 기자회견을 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은퇴하는 것이 맞다”고 말했죠. 제가 투어를 떠날 때는 그들이 없었고, 이제는 그들이 저 없이 투어를 떠나는 순간이 온 거예요. 머레이는 허리 부상 때문에 거의 은퇴할 뻔했고, 나달도 무릎 문제가 있었죠. 그들이 얼마나 더 뛸 수 있는지는 모르는 상황이었으니까, 저보다 먼저 은퇴했다면 오히려 어색했을 거예요. 그래서 제가 가장 먼저 은퇴할 수 있었던 게 기뻐요. 앞으로 저처럼 최대한 오래 활동할 수 있기를 바라죠.
내면의 경쟁자도 그렇게 생각하나요?
아, 그건 사라졌어요.
정말요?
네, 그럼요. 완전히 사라졌죠. 제가 이룬 성과가 자랑스럽고, 샘프라스의 기록을 깼을 때 그가 쿨하게 받아주던 모습을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정말 멋진 모습이었어요.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은퇴 후에는 또 다른 역할이 저를 기다리고 있죠. 현재의 위치에 만족하고 테니스계 전체를 응원하게 돼요. 다른 이들의 성과를 보면서 우리 모두는 테니스 경기뿐만 아니라 더 큰 스포츠 업계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넷플릭스나 아마존 같은 곳과 시청자 확보를 두고 싸우는 거죠.
좋아하는 후배 선수나, 본인과 닮았다고 생각하는 선수가 있나요?
원핸더는 요즘 귀하죠.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역사상 처음으로···
상위 10위 안에 원핸드 백핸드를 구사하는 선수가 없는 상황이죠.
폐부를 찌르는 것 같아요.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해요.
많은 생각이 들죠. 개인적인 생각이기는 하지만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하지만 동시에 샘프라스, 로드 레이버, 그리고 제가 오랫동안 원핸더의 기수 역할을 했잖아요. 그게 저희의 특별한 점이 된 거죠. 그래서 스타니슬라브 바브린카, 리샤르 가스케, 스테파노스 치치파스 같은 원핸더 선수들이 있다는 게 좋아요. 도미니크 티엠도 멋진 원핸더죠. 그리고르 디미트로프도 좋은 친구죠. 그런 게 좋아요. 캐릭터가 뚜렷하거나 격렬한 스타일의 운동선수도 좋아해요. 요즘은 다양성이 조금 더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양옆으로만 움직이기보다는 네트로 더 자주 들어오는 식의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앞으로의 추이를 봐야겠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선수들끼리 붙으면 랠리가 비슷한 방식으로 전개되는 게 문제인 것 같아요. 제가 현역이었을 때는 상대에게 포인트를 똑같은 방식으로 따내지 않는다는 목표를 세웠어요. 상대가 원하는 건 똑같은 랠리지만, 제가 다양한 걸 보여주면 당황하죠. 두 선수가 20포인트 연속 똑같은 패턴을 주고받는 걸 보면 왜 이러나 싶다니까요. 좀 더 재밌는 경기로 만들 수 있잖아요. 그건 팔씨름이나 마찬가지죠. 저는 팔씨름은 하고 싶지 않았어요. 다른 게임을 원했죠.
원핸드 백핸드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시나요?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돌아올 겁니다. 하지만 저희 아이 넷에게는 투핸드를 가르쳤어요. 제가 가르친 것은 아니지만요.
설마요!
저는 본보기로 삼기에는 좋지 않거든요. 원핸더를 잘 지켜내지도 못했고요. 어쩌면 아직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르겠지만요.
본인만큼 우승할 수 있겠다 싶은 후배는 있나요?
솔직히 후배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아요. 저도, 나달이나 노박도 메이저 우승 20번을 목표로 삼았던 게 아니니까요. 슬램을 여러 번 우승할 만한 선수는 물론 있죠. 누군가는 슬램에서 우승할 테고, 당연히 멋지고 완벽한 경기력으로 승리할 겁니다. 그들이 테니스계를 이끌고 슈퍼스타가 되겠죠. 카를로스 알카라스, 야닉 시너 같은 선수들이 이미 그렇게 천명하고 나섰고요. 다음 스타는 누가 될지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어요. 그래서 앞으로 2~3년 동안 누가 정상급 선수를 이길지 가늠해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도 좋은 선수들이 있지만, 아직 경기력을 높이는 단계라고 생각해요. 최고의 선수를 주력 코트에서 어떻게 꺾을 수 있나, 그런 걸 말이죠.
이쯤 되면 사람들이 당신의 테니스 플레이를 표현하는 방식에 익숙하시겠죠. “아름답다”, “자연스럽다” 등의 표현 말이이에요. 당연한 칭찬이기도 하지만, 치렀던 경기가 그렇게 기억되는 게 어떤지 궁금해요.
지금은 큰 칭찬으로 받아들이죠. 제가 현역일 때는 제가 보여주고 싶었던 파이터나 승자의 면모가 사람들에게 전달되지 않을 것 같은 마음에 전전긍긍했어요. 파이터가 아니라면, 노력을 쏟지 않는다면 제가 이뤄낸 것들을 달성할 수 없겠죠. 믿기지 않을 만큼의 노력을 해야만 비로소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특히 초창기에는 내가 이렇게나 열정을 쏟고, 전력투구를 하는데 사람들은 모르는 건가 싶어서 항상 힘들어하고는 했어요. 그냥 쉽게 게임을 이겼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제가 졌을 때는 “조금만 더 노력해보지”라는 반응이었죠. 처음에는 정말 받아들이기 어렵고 복잡했어요. 그때는 약간 마음이 흔들렸죠. 그래도 결국에는 편안해져서 경기에 전부 쏟아낼 수 있었어요. 지더라도 5분 지나면 ‘이미 끝난 경기다’ 하고 괜찮아졌죠. 모든 노력을 다했고, 그렇게 나아가는 거예요.
자연스러움에 대한 인식이 자신의 스타일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아니면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자연스러운 플레이라는 게, 예를 들어 임팩트가 온 직후나, 포핸드로 이어지기 위해 이동 중이거나, 포인트가 끝난 직후에도 릴랙스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면 경기 중에도 거의 평온한 상태가 될 수 있어요. 그러면 경기 후반이나 토너먼트 후반에 더 많은 에너지를 쓸 수 있을 테고, 그런 것이 쌓이면 몇 년 더 뛸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자연스럽게 그렇게 했던 것 같아요. 항상 긴장한 상태라면 금방 지칠 것 같았기 때문이죠. 그래서 격렬하게 플레이하는 선수를 보면 놀라요. 저는 그럴 수 없었거든요. 그런 부분에는 경의를 표하게 되죠.
한 가지 고백할 게 있는데, 저는 당신과 동갑내기이고, 테니스 팬이라 항상 당신의 경기를 지켜봤어요. 그런데 인간적인 면모와 패배의 가능성이 더 뚜렷했던 후반기에 더 많이 응원했던 것 같아요. 이해가 되시나요?
완전 이해되죠. 2008년까지는 이 사실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그런데 2005년 호주 오픈에서 마라트 사핀에게 패했을 때 내가 괴물을 만들었구나 싶더라고요. 제가 한 세트를 지니까 사람들이 엄청나게 놀랐죠. 사핀과의 준결승전에서 매치 포인트로 졌을 때도요. 사람들이 충격에 빠졌죠. ‘그게 믿어지냐’ 하면서요. 아니, 그게 그렇게까지 충격을 받을 일이었나 싶긴 했죠. 엄청난 선수를 상대로 지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래서 2008년에 나달에게 패했을 때는 정말 특별한 순간이었어요. 지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았거든요. 그러고 한 달 있다가 미국으로 돌아오니까 사람들이 아직도 그 윔블던 경기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말했죠. “좋은 경기였어요”라고. 그랬더니 그러더군요. “아뇨, 그건 정말 특별한 경기였어요. 당신이 졌잖아요. 여태까지 엄청나게 이기는 것만 보다가 그런 모습을 보니 인간적인 면이 보이더군요. 당신이 지는 걸 보는 건 정말 색다르고 특별한 경험이었어요.” 그래서 저는 대답했죠. “네, 알겠어요. 저도 괜찮은 경기였다고 생각해요. 좋았어요. 진심으로.” 제가 그 순간 뭔가 특별한 걸 만들어냈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까지 그게 며칠을 가더군요.
완전히 새로운 페더러가 된 계기라고나 할까요. 지고 나서야 제 자신이 무엇인지 깨달았어요. 언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고, 그렇게 삶의 일부가 되었죠. 그렇게 지고 나서야 제 인간적인 면이 드러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사람들이 그런 부분에서 저와의 공감대를 발견한 거죠. 누구나 살면서 실패를 겪으니까요. 그전까지만 해도 저는 너무 오랫동안 이기기만 했거든요. 그러다 아이가 태어나고 부모가 되면서 더욱 공감대가 생긴 것 같아요. 그리고 말씀하신 것처럼 제가 오랫동안 투어를 다니면서 사람들이 저를 잘 알게 되었죠. 그러면서 많은 팬이 감정적으로 많은 응원을 보내주셨던 것 같아요.
명확히 하자면 전 당신이 지는 걸 바랐던 게 아니라 패배의 가능성에 공감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공감대가 생기면서 사람이 더 많이 모이는 걸 느끼셨나요?
제 경기에는 사람들에게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요. 제가 뛰는 경기를 보러 오면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했던 거죠. 저는 다른 방식으로 플레이를 했으니까요. 어쩌면 제가 1990년대 말, 모두가 하던 원핸드 백핸드, 힘들이지 않고 치던 구세대에서 파워풀하고 거친 새로운 스타일의 게임으로 넘어가는 가교 역할을 한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감성적으로는 제 경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저를 좋아했던 것 같아요.
아홉 살 쌍둥이 아들과 열네 살 쌍둥이 딸이 있다고 하셨는데, 진지하게 테니스를 하는 건가요?
진지하게 하는 건 아니지만 경기는 뛰게 해요. 우리 아이들만 경기에 빠지게 하고 싶지는 않거든요. 여전히 제가 테니스계에 속한 사람이라서 그런 거기도 하고, 다른 아이들은 열정을 가지고 뛰는데 우리 아이들만 안 하게 두고 싶지는 않았어요. 딸들이 처음 테니스를 시작했을 때는 마냥 테니스를 좋아했던 건 아니어서 “조금만 뛰어 봐”라고 말하기도 했어요. 그래서 네 명 모두 경기를 하고 있죠.
부모가 강요해서 테니스를 하는 건 아니라는 말씀이군요. 본인의 선택이니까요. 육아도 같은 방식으로 하고 계신가요?
저는 코치보다는 GM이 되려고 해요. 아이들에게도 나는 코치가 아니라고 말했죠. 제가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죠. 제가 봐주는 걸 싫어한다면, 그래도 괜찮아요. 스탠포드 때처럼 자제가 안 될 때가 있기도 하죠. 그래서 기본적인 거만 빨리 가르쳐주겠다고 말할 때도 있어요.
아이들이 아빠에 대한 세간의 인식이나 업적을 알고 있나요?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훨씬 더 잘 알죠. 특히 딸들이 어렸을 때는 순위나 성공에 대해 말한 적이 없어요. 제가 1등을 해도 말이죠. 아이들이 이렇게 물어볼 때도 있었어요. “스탠은 얼마나 잘해요?”, “대단한 사람이지. 전설적이고 뛰어난 선수야.”, “라파엘은요?”, “그 친구도 정말 잘해.” 그러니까 아이들이 “아빠는 어때요?”라고 묻더군요. “나는 그럭저럭이었지.” 그런 식으로 대단치 않다는 듯 말하고는 했어요. 이제는 친구들한테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렇게는 말을 못 하죠. 가끔은 저에게 직접 물어보곤 해요. 지금은 제 성과나 경험을 더욱 터놓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게 되었죠. 스토리텔링이나 경험을 공유할 때 더 많이 활용해요.
오르막길, 위대해지고 싶다는 열망, 정점을 찍는 일은 항상 잘 기록되어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건 많지 않죠. 지금의 삶을 설명한다면 어떻게 말하시겠어요?
커리어 후반부에 하락세가 없었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부상 때문에 하락세가 있었다고도 할 수야 있지만요. 전 그걸 하락세보다는 역경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은 행복하게 살고 있죠. 완전히 다른 삶이 펼쳐졌죠. 제가 재활을 했을 때와 비슷해요. 재활도 살면서 처음 해보는 것이라 꽤 좋아했거든요. 새로운 도전이었으니까요. 한 번에 한 걸음씩, 한 번에 한 동작씩 하면 되는 일이죠. 지금의 삶도 마찬가지예요. 새로운 공간, 새로운 프로젝트를 통해 새로운 삶으로 나아가는 거예요. 특히 제 아이들과 함께 말이죠. 그래서 지금이 마음에 들어요. 작년의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은 적은 없었다고 했는데도 말이죠. 하지만 은퇴를 해서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돌보고, 학교에 잘 다닐 수 있도록 도와주려고 노력했기 때문일 거예요. 부모로서 아이들을 너무 끔찍이 여기고 있어서, 티를 내고 싶지 않을 정도예요. 전혀요. 제가 굉장히 태평한 사람인 것 같다가도 벌떡 일어나서는 아이들을 도와주러 가자고 생각한다니까요.
육아는 또 다른 형태의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죠? 물론 그랜드슬램도 부담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20년 동안 그렇게 해왔잖아요.
그렇죠. 열네 살이나 아홉 살짜리 아이들의 부모가 되어본 적도 없고요. 저에게는 매일이 처음 겪는 일인 것 같아요.
- Photographer
- Lachlan Bailey
- Writer
- Zach Baron
- Stylist
- Jim Moore
- Grooming
- Nathanael Röthlisberger
- Set design
- BG Porter for Owl, the Elephant
- Production
- Annee Ellio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