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 농구의 3점슛 거리가 올 시즌부터 50cm 늘어났다. 한국 농구선수들에게 붙는 별칭 ‘양궁 선수’는 여전한 말일까?
3점슛이 한국에 도입되자 국내 농구인들은 쾌재를 불렀다. 키가 작아 골밑은 엄두도 못 내던 선수들은 쉽게 득점할 방법을 찾았다며 기뻐했다. 6.25미터의 거리에서 던져 넣으면 2점이 아니라 3점. 그것은 농구계의 혁신이었다. 1979년 NBA가 3점슛을 채택한 데 이어 한국 농구도 1984년부터 농구대잔치에 3점슛 제도를 도입했다. 먼 거리에서 정확하게 슛을 쏙쏙 집어넣는 장면도 장관이었을 뿐더러 슛 한 방으로 3점을 따라갈 수 있었으므로, 그 효과도 대단했다. 이충희와 김현준, 박인규와 강정수 등 소위 말하는 ‘슛쟁이’ 들이 스타덤에 올랐다. 사실 3점슛 도입 초창기만 해도 감독들은 그 효과를 미심쩍어했다. 선수들이 ‘멋’을 위해 3점슛을 던지는 것은 아닐까, 멀리 떨어질수록 성공률은 떨어지기 마련이니 자칫 위험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마저 있었다. 그러나 감독들은 국제대회에서 동유럽 선수들이 3점슛을 밥 먹듯이 던지는 장면에 충격을 받았고, 이때부터 3점슛은 본격적으로 전술의 일부가 된다.
하지만 ‘루저’는 3점슛을 장착해도 루저였다. 작은 선수끼리 맞붙는 국내 농구에서는 조금만 더 빠르고 영리해도 쉽게 3점슛 찬스를 잡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뼘은 더 큰 외국 선수들과 만날 때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빠른 스피드에 힘도 좋고 다리와 팔도 긴 외국 선수들은 순식간에 우리의 찬스를 견제했다. 급하게 던지다 보니 성공률은 떨어졌고, 안쪽을 공략하자니 골밑은 높고…. 별수 없이 3점슛부터 던지고 봤다. 흔히들 한국 농구를 경험한 외국인들은 ‘한국 슈터 원더풀’ 이라며 입을 모았다. 던지는 족족 들어가는 그 슛감이 놀랍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학공식은 달달 외워도 조금만 응용되면 꽉 막혀버리는 주입식 교육의 피해자들처럼, 그들 앞을 가로막는 수비수를 제칠 만한 개인기나 응용능력은 현저히 떨어졌다. 그게 문제였다. 이 현상이 수차례 되풀이되면서 농구 팬들은 자조적인 의미에서 우리농구에 별칭을 붙여줬다. ‘양궁농구’ 라고. 허재나 정재근같이 뛰어난 돌파 능력을 지닌 선수가 수비를 흔들어주지 않는 이상 좀처럼 기회가 나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그런 우리를 궁수부대로 전락시켰던 중국 농구조차 서양팀을 만나면 자포자기한채 3점슛 던지기에 급급했다는 것. 아시아 농구에는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했다.
1997년 프로 농구 출범 후에도 3점슛은양날의 검이었다. ‘용병’ 이라 불리는 미국 흑인선수들이 볼거리 제공과 전력 평준화를 이유로 팀당 2명씩 유입되면서 국내 선수들은 밖에서 슛 기회만 노리는 신세로 전락했다. 서장훈과 현주엽 등이 분투하며 자존심을 지켰지만, 한때 골밑을 주름잡았던 전희철이 슈터 신세로 전락한 것은 충격이었다. ‘우상’의 몰락은 아마추어 농구계에도 영향을 주었다. 고교시절까지 센터를 보던 친구들에게 “프로에서 어떤 선수가되고 싶냐”고 물어보면 대부분이 “슛 거리를 늘려 포워드를 보고 싶다. 골밑에는 용병이 있으니까” 라고 답했다. 올스타전도 3점슛 잔치가 되고 말았다. 이렇게 길든 습관은 국제대회에서 독이 됐다. 용병 2명이 스무 개씩 걷어내던 리바운드를 대신 잡아줄 선수가 없었다. 몸싸움에도 나가떨어졌고, 할리우드 액션만 늘었다. 서장훈이 빠진 다음부터, 리바운드 대결은 더욱 심각한 문제가 됐다. 아, 서장훈도 3점슈터가 되지 않았냐고? 오해다. 신장 207센티미터인 그는 경기당 겨우 2~3개의 3점슛만 시도했을 뿐이며 그 성공률은 일반 슈터를 능가했다. 평균 20점을 넣는 센터가 외곽슛만으로도 6점을 채울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면 상대 센터로서는그가 3점 라인 밖으로만 나가도 얼굴이 하얗게 질릴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소속팀의 무기로 자리 잡았다. 자기 장점을 잘 활용하는 것과, 할 게 없어서 그것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다.
‘인생 한 방’을 노리며 3점슛만 바라보는 선수들에게 팬들은 질리기 시작했다. 2003-04시즌 마지막 날은 한국농구를 대표하던 두 슈터의 3점슛 타이틀 수상을 위해 찬스를 몰아주는 추태도 나왔다. 문경은은 3점슛 22개를 넣어 66점을 기록했고, 우지원은 3점슛 21개로 70점을 기록했다. 나름대기록이었지만 돌아온 것은 비난뿐이었다. KBL은 이를 방조한 감독들에게 견책조치를 취하고 3점슛 타이틀을 없애 버렸다. 이쯤 되자 농구인들 사이에서도 “3점슛 라인을 넓혀 아무나 못 던지게 해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마침 FIBA에서는 2010년 국제대회부터 3점슛 라인을 50센티미터 늘린 6.75미터로 변경하기로 결정했다. 한국 프로 농구도 그 흐름을 따랐다. 2009년 여름 동안 각 구단은 분주히코트를 새로 정돈했다. “나 원래 슛 거리 길었어” 라며 여유있게 던지는 선수들이 있는가 하면, 스텝을 밟을 때마다 균형이 흔들리는 선수들도 있었다. 2009-10 시즌이 시작되고 실전에 돌입하자 그 차이는 확연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치 ‘3점슛 자격 검정’ 이라도 치르듯, 50센티미터의 차이가선수들의 3점슛 능력을 가르는 일이 벌어졌다. 승부처에서 에어볼을 날려 망신살을 산 선수도 나왔다. 선수들은 다른 생존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사실, 총 6라운드로 치러지는 프로 농구가 3라운드 중반을 넘어선 지금 KBL 10개 구단의 3점슛 성공률은 35.2퍼센트로 50센티미터가 더 가까웠던 과거와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지난 시즌의 36.1퍼센트, 2007-08시즌의 35.9퍼센트에 비하면 다소 떨어졌지만 35퍼센트 초반에 머물렀던 시즌은 과거에도 있었다. 가장 큰 차이가 있다면 3점슛 시도와 성공 수가 줄고 있다는 점이다. 평균 7~8개 가까이 들어가던 3점슛이 6개로 줄었다. 겨우 한 개 차이지만, 평균 3점 이상이 줄었기에 관중들이 피부로 느끼는 점수대는 낮을 수밖에 없다. 1쿼터의 3점슛은 큰 문제가 없다. 그러나 피로가 누적되는 후반에는 성공률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건 늘어난 3점슛 거리가 가려낸 것이 선수들의 3점슛 능력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과연 이 선수가 3점슛 외에 무엇을 갖추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도 나오기 시작했다. 3점슛 라인이 멀어지면서 그 안쪽 공간도 자연스럽게 넓어졌다. 수비자들은 더 쫓아다녀야 하고, 공격자들은 더 활발히 돌아다닐 수 있게 됐다. 순간 스피드나 민첩함, 개인기가 있는 공격수들은 굳이 3점슛만 고집하지 않게 됐다. 신기성(부산 KT), 이정석(서울 삼성), 강병현(전주 KCC), 김현중(창원 LG), 이광재(원주 동부) 등이 대표적이다.
3점슛 거리는 감독 능력과 국내 인사이드 재원에 대한 이슈로도 이어졌다. 팬들은 감독들이 선수를 얼마나 다양하게 기용하고, 어떤 전술을 사용해 3점슛의 한계를 극복하는지를 눈여겨보고 있다. 유재학 감독의 울산 모비스는 그런점에서 완벽에 가까운 팀이다. 선수들도 ‘절대 지지 않을 것같다’고 입을 모은다. 상대가 지역방어를 들고 나와도 가볍게 무너뜨린다. 지난 시즌 최하위 부산 KT는 전창진 감독 조련 아래 기동력이 좋은 포워드들로 3점슛 라인 안쪽을 정신없이 누비는 팀으로 탈바꿈했다. 많이 움직이는 만큼 기회는 많이 나게 되어 있고 더 신날 수밖에 없다. 또, 원주 동부는 김주성과 윤호영의 인사이드 수비능력을 앞세워 공격수를 조롱하고, 이들의 존재감을 이용해 외곽 기회를 만들어낸다. 하승진의 전주 KCC는 위력적인 슈터는 없지만, 골밑돌파로 제2, 제3의 기회를 모색하고 있다.
반면 내외곽의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슈터들이 허덕이는 팀들은 가라앉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전 같았으면 외국 선수 두 명에게 1대1이라도 시켜서 위기 탈출을 모색했겠지만 불행히도 올 시즌부터는 경기마다 단 한 명밖에 출전하지 못한다. 앞서 언급했듯, 3점슛 이외의 것으로 해결사역할을 해줄 국내 선수가 없는 팀이라면 상대가 쓰는 지역방어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처럼 슛 거리와 함께 따라온 다양한 경향들은 한국 프로 농구의 방향을 바꿔놓고 있다. 잘 뽑은 외국 선수로 1년 농사를 마무리하겠다는 생각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국내 선수들도 슛만 연마해서는 스타로 올라서지 못할 것이다. 이제 슛, 그 이상의 것을 보여줄 수 있는 농구, 비로소 농구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재미를 보여주기 위해 노력할 때가 왔다.
글 / 손대범(월간 <점프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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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손대범(월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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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종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