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너 리그에서 온 한 용병의 인터뷰. 기자가 봉중근을 아냐고 묻는다. 용병은 대답한다. ‘그렇게 미미한 선수까지 알진 못한다’ 봉중근은 봉미미란 별명을 없애기 위해 뭔가 보여줘야지, 결심했었다고 말했다. 마침내 봉중근에게도 ‘미미’ 의 어여쁜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연봉 협상은 어떻게 된건가? 진짜 사인 안 하려고 했다. 최악의 상황이 오더라도 정말 안해야지 했는데, 구단에서 좀 이해해달라고 부탁했고, 팀이 살아야 선수가 산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개인 성적도 중요하지만 팀 성적이 안 좋다 보니, 내가 이 팀 에이스다, 라고 다른 사람들한테 얘기를 못했다. 꼴찌팀에서 에이스 하면 뭐해, 이런 생각 들까 봐.사장님이 선수단 모아놓고 “팀이 우선이다, 팀이 잘돼야 선수들이 있고, 팀이 살아나야 선수들도 뜨는 거다” 하고 이야기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많이 양보하게 됐다.
어떤 지면이고, 심지어 언론에서도 당신의 연봉이 납득 간다는 글은 본 적이 없다. 그런 줄 알았으면 더 당당하게 나가야지, 그렇게 꺾이나. 나도 선수들한테는 그럴 거라고 얘기했다. 선수들조차 워낙 말이 안 된다고 그랬으니까. 나 사인 안 해, 막 그랬는데 막상 협상 들어가서는 그냥 예 예 예, 했다. 많이 아쉬웠고 속상했다. 올해는 부상 당하고 아픈 데도 2군 안 가고 끝까지 1군에서 던졌는데 말이다. 팬들을 위해 던졌고 팀을 위해 던졌다. 어린 후배들이 2군 가지 말라 그래서 안 간 것도 있다.
당신 열심히 해놓고 실속 못 챙기는 스타일 같다. 한국에 그런 사람 너무 많다. 안 싸우는 사람. 이기는 건 실력도 있지만 운도 있는 거 같다. 내가 잘해서 점수를 안 줘도 우리 타자들이 점수를 못 뽑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막 7이닝 8이닝 던지면서 1, 2점으로 막았는데 우리 타자들이 1점도 못 빼주고, 어떤 때는 2~3점 차로 이기고 있어서 마음 놓고 내려 왔더니 중간 계투가 못 던져서 지고 그런 경기가 참 많았다. 그래서 뭐 불운의 사나이다, 봉크라이다, 이런 별명도 붙이지 않았나. 하지만 어떨 땐 내가 5점을 내줘도 공격에서 6점을 뽑아줘 이기기도 했다. 물론 그런 경우는 드물었지만.
연봉 협상 과정에서 나온, 동료 선수들한테 보여준 것과 같은, 그런 아량은 도대체 언제부터 생긴 건가? 올해 특히 그랬던 것 같다. 성적 관련해서 안 좋은 일이 너무 많아서 계속 화내고있으면 안 되겠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선수들이 나보고 화나는 게 눈에 다 보인다고 했다. 화내고 집착하고 아쉬워하고 그랬다. 그런데 그런 모습 보일 때마다 다른 선수들이 불안해했다. 아무래도 팀의 에이스고, 연차로도 중간쯤 되니까. 그래서 꾹 참게 됐다. 그러다보니 나중에는 선수들에게 방망이까지 선물할 정도로 여유가 생겼다.
성적 부진할 때 동료 로커에다 편지도 넣고 커피도 넣고 그랬다는 기사는 봤다. 커피만 돌릴라 그랬는데, 덩그러니 좀 그럴 거 같아서 하나하나 이름 적어서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나도 이기는 경기만 할 거라고, 최선을 다하자고 그렇게 썼다. 선수들이 되게 감동 받아서,아, 봉중근에게 이런 묘미가 있구나, 이런 스타일이구나, 하는 이야기 듣고 참 기뻤다.
당신 아버지께서도 어느 아침 방송에서 ‘우리 애가 좀 내성적이라서’ 라고 하더라. 누나 셋에나 하나고 막내니까, 오냐오냐 키웠다고 걱정하시는 거 같다. 아버지는 아직도 나를 애기처럼 본다. 뭘 해도 불안한 느낌을 받으시는 것 같다. 미국에서는 좀 그렇기도 했지만.
성격이 바뀌었단 말인가? 많이 바뀌었다. 미국에선 거의 대화를 못했다. 영어가 무서워서 어울리지도 못하다가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차라리 오버하고 막 다른 사람 챙기고 안 되는 말이라도 활발하게 하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었다. 한국에 와서도 계속 그렇게 할 뿐이다.
당신이 한국에 돌아오게 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 이야기가 떠돈다. 아버님 병환 때문에 왔다는 이야기도 있고, 2006년 WBC를 계기로 한국에서 뛰고 싶어졌다는 이야기도 있다. 제일 중요했던 건 아버지였다. 얼마나 사실지도 모르는데, 10년 가까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해외에서 떨어져 지냈다는 게 그랬다. 그리고 2006년에 WBC를 통해 한국 선수들과 어울리는 게 너무 재밌었다는 점도 컸다. 수비 하면서도 오늘 뭐 어떻다 대화할 수 있고, 그런 게 너무 좋았다. 좀 더 즐기면서 야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때를 계기로 더 커졌다.
마치 보이스카우트 캠프 한 번 따라갔다가 자기도 보이스카우트 하겠다고 어머니 조르는 아이 얘기 같다. 한국말을 할 수 있고, 장난도 칠 수 있고, 스트레칭하면서 야구 이야기도 할수 있는 게 얼마나 좋았는지 모른다. 미국에 있으면서 제일 부러운 게 그런 거였으니까. 단어 몇 개로 이야기하면 가끔은 못 알아들어서 내가 또 창피해지고 그래서, 만날 혼자 스트레칭하고 그랬다. 1회 WBC 때 선배들이 많았는데, 이종범 선배 같은 분들 조언을 들으며, 너무 벅차고 그래서, 아, 이제 한국에서 해야 되겠다, 결심한 거다.
당신 인생에 있어서 WBC는 결정적인 계기였다. 군대 면제도 받았고, 한국 선수들과의 경험을 통해 한국에 와서 못하더라도 후회는 없겠구나 하는 결심도 섰다. 그전엔 참 불투명했다. 병역 해결 안 됐지, 신시내티에서 뛸 수 있을지 모르지, 재활하고 있었지.
그런데, 해외파가 한국에 와서 다시 예전만큼의 기량과 명성을 회복한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도 처음부터 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야구하는 방식도 다르고, 선후배간의 분위기도 달라서 적응 기간이 필요하다고 본다. 적응 기간을 얼마만큼 빨리 없애느냐가 한국으로 돌아온 해외파 선수들에게 관건인 것 같다.
07~08년에 대체 어떤 일이 있었나? 어깨도 괜찮아졌고, 기량도 월등히 좋아졌다. 훈련을 미국에서 하는것 보다 두세 배는 했을 거다. 미국에서는 딱 요만큼 하고 그래 이만큼 했으면 됐어 했는데 그게 나한테는 안 맞았던 것 같다. 더할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더 성장할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쉽게 이야기해서 몸을 사렸달까? 첫해를 마치고 코치와 함께, 또 혼자서 죽자 사자 했다. 웨이트트레이닝하면서 러닝하면서 몇 번을 토했다. 무얼해도 꼭 숨이 목까지 찰 정도로 했다. 그런 다음 캠프를 갔더니 스피드가 월등히 빨라져 있었다. 한계를 넘어섰다는 느낌이 들었다.
김성근 감독이 누군가에 대해 그렇게 칭찬하는 건 참 드문 일인데, 당신 연습 투구를 보면서 모든 투수가 당신 연습 투구를 보고 본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나? 정말로 오랜만에 최고의 피칭 연습 투구를 봤다면서 고맙다고 말했던 게 언론에 한 번 났다. 나도 되게 뿌듯했다. 김성근 감독은 어떤 선수나 존경하니까.
전력을 다해 던지는 걸 보고 그런 건가?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연습 때 제구력을 잡으려고한다. 김성근 감독이 그 부분을 봤다. 한국 투수들은 감독이나 코치가 옆에 있으면 제구력 상관 안 하고 무조건 세게 던지려고 한다. 제구가 안 돼도 공만 빠르게 던지고 보는 거다. 근데 그건 연습이 아니다. 연습때 공 열 개 던져서 다섯 개 들어가면 실전 게임 때는 두 개, 세 개도 안 들어간다. 나는 미국에서 그렇게 배웠고, 그래서 연습 때 항상 스트라이크를 던지려고 한다. 연습 투구지만, 원하는 곳에 들어갈 수 있도록 아주 공들여서 한다.
중계를 보면, 당신은 언제나 간절해 보인다. 더그 아웃에 다른 사람들 쉬고 있을 때도 혼자기도하면서 경기에 집중하고, 경기장에 나와 있을 때는 동작이 커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말할 것도 없고. 야구장에서 야구를 가장 원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승부욕이 강하다는 얘기 많이 듣는다. 끈적끈적한 건 싫다. 이기면 이기는 거고 지면 지는 거고. 근데 대부분 이기고 있을때 마운드에서 내려왔고, 그 상태로 경기를 지켜보는 모습이 카메라에 많이 비쳤다. 이겨야 되니까, 팀이 이겨야 내가 사는 거니까. 되게 간절하게 바랐다. 그런 모습을 보고 팬이 된 사람도 많다. 하지만 중간 계투들에게는 부담이었다. 점수 내주면 어떡하나, 시합 뒤집어지면 어떡하나.
당신을 보면 뜻하지 않게 울컥하게 된다. 기도하는 모습도 어찌나 간절한지. 내가 워낙 신앙심이 깊다. 기도하는 장면이 여러 번 TV에 나갔다. 이제 그냥 마음 놓고 편하게 볼까?
그게 마음대로 되겠나. 눈물도 많지 않은가? 봉크라이는 그런 맥락으로도 적절하다. 드라마 보다가도 잘 운다. WBC 결승전에서 졌을 때도 그랬다. 그렇게 죽기 살기로 했는데 일본이 이겨서 우승 트로피 안고 퍼레이드하는 거 보고 정말 억울했다.
당신이 더 많이 이기지 않았나. 당신이 그렇게 얘기하는 걸 보니 또 위로하고 싶어진다. 감동이 진할 때가 많다. 시즌 때 끝내기 안타만 쳐도 눈물이 난다.
팬들도 그럴 거다. WBC는 지금 다시 봐도 울컥한다. 재미, 있었나?
물론이지. 기도할 때는 어떤 음성을 담나? 처음에는 무조건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이기고 있을 때 내려온 경우가 많았으니까, 뭐, 점수 지켜주세요, 이렇게. 그런데 그렇게 기도하면 안 된다고 목사님이 그러시더라. 다치지 않게 해주셔서, 승패를 떠나 야구할 수있게 해주셔서 항상 감사드린다고 기도하라고 하셔서 그렇게 한다. 무조건 이기려 하는 것보다 승패를 떠나서 다치지 않고 좋은 경기를 보여주는 것 자체로 하나님께 감사하고 팬들한테 감사하다고 기도하면서 마음에 여유가 더 생겼다.
여러모로 작년에 더 성숙해진 것 같다. 우리 팀 투수가 점수를 줘도 위로해주고 감싸줄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작년까지만 해도 오로지 내 경기, 나만큼은 이겨야 해, 했다. 중간 계투를 믿지 못해서, 계속 내가 던지겠다는 의지가 컸다. 그게 좀 심했다. 근데 선배들이 그런 얘기를 했다. 네가 1이닝 2이닝 더 던지면 그 순간은 네가 이길지 모르는데, 그렇게 할수록 네가 던질 수 있는 해는 줄어드는 거다. 몸을 보호한다는 게 다 그런 뜻이다. 이제 좀 많이 수그러져서 조금 더 던지고 싶어도 참는다.
- 에디터
- 정우영
- 포토그래퍼
- 김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