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섹스 파트너와 새로운 계절을 맞고 싶었다. 기념일은 챙기지 않았다.
남자는 주말이 되면 몸부터 외로웠다. 애인이 없을 때 섹스를 할 수 있는 방법은 세 종류쯤 될까? 처음 만난 여자와 자거나, 업소에 가거나, 섹스 파트너가 있거나. 어떤 사람은 친한 친구와도 섹스를 하고, 주변의 몇몇은 직장 동료와 몸을 섞기도 한다는데, 남자는 그렇게 불분명한 관계를 만들고 싶진 않았다. 업소에 드나드는 성정의 남자는 아니었고, 처음 만난 여자와 자는 건 남자가 원한다고 맘대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대신 남자에겐 섹스 파트너가 있었다. 애인처럼 매일 만나거나, 금요일 밤마다 만나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러나 섹스하고 지내는 사이란 일정 수준 이상의 친밀함을 분명히 보장한다. 술 마시고 친구와 어깨동무하듯, 섹스한 뒤엔 여자에게 팔베개를 해줬다. 그럼 친하니까 친구인가? 글쎄. 섹스 파트너 역시 불분명한 관계이긴 마찬가지였다. 애인이든 친구든 그저 아는 여자든 이성 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어떤 기준이 있다면, 섹스 파트너는 그 기준 어디에도 완전히 들어맞지 않았다. 게다가 한쪽이 애인이 생기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끝내야 했다. 한쪽이 명확한 관계를 원하면 끝나는 사이이기도 했다. 이를테면, 섹스 파트너의 “우리 무슨 사이야?”란 질문은 연인 사이의 “우리 헤어져”와 비슷한 말이 될 수 있달까.
남자는 친구나 직장 동료와 자는 건 싫었지만, 섹스 파트너와의 불분명한 관계는 좋아했다. 섹스 파트너와의 관계는 도무지 어떤 관계인지 가늠할 수 없어도, 확실한 부분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연애와도 달랐다. 연애할 때마다 남자는 헷갈렸다. 여자가 좋지만, 그 여자의 어떤 부분이 좋은가에 대해선 확신이 없었다. 반대로 애인이 왜 자신을 사랑하는지도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외모가 맘에 들어서? 또래보다 넉넉하게 벌어서? 섹스를 잘해서? 그렇다고 물어볼 순 없었다. 혼자 고민하다 스스로가 속물같이 느껴져 이별한 적도 꽤 있었다. 그렇지만 섹스 파트너와는 섹스가 좋아서 만나고, 섹스가 시들해질 때까지 만났다. 여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가끔은 침대에서 “연애하긴 싫은데, 넌 좋아” 같은 말을 당돌하게 하는 여자도 있었다.
섹스 파트너란 규정하기 어려운 불분명한 관계였지만, 그 관계 안에서만은 정확했다. 중심엔 섹스가 있었다. 남자는 관계만 확실한 채 애매한 만남을 이어가는 연애엔 더 이상 흥미가 없었다. 섹스 파트너와의 만남도 데이트라고 말할 수 있을까? 적어도 남자에겐 그랬다. 섹스 파트너를 만난다고 대낮부터 모텔 문 앞에서 열쇠부터 흔들진 않았다. 섹스 파트너와의 만남에도 분명 절차와 과정이 존재했다. 자동차극장에서 절절한 멜로 영화를 보고 나선 덥석 손을 잡기도 했다. 여자의 기분에 따라 어떤 술집이 좋을지 미리 포털사이트를 검색해본 적도 있다. 연인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물론 낮에 만나는 경우는 드물었고, 술은 주종만 바뀔 뿐 거의 빠지지 않는 코스였다. 연애 중에 극장 개봉작을 놓치는 일이 드물 듯, 서울시내의 이름난 술집은 빠짐없이 순회했다. 물론 여자와 놀이공원을 가고 싶다거나, 곰 인형을 선물로 안겨주고 싶어지는 순간 그 관계를 정리해야 한다는 걸 남자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섹스에 관심이 없어지는 것과 반대로, 섹스 이외의 것까지 모두 좋아져버려도 섹스 파트너는 효용을 잃었다. 섹스로 시작한 관계였고, 거꾸로 돌아가 연애를 시작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와 있었다.
자연히 ‘쿨’해야 한다는 강박이 생겼다. 처음 만난 여자와 집 앞에서 실랑이를 한 적은 꽤 많았지만, 섹스 파트너가 “오늘은 좀 안 내키는데”라 말하면 남자는 더 이상 섹스를 조르지 않았다. 연락도 자주 하는 편이 아니었다. 미리 약속을 잡고 만나기보단 문자를 불쑥 보내거나 메신저를 찾았다. “오늘 뭐 해?”는 “너랑 섹스하고 싶어”와 다를 바 없는 암호였다. 그렇게 만나 가열차게 섹스한 뒤에도, 집에 돌아가는 길에 안부를 묻는 일은 드물었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차 안에서 허벅지에 머무르던 남자의 손이 어깨나 얼굴로 올라가는 순간, “오빠 여자 많잖아”라고 눙치면 남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찐한 키스는 해도 남자가 볼에 뽀뽀할 땐 목을 움츠렸다. 남자는 몸이 달아도 마음을 다스려야 했다. 그런 식으로 조절하지 않으면, 가끔 마음이 몸을 앞섰다. 관계의 위험수위다. 살을 부비고 지내는 관계라는 게 원래 그렇지 않나? “여자들은 자고 나면 일단 사귀고 싶어 해” 같은 말은 유독 멍청하게 들렸다. 남자는 과연 다른가? 허무맹랑한 마초들이나 하는 얘기라고 생각했다.
대신 침대에선 맘껏 친밀할 수 있었다. 여자와의 섹스는 만족스러웠다. 처음 만난 여자와는 탐색전이 필요하고, 애인과의 섹스엔 신경 써야 할 일이 많았다. 그러나 섹스 파트너와의 섹스엔 적당한 익숙함과 적당한 긴장이 혼재했다. 남자의 옆구리 살이 좀 삐져나오고, 여자의 제모가 완벽하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는 한편, 여전히 하늘하늘한 셔츠 마지막 단추를 열 땐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그런 채로 남녀 모두 스스로 정한 쾌락적 목표에 도달하는 데 충실했다. 서로를 만족시켜야 한다는 부담보단, 서로의 만족을 위해 도움을 주는 쪽에 더 가까웠다. 요구할 수 있는 만큼 요구했고, 둘만 아는 비밀스러운 취향도 생겼다. “이건 누구한테 배웠어?” “걔랑 했던 거 나한테도 해봐”라며 짓궂은 농담을 던지면 좀 더 흥분하기도 했다.
게다가 모든 걸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었다. 섹스 파트너보다 더 좋은 이성 친구는 없었다. 가끔은 과거 애인에게 저지른 못된 짓을 털어놓고 얌전히 안겨 있기도 했다. 여자는 온전히 남자의 편이었다. 가르치거나 훈계하려 들기보다, 그저 남자의 허물을 두꺼운 이불과 함께 덮어줬다. 남자에게 여자와의 침실은 익명 채팅방 같았다. 둘 말고는 아무도 모르는 관계, 세상에 알려지지 않을 관계. 채팅방에선 익명성을 무기로 온갖 더러운 말들을 다 쏟아냈다. 신나게 자판을 두드리다가 채팅방에서 빠져나올 때면, 영영 다시 못 볼 사이라도 남다른 위안을 얻었다.
물론 대화의 주제는 결코 중심을 향하지 않았다. 너와 나, 우리에 대한 얘긴 없었다. 애인이라면 섹스 후 빠지지 않을 우리의 미래, 우리의 다음 계절, 우리의 다음 섹스에 대한 얘긴 없었다. 그저 지금에 충실한 이야기, 혹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지난 일에 대한 이야기뿐이었다. 이를테면 몇 분 후의 섹스, 내일 아침의 섹스, 섹스 파트너를 만나기 전의 또 다른 섹스 파트너와의 섹스…. 간혹 남자는 자신이 계약직 사원이 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섹스에 다소 소홀했더라도 다른 것으로 부족한 부분을 채울 수 있는 연인 관계와 달리, 이 방에서의 섹스가 만족스럽지 않다면, 이 방 이외에서 벌어지는 모든 공간에서의 일까지 끝나고 만다.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응. 가끔 만나는 여잔 있는데, 사귈 것 같지 않아.”
친구들의 물음에도 ‘섹스 파트너’란 단어를 입에 올리기엔 여자에게 미안한 맘이 앞섰다. 여자도 자신을 그렇게 소개하진 않을 것 같았다. 캐물어도 대충 얼버무리고 넘어가는 게 보통이었다. 주말 밤을 섹스 파트너가 아닌 친구들과 보낼 땐 가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혹시 여자가 나 말고 다른 남자와 밤을 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 용건 없는 전화를 걸어본 적은 없다. 오늘 당장 달려갈 게 아니라면 다른 식으로 연락을 취해본 적도. 섹스할 때 별의별 소리를 다 해도, “걔가 너보다 잘해” 같은 말은 듣기 싫었다. 지난주에 소개팅을 했다는 말엔 “잤어?”란 소리가 목젖까지 기어 나왔다. 적어도 서로 만나는 동안만큼은 서로에게 유일한 섹스 파트너이고 싶었다. 남자 역시 다른 여자를 생각해본 적은 없다.
어쨌든 여자를 만나면 몸이 먼저 반응했다. ‘색기’ 같은 말이 다소 모멸적이라고 생각하는 남자였지만, 이 여자를 앞에 두고 그보다 더 나은 말을 찾기는 어려웠다. 추운 날엔 데이트 시간이 여자의 치마만큼 짧았다. 곧 봄이 오면 여자의 맨다리를 볼 수 있을까? 침실이 아닌 밖에서 여자의 허벅지를 보면 이상할 것 같았다. 섹스 파트너와의 관계에서 몇 번의 계절을 보낸 기억은 드물었다. 게다가 긴 겨울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자를 오래 보고 싶은 맘은 여전했다. 섹스 파트너로 남기 위해 필요한 건 서로 간의 균형이었다. 섹스의 만족도든, 감정의 수위든 쏠리지 않고 팽팽해야만 했다. 균형에 대해 여자에게 묻고 싶었지만 질문할 수는 없었다. 되레 관계가 위태로워질 것 같았다. 여자가 오해하면 어쩌지? 남자는 자신이 지겹게 잽만 날리는 아웃복서, 혹은 명징한 질문 대신 주변만 맴도는 토크쇼의 호스트가 된 것 같았다. 그런데…. 끝내주는 섹스를 마친 뒤, 여름처럼 온몸이 데워진 여자가 남자 대신 강펀치를 날렸다.
“우린 무슨 사이야?”
“응?”
“풉. 왜 못 들은 척해?”
“음… 방금 잔 사이?”
여자는 더 이상 묻는 대신 입고 있던 가운을 벗었다. 균형에 대해 고민하던 남자가 가까스로 낸 카운터펀치가 꽤 효과적이었던 걸까? 남자는 비로소 서로 간에 분명한 균형을 확인한 것만 같았다. 다시 딱딱해진 여자의 가슴을 끌어안으며 남자가 말했다.
“그리고 지금 또 잘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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