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람에 대해서는 서울의 가로수가 제일 잘 안다.
“차라리 죽여라!” 마구 가지치기를 당해 간신히 줄기만 남은 가로수 아래를 지날 때면 이런 환청이 들리곤 한다. 삼족을 멸할 기세로 한길의 가로수 전체를 전봇대 형상으로 만든 살풍경은 하도 허다해 질릴 새도 없다. 대관절 저들이 무슨 대역죄를 지었기에 사지가 잘리는 형벌을 받아야 하는가. 어미 새는 졸지에 가시면류관이 된 둥지 위를 선회하고, 무력한 행인은 모가지 달린 것이 미안해 고개를 떨군다.
올바른 가지치기는 웃자란 가지나 엇나간 가지 등을 솎아내 나무의 생장을 돕지만 자본의 생리를 따르는 그릇된 가지치기는 철저히 인간 본위로 진행된다. 비싼 간판이 제값 하려면, 가지치기 비용을 확실히 줄이려면 한 번에 많은 가지를 쳐내는 게 장땡이다. 위기를 감지한 나무가 급한 대로 줄기에서 바로 잎을 틔우든, 어떻게든 종족을 이으려 평시의 곱절이나 되는 열매를 맺든, 결국 기력이 쇠하여 선 채로 죽든 그건 알 바 아닌 게다.
한국에 사는 나무는 물경 6백50종이 넘는다. 빙하기 때 빙하의 피해를 면한 덕에 한반도는 면적에 비해 수종이 매우 다양(해 나무 공부하기에는 골치가 아프지만 그래서 뿌듯하기도)하다. 그중에서 가로수로 적합한 나무는 양손으로 꼽아도 몇 손가락 남는다. 다루는 작태를 보면 아무 나무나 고른 듯한데, 실상은 엄격한 기준에 부합하는 아주 특별한 나무만이 길가에 살 수 있다. 길가에 사는 나무를 길에서 사는 사람과 동일시해서는 안 되는 이유다.
가로수는 빨리, 크게 자라야 한다. 하루 바삐 가로수의 역할을 해내는 속성수速成樹이면서 매연과 소음 등 각종 공해 및 병충해에도 강해야 한다. 무릇 한길에 얼굴을 내밀고 서야 하니 외관도 수려해야 한다. 이 모든 조건에 부합해 서울의 첫 가로수로 낙점된 나무는 의외로 수양버들이다. 지금은 경회루나 가야 볼 수 있는 수양버들이 어쩌다 가로수가 되었을까.
가로수가 처음 등장한 때는 조선시대였으나 진정한 태동기는 일제강점기로 본다. 새 길을 열면서 길가의 나무도 새로 심었는데, 그때 두루 심은 나무가 바로 수양버들이다. 당대 사람들이 널리 아낀 데다 서울 도심에 천변이 살아 있던 때라 물가를 좋아하는 수양버들이 살기에도 알맞았을 테다. 서울시 통계 자료에 따르면 1975년, 서울에는 6천8백여 그루의 가로수가 살았는데 그때까지도 가장 많은 나무는 수양버들이었다. 버들막 늘어진 서울의 길. 잘 그려지지 않아 더 그리운 풍경이다.
이후 10년 동안, 서울의 가로수는 절정기를 맞는다. 급격한 도시화를 이루던 1985년, 아시안 게임과 서울 올림픽을 눈앞에 둔 서울의 가로수는 무려 20여 만 그루로 급증한다. 자기 복제라도 하듯 10년 만에 서른 배 가까이 늘어난다. 가로수 수종에도 변화가 일었다. 수양버들 다음으로 많던 양버즘나무(흔히 플라타너스라고 부르는데, 이는 종명이 아니라 속명으로 양버즘나무라 불러야 보다 정확하다)가 전체 가로수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며 선두로 올라섰다. 운치도 좋지만 꽃가루 덜하고 아무 데서나 잘 자라는 양버즘나무는 서울의 성마른 성미를 채우는 데 그만이었다. 1995년, 마침내 수양버들은 은행나무에게 2위 자리마저 내주고 3위로 밀려난다. <서울시 통계연보 2016>에 따르면 현재 서울의 가로수는 30만 그루를 웃돈다.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는 나무는 은행나무(11만3천여 그루), 그 뒤를 양버즘나무(6만9천여 그루), 느티나무(3만4천여 그루)가 큰 차를 두고 뒤따른다. 수양버들은 반세기도 안 돼 서울의 큰길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가로수의 역사는 제가 뿌리박고 선 땅, 서울의 역사를 따르며 급격히 변해왔다. 종과 수도 그러하지만, 발탁 조건이 퇴출의 빌미가 된 것도 큰 변화 중 하나다. 지금은 ‘가을 낭만은 무슨…, 배수로 막는 천덕꾸러기 낙엽’ 같은 뉴스 기사가 대수롭지 않다. 큰 그늘에서 잘만 쉬어놓고 큰 낙엽은 쓰레기처럼 걷어찬다. 황금빛 단풍이 곱기도 곱다며 책에 끼워 넣을 때는 언제고 거 구린내 한번 지독하다 욕하며 수그루만 심겠다는 골라잡아 1천원 같은 싸구려 발상도 한다. 당장 인중에 고이는 냄새가 중하지 대자연의 섭리 따위, 안중에 없다.
가로수는 도시의 정체와 품격을 규정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중앙공원이 제아무리 풍요롭다 해도 맨해튼의 5번가 가로수를 보면 뉴욕도 별거 없고, 콩코르드광장과 드골 광장을 잇는 샹젤리제 거리의 멋들어진 가시칠엽수 아래를 걷노라면 ‘아, 이래서 다들 팔휘, 팔휘 하는구나’ 깨닫는다. 그렇다면 서울을 대표하는 가로수가 사는 길은 어디일까.
제일 먼저 떠오르는 곳은 이태원로의 녹사평역과 삼각지역 구간이다. 이 길은 용산 미군기지의 메인 포스트와 사우스 포스트 사이를 동서로 가르는 경계다. 차도 왕복 4차선, 인도마저 너른 길은 그만큼 공중도 광활하여 나무가 크게 자란다. 그 길에 사는 나무는 서울에서 두 번째로 많은 가로수이기도 한 양버즘나무로, 태평양을 건너왔다 하여 양洋씨 성을 달고 나무껍질이 꼭 버즘(버짐) 핀 듯 벗겨진다 하여 그 같은 이름이 붙었다.
양버즘나무 가로수 길이 자리한 이태원로 일대는 남산을 등지고 한강을 마주한 요지로, 13세기 몽고의 병참기지가 들어선 이후 일본군과 미군이 연달아 꿰찬 곳이다. 연간 수십조 원을 쓰고도 자주 국방을 이루지 못하는 이 땅의 딱한 처지를 대변하는 이 길은 3백만 평이 넘는 딴 나라 군대의 주둔지와 함께 대한민국 국방부까지 자리한 그야말로 ‘국방의 길’이다. 그 길에서는 나무마저 병사兵士로 보인다. 마침 양버즘나무는 나무껍질이 떨어진 자리와 남은 자리가 얼룩덜룩 얼룩무늬를 이루고, 녹색과 갈색, 연황색 등이 어우러져 국방색을 띠니 군복을 입은 듯도 하다. 요컨대 이태원로의 양버즘나무 가로수 길은 서울의 역사성과 그 길에 깃들어 사는 나무의 속성이 잘 잇닿는 길이다.
같은 나무인데도 대학로의 양버즘나무는 보다 자유로운 인상이다. 마로니에(Marronnier, 가시칠엽수를 이르는 프랑스어. 마로니에공원 중앙의 큰 나무는 칠엽수이고, 예술가의 집 앞에 나란한 두 나무가 가시칠엽수로, 칠엽수와 가시칠엽수는 열매의 가시 유무로 구분한다)가 자동 연상되지만, 실상 대학로의 푸름을 지탱하는 건 부유하는 청춘과 대비되는 곧은 양버즘나무다. 녹사평역과 삼각지역 구간의 이태원로처럼 인도와 차도가 넓은 덕도 있지만, 특색 있는 가로를 조성하려는 노력이 더해져 대학로의 양버즘나무는 건물보다 높이 자랐다. 이제 나무는 간판을 가리지 않고, 사람도 나무를 함부로 해치지 않는다. 대학로의 양버즘나무 가로수 길은 대학천이 사라진 자리에 녹음의 강을 선사하는 동시에 서울이라는 거대 도시에서 사람과 나무가 함께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기에 갑절로 반갑다.
앞선 두 길도 좋지만, 서울에서 가장 아끼는 가로수 길은 따로 있다. 서울에는 3만 그루가 넘는 느티나무 가로수가 사는데 긴 길을 이루는 곳은 몇 안 된다. 그중 당인리발전소와 절두산성지를 잇는 느티나무 가로수 길은 봄밤 몰래 걷는 길이다. 인적이 드물어 한적하고, 나무 아래 작고 단정한 가게들이 들어선 길은 고창 읍내처럼 정겹다. 이 길에 사는 느티나무는 중부지방을 대표하는 당산목堂山木, 마을을 지키는 수호목守護木, 사방 어디에서 보아도 매양 원만해 마을 입구 정자에 너른 그늘을 드리우는 정자목亭子木이었다. 마을이 와해되면서 느티나무도 점점 사라졌는데, 그래서 더 아스라한 나무다.
느티나무는 이 시대에 결핍된 정서와 가치를 두루 간직한다. 뭇 생명을 넉넉히 보듬는 모성의 나무로 정이 깃든 공동체, 마을에 대한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홀로 있을 때 고유성이 더 두드러지지만, 여럿이 어우러져도 그 나름의 조화를 이룰 만큼 유연하기도 하다. 키가 20~30미터까지 크게 자라는 나무에 비해 길이 좁아 늘 아쉬운 당인리 느티나무 길을 걸으며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공중에서 맞닿는 길이 서울을 상징하는 날이 오기를 공상한다.
요 몇 년 사이에는 길가에서 이팝나무와 튤립나무를 자주 본다. 급기야 이팝나무는 왕벚나무에 이어 서울에서 다섯 번째로 많은 가로수로 등극했다. 봄철에 밥알처럼 새하얀 꽃을 피우는 이팝나무와 잎과 꽃 모양이 튤립을 닮아 목백합이라고도 불리는 튤립나무가 가로수로 각광받은 데는 ‘뭐든 예뻐야 돼’라는 풍조가 한몫했다.
사람처럼 나무도 제게 알맞은 자리가 따로 있는데, 이를 적재적소에 빗대어 적수적소適樹適所라 한다. 적수란 외양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그곳(토양과 기후뿐 아니라 장소의 역사성도 포함해야 한다)에 어울리는 내실을 갖춘 나무다. 마땅한 적수가 없다면 그곳을 적소로 만드는 노력이라도 해야 하건만, 글쎄다. 약품 풀어보도 씻은 물이나 먹이고, 비도 해도 못 들게 밑동에 덮개까지 씌워놓고 그저 잘 자라기만을 바라는 마음은 죄 짓고 순결하기를 바라는 청문회 증인과 뭐가 다른가 싶다.
이 도시가 가로수를 대하는 방식이 염려스러운 이유는 그것이 곧 사람, 뭇 생명을 대하는 방식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필요할 때는 마구 가져와 부리고, 그렇지 않으면 함부로 해치거나 내친다. 내양보다 외양에 치중하고 온갖 악조건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강요하는 행태까지 닮았다. 차라리 죽이라는 말이 비단 나무의 외침으로만 들리지 않는 연유다.
‘서울 사는 나무는 곧 서울 사는 나’와 다르지 않다. 하니 적소를 만들고 적수를 골라 심는 일은 녹봉 받는 이들에게 맡기더라도, 가로수를 향한 무덤하고 탁한 시선만은 깨끗이 닦아야 한다. 나아가 비료 준답시고 오줌 휘갈기며 꼬마 전구 휘감고는 “따뜻하지?” 묻는 대신, 햇빛과 공기와 물만으로 수백 년을 살아내는 지혜로운 생명체에게 이 혼돈의 시대를 살아낼 길, 곧 섭리를 물어야 한다. 우리와 함께 서울을 살아가는 또 하나의 거대한 생명체, 나무는 언제까지나 묵언의 답을 건넬 테다. 너무 거창한가? 그럼 다 때려치우고 이것만 기억하자. ‘서울의 가로수는 살아 있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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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세이 ('서울 사는 나무'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