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대. 누군가에게는 청춘이고 낭만일 나이 이고 누군가에게는 혹독한 시기다. 나는 그 모든 시선에서 벗어나고 싶다.
글을 쓰기 위해 20대, 그리고 청년이라는 단어를 떠올려봤다. 닿을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졌다. 취업과 등록금 문제를 껴안고 있는 세대, 사회보장으로 보듬어야 할 세대라는 신문 기사를 본다. 하지만 솔직히 나는 20대가 지금 공통적으로 어떤 문제에 직면해 있는지부터 확실히 모르겠다. 20대의 한 중간을 보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솔직히 겪고 있는 청년 문제가 없다. 아직 취업까지는 1년 정도 여유가 있고 부모님의 지원과 학보사에서 나오는 취재비, 장학금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대고 있다. 언론에서 다루는 청년 문제가 딱히, 아직은 공감되지 않는다. 이런 내가 ‘20대는 모두 취업 걱정, 등록금 걱정 등 고민이 많을 거야!’라고 가정하고 글을 써가는 것이 맞는 걸까. 이런 고민은 하나의 의문으로 이어졌다. 왜 우리가 하나의 세대로 구분되어야 하나.
우리는 지금 ‘우리’로 불릴 수가 없다. 맞닥뜨린 현실은 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정치적으로도 보수와 극단적 보수가 있고, 진보와 극단적 진보도 있을뿐더러 정치색을 드러내지 않는 중도도 있다. 경제적으로도 다르다. 누구는 집에 돈이 많아 돈 걱정 혹은 취업 걱정까지 하지 않아도 되지만, 또 누구는 당장 내일을 살아가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부모님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묶일 수 없다. 부모의 경제적 상황, 살아온 배경에 따라 각기 다른 성격과 가치관을 갖고 있다. 그럼에도 항상 하나의 단어가 우리를 대변해왔다. ‘88만원 세대’, ‘N포 세대’, 조선일보가 우리에게 붙여준 ‘달관 세대’까지. 우리들의 동질성만 강조되어 붙은 이름표다. 우리가 갖고 있는 이질성은 철저히 무시되어왔다. 이 이름표들은 20대 전체에 대한 이미지를 만들었다. 20대는 열심히 비정규직으로 일해 버는 한 달 임금이 88만원밖에 안 되는 불쌍한 세대. 혹은 덜 벌어도 덜 일해서 행복한, 멍청하고 어리석고 가여운 세대. 혹은 당장의 대학교 등록금도 버겁고 졸업 후 취업은 더욱 버겁고 취업 후 결혼 생활은 더더욱 버거운, 안쓰러운 세대. 20대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에게 남은 건, 연민이었다. 불쌍함이었다. 그리고 해야 할 투표도 하지 않는 무기력한 세대라는 인식이었다.
연민은 청년이라는 단어를 통해 극대화된다. 청년이라는 단어는, 해결해야 하지만 해결 하기는 꽤 어려운 커다란 사회 문제 그 자체가 되었다. 대선, 총선 등등 우리의 표가 필요할 때마다 우리는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불쌍한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번 대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후보들은 청년이라고 불리는 우리의 표심을 잡기 위해 여러 공약들을 내놓았다. 우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취업 문제를 해결할 방법으로 일자리 정책도 선보였다. 새로 당선된 문재인 대통령도 공공부문 중심 일자리 81만 개 창출, 노동시간 단축, 비정규직 격차 해소, 최저임금 1만원 인상, 청년고용할당제 확대, 청년구직촉진수당 도입, 청년과 신혼부부집 걱정 해결이라는 공약을 내세웠다. 우리는 사회에서 불쌍한 존재다.
한 칼럼니스트는 20대를 두고 욕망해야 하지만 그러지 않는 존재라고 했다. 갈구해야 하지만 그것조차 하지 않는 존재라고 했다. 갖지 못할 걸 알면서도 미련을 떨치지 못해 내달리고, 그 때문에 상처받지 않는 존재, 상처받아도 괜찮은 존재라고도 했다. 극작가 버나드 쇼가 “청춘을 청춘에 주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말한 이유도 우리 존재의 당위성에서 찾았다. 조선일보는 우리를 ‘달관 세대’라고 불렀다. 일본의 ‘사토리 세대’에서 파생된 ‘달관 세대’는 안분지족하는 법을 깨달은 세대를 지칭했고, 그것은 곧 지금 한국 청년들의 모습이라 했다. 우리를 달관 세대라고 부르는 그들은 우리가 정규직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중저가 옷을 입고 햄버거 하나를 먹으며 행복해한다고 말한다. 노력하지 않는 세대, 포기하는 데 익숙한 세대, 현실에 안주하는 세대. 우리가 달고 있는 또 다른 이름표다.
우리는 욕망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도전해야만 하는 존재인가? 갖지 못할 걸 뻔히 알면서도 왜 미련을 버리면 안 될까? 왜 우리는 그런 세대일까?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인데도 말이다. “청춘을 청춘에 주기에는 아깝다”는 버나드 쇼의 말은 그 칼럼니스트가 해석한 것과는 달리 젊음이 낭비되고 있다는 의미일것이다. 젊음과 청춘의 소중함을 까먹고 낭비해 노력하지 않는 우리를 비판하는 말이 아니라, 우리의 젊음과 청춘에 여유가 없다는 뜻일것이다. 우리들을 압박하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의 젊음과 청춘이 자리할 곳은 없어졌다. 지금 우리들에게 청춘을 누릴 자유가 있을까? 청춘은 아파야 하고, 도전해야 한다는 프레임에 오히려 우리의 20대와 청춘이 소비되고 있다. 지난해 휴학할 때 “나 휴학할 거야!”라는 소리를 들은 주변 사람들이 했던 모든 말은 “휴학하고 뭐 할 건데?”였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친구들이 휴학한다고 하면 나도 자연스레 “휴학하고 뭐 할 건데?”를 물었고 친구는 눈치를 보며 이런저런 대답을 늘어놓았다. 우린 눈치를 보지 않고 휴학할 수도 없다.
“이제 나는 세상이 아주 흰색이라고 생각해. 너무너무 완벽해서 내가 더 보탤 것이 없는 흰색. (중략) 여기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이 품고 있던 질문들을 재빨리 정답으로 대체하는 거야. 누가 빨리 책에서 정답을 읽어서 체화하느냐의 싸움이지. 나는 그 과정을 표백이라 불러.” 장강명 작가의 <표백>에서 세상은 모두 흰색이라고 말한다. 너무나도 완벽한 흰색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단지 표백되어 흰색의 일부가 되어갈 뿐이라고 이 소설은 이야기한다. 현실 속 우리도 청년이라는 하얀 단어에 의해 점점 하얗게 변해가고 있다. 하얀색을 제외한 다른 색은 없다. 젊음과 청춘을 즐길 여유도 없으며 다른 색을 보일 자유 또한 없다. 다른 색을 보이려고 하면 강제로 다시 흰색으로 변한다. 한 번뿐인 20대인 우리는 우리만의 삶을 그려나갈 기회도 없이 정해져 있는 규칙을 따를 뿐이다. 20대라는 이유로 ‘청년’이라고 불리는 우리. 도전해야만 하는, 상처 받아도 괜찮은, 오히려 상처받고 실패해야 하는 세대인 우리. 흰색의 세상에 우리만의 색은 숨긴 채 새하얗게 표백되는 우리. 진정한 청년의 의미를 되찾고 싶다. 연민, 불쌍함, 감시, 동정의 대상에서 벗어나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창 무르익은 시기에 있는 사람이라는 본래 청년의 의미로, 각자의 색깔로 돌아가고 싶다. 그래야 비로소 청년 문제라고 불리는 난제들을 우리 스스로 해결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
세대론은 다만 함정일까? 그것에 대해 말하느니 결국 스스로 덫을 놓는 격일까? 의심하며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고 답한다. 나와 내 세대는 무엇인가? 서로 다른 해에 태어난 12인의 칼럼과 서울에 사는 젊은 사진가 7명이 ‘세대’라는 테마로 자유로이 작업한 사진을 나란히 싣는다.
- 에디터
- 글 / 심기문(1994년생, '고대신문' 기자)
- 포토그래퍼
- 심규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