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3대 엔터테인먼트 기획사가 주춤하다. 그들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가 변했는지도 모른다.
엠넷 <프로듀스 101>에는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기획사들이 잔뜩 등장한다. 안 그래도 아이돌이 너무 많다고 성화지만, 아이돌 데뷔를 준비하는 기획사는 더 많다. ‘춘추전국시대’ 정도의 표현으로는 담을 수 없는 어지러운 지형도에, ‘3대 기획사’라고 불리는 이들이 있다. SM 엔터테인먼트, YG 엔터테인먼트, JYP 엔터테인먼트.
SM은 여전히 유효한 아티스트들을 거느리지만 2016년, ‘플래그십’으로 추진한 NCT가 아직 시장을 설득하지 못했다. 레드벨벳(2014~)도 지금의 인기를 얻기까지 3년 이상 걸렸다. JYP는 트와이스(2015~)가 데뷔 시점부터 ‘대세’로 자리 잡아 선전하고 있다. 반면 갓세븐(2014~)이 최근에야 안정세를 보이지만, 국내 지명도는 여전히 아쉬움이 있다. YG도 아이콘과 위너(2015~)가 일찌감치 강한 팬덤을 일궜으나 대중적 인기는 비교적 최근의 이야기다. 블랙핑크(2016~)는 노래가 광범위하게 알려지고 해외의 인기도 높지만 작품 수가 현저히 적어 ‘자리 잡았다’는 인상은 약하다.
이들 중 누구도 ‘실패작’이나 ‘인기 없는 그룹’은 아니다. 다만 대형 기획사라는 이름과 그에 대한 기대치에 비할 때 의아한 구석이 있다. 데뷔 이후 대중적 설득력을 얻기까지 때론 갈짓자 행보를 보이고, 안정세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점은 예사롭지 않다. 아이돌 시장은 회전이 빠르고, 한번 마이너로 ‘찍히면’ 회복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 데뷔 2년이 넘도록 확신을 주지 못한 채 대기만성하는 그룹은 찾아보기 어렵다. 걸스데이가 정착하는 데 2년 이상 걸렸다는 게 신화처럼 기억되는 시장이다. 그래서 인프라와 노하우를 갖춘 대형 기획사가 “옛날 같지 않다”는 말을 듣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사이 방탄소년단(빅히트 엔터테인먼트)이 세계 시장을 뒤흔들어놓았다. 이들의 성공에 대해서는 이미 작년부터 너무나 많은 이야기가 쏟아졌으니 여기서는 간단히 넘어간다. 다만 2013년 데뷔 초반부터 해외 팬들의 비상한 관심을 모았고, 작년 빌보드 뮤직 어워드를 기점으로 국내에 역수입되다시피한 사례다.
이를 두고 ‘중소기획사 신화’라고 부른다. 세븐틴(플레디스 엔터테인먼트)은 흥행에 기복은 있어도 데뷔 초반부터 상당한 규모의 팬덤을 일궜다. 아이돌 좀 안다는 사람이라면 ‘엑소에 대해 함부로 말하면 위험하다’는 것과 비슷하게 세븐틴을 인지한다. 2016년 ‘시간을 달려서’로 돌풍을 일으킨 여자친구(쏘스뮤직)도 불과 세 장의 미니 앨범으로, 사옥이 지하에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프로듀스 101>마저 소형 기획사 연습생들의 반란이라고 부른다.
조금 냉정하게 생각하면, 세간의 ‘중소기획사’는 ‘3대 기획사를 제외한 모두’다. 삼성이나 LG가 아니라는 이유로 유한양행을 중소기업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어쩌면 골리앗을 꺾는 다윗을 보고 싶은 마음에 양자의 체급 차이를 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목하고 싶은 것은 ‘다윗’의 기민함이다. 작년 2월 미국 음악 시장은 그래미 시상식을 통해 트럼프 행정부의 인종차별적 성향을 경계하는 분위기를 드러냈다. 방탄소년단이 ‘모든 종류의 소수자들의 연대’라는 메시지를 담은 ‘Not Today’ 뮤직비디오를 공개한 것은 불과 6일 뒤다. 미국 음악 시장이 찾고 있는 어떤 상징적 존재로 방탄소년단이 입후보한 것이다. 작년 5월 빌보드 뮤직 어워드 수상이 그 성과였고, 이것은 4개월 뒤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카드(DSP 미디어)도 흥미롭다. 이들은 국내 시장 필패의 공식에 가깝다. 혼성 그룹인 데다 노래와 안무가 섹시한 편이라 국내 팬들은 부담을 느끼기 쉽다. 그러나 해외 팬들은 케이팝의 완성도에 열광하면서도 방습제로 촘촘히 포장한 듯한 면에 살짝 갈증을 느낀다. 카드는 그 지점을 정확하게 파고들었다. 무대 위의 성적 긴장감을 멤버들의 유쾌함과 친근함으로 담아냈다. 종종 “케이팝 댄스 동아리 같다”는 말을 듣는데, 바로 그것이 서브컬처화된 해외 케이팝 팬들의 접근성을 높였다. 드림캐쳐(해피페이스 엔터테인먼트)는 인터넷상의 해외공연 청원 플랫폼인 ‘마이뮤직테이스트’를 통해 유럽 투어를 다녀왔다. 데뷔 1년 남짓의 걸 그룹으로선 이례적이다. 2014년 데뷔한 걸 그룹 밍스(MINX)를 ‘리폼’해 재데뷔한 그룹으로, 록 사운드 기반의 어둡고 무거운 곡들을 선보인다. 또한 ‘악몽 사냥꾼’이라는 판타지적 소재가 꾸준히 이어지는 스토리라인을 제시하고 있다.
이 사례들이 보여주는 것은 세 가지다. 첫 번째, 기획력의 가치. ‘누난 너무 예뻐’나 ‘Lucifer’를 부르는 샤이니는 당시의 작은 기획사 출신 아이돌과 비교됐다. 바라보는 인간의 땀과 눈물만으로는 도무지 어쩔 수 없는 ‘때깔’의 차이가 확연했다. ‘퀄리티’ 경쟁의 시대였다. 노하우와 자본력이 결정적이었다. 그러나 2010년을 전후로 케이팝 전반의 수준이 급격히 높아졌고, 시장 전체에 인프라가 쌓였다. 여전히 대형 기획사의 A&R들은 감탄할 만한 곡들을 구해오지만, 대중이 체감하는 수준의 차이나 그것이 갖는 폭발력은 과거보다 줄었다.
이때 대형 기획사는 그 몸집이 방해 요소이기도 하다. 아이돌은 데뷔시켜놓으면 알아서 굴러가는 무한 동력 장치가 아니다. 이미 거느리고 있는 쟁쟁한 아티스트들은 요구사항도, 케어할 사항도 많아진다. 빠르게 변하는 시장에서 방탄소년단처럼 소속사의 전력을 집중해 대응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카드나 드림캐쳐처럼 틈새를 파고들려 해도 리스크가 크다. 성공의 규모가 작으면 ‘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글로벌 프랜차이즈라는 NCT처럼 거대한 패러다임을 내놓고 정면 돌파를 시도하거나 끝없이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 YG가 아티스트는 많은데 하도 음반을 내지 않아서 대표가 ‘보석함’을 끌어안고 있다는 말을 듣는 것도 어쩌면 그래서다. 3대 기획사 중 가장 잘되고 있는 트와이스에게, JYP 사내의 별도 전담팀이 있다는 뒷이야기도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두 번째, 아이돌의 역사가 20년을 넘어가면서 소비자들의 욕망이 변했다. 이제 팬들은 ‘자신의 소년/소녀’에게 투표해서 아이오아이, 워너원을 데뷔시키거나, 자신이 몸을 던져 방탄소년단이 ‘흙수저’에서 월드 스타로 가는 길을 닦아주려고 한다. 혹은 카드처럼 발굴해내거나, 드림캐쳐처럼 이야기를 해석하길 원한다. 중소기획사가 유리한 것도 그래서다. 명시적인 ‘부족함’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는 케이팝의 ‘탈-케이’다. 국내 음악 시장은 1990년대 한 앨범이 수백만 장씩 팔릴 때조차 너무 작았다. 아이돌 산업은 작은 시장을 쥐어짜는 ‘솔루션’이었지만, 연간 1백 팀이 데뷔할 정도로 공급이 많아졌다. 해외 시장 없이는, 아이돌 산업의 내외부 모두 지탱이 불가능해졌다. 국내에서 성장해 해외로 수출하는 시대가 가고, 세계에 뿌리를 내려야 하는 시대가 오고 있다.
어쨌거나 3대 기획사는 각자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YG는 사업을 다각화하는 가운데 네이버와 손을 잡았고, SM은 인공지능을 비롯한 신기술을 통해 고부가가치 창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탈-케이보다 탈-케이팝이 먼저인 걸까?) JYP는 트와이스의 성공을 바탕에 두고 얼마 전 스트레이키즈를 데뷔시켰다. 과거보다 시간이 걸린다고는 해도 소속 아티스트들은 ‘그래도 역시…’라는 말이 나오기에 충분한 ‘퀄리티’를 선보이고 있다. 케이팝을 브랜드화해 해외에서 현지인들로 구성된 케이팝 그룹을 만들겠다는 NCT를 봐도, 이 관록의 기획사들이 미래를 내다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다만 케이팝 산업은 크게 요동치고 있다. ‘3대 기획사’마저 부침을 겪을 정도로 말이다. 특히 해외 시장 돌파라는 과제는 앞으로 케이팝의 생존 자체를 결정지을 만큼 중요하다. 독특하고 참신한 기획들이 명멸하고 있으니 흥미로운 작품을 건질 기회도 많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얄미운 금수저들의 몰락’이나 ‘흙수저들의 노오력’이라는 납작한 관점으로는 결코 포착되지 않을 것이다. 글 / 미묘(웹진 <아이돌로지> 편집장)
- 에디터
- 정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