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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치기] [비치 온 더 비치]를 연출한 정가영의 욕망

2019.03.11GQ

가영은 오늘 이 남자와 자고 싶다. 영화 <밤치기>, <비치 온 더 비치> 속 가영은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정가영은 이 영화들의 감독이다.

연출한 영화 대부분이 ‘정가영’이 남자에게 수작을 거는 내용이다. 익히 봐온 홍상수 영화 속 지질한 남자 같은데, 이 역할을 여자가 맡는다는 것만으로도 쾌감이 있었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이야길 했다.

혼자 각본 쓰고 연출하고 ‘정가영’이란 이름으로 연기까지 한다. 자기 자신과 아주 밀착된 이야기 같다. 연애 좋아하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 자체를 좋아한다. 좋아하는 사람을 보면 내가 가진 에너지가 엄청나진다. 살맛 나지. 초등학생 때부터 학교에 남자가 있으니까 학교를 갔고, 반마다 좋아하는 애가 있었다. 그때부터 고백하는 것에 희열을 느꼈달까? 끊임없이 고백했다. 그 깜짝 놀라는 얼굴들이 좋았다. 내가 자기 좋아한다고 하면 얼마나 기쁠까? 정가영의 고백을 받는데.

당신의 영화에서도 남자들이 저돌적인 고백 혹은 유혹을 받고 당황스러워한다. 그 순간의 긴장이 재미있다. 당황스러워하는 남자가 내 판타지다. <비치 온 더 비치>는 전 남자친구를 찾아가 자자고 조르는 이야기인데, 현실에서는 이렇게 나오면 대부분 자준다. 나와의 섹스를 거부하는 전 남자친구가 오히려 판타지지. 하하하. 쉽게 자면 재미없다.

육탄 공세가 아니라 질문 공세를 펼치면서 말이지. <밤치기> 찍으면서 깨달은 건,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짓궂은 질문을 엄청 한다는 거다. 당황하는 반응을 즐기고. 그런데 생각해보면, 답을 듣고 싶다기보단 질문하는 내 자신에게 만족하는 것 같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운 마음은 없나? 적어도 민망해지는 순간은 싫을 수 있을 텐데. 왜 민망하지? 고백하는 순간 갑이 되는 거다. 관계가 역전된다. 나는 이제 내 마음을 꺼냈으니까 뭐라고 답을 듣든 후련하다. 하지만 상대는 나를 볼 때마다 신경이 쓰일 거다. 다시 마주치면 이제 그가 날 좋아할 것만 같다. 적어도 내가 대시한 사람 중 날 이상하게 보는 사람들은 없었다. 누울 자리 보고 누워 발까지 뻗는 타입. 하하하. “그래도 넌 솔직해서 좋다”고들 한다.

정가영의 영화가 흥미로운 건, 여자의 도발이 좀처럼 먹히질 않는다는 거다. 영화 속 남자들은 대개 조신하고 방어적이고, 끝내 넘어가지도 않아 여자를 비참하게 한다. 왜 그들은 실패하고 자조하나? 실패담이 더 매력적이다. <짝>에서도 커플이 성사되는 것보다 선택 못 받아서 도시락 혼자 먹는 게 더 재미있다. 비참하다는 감정에 파고들어 자조하고 싶었다. 보고 나서 관객들이 웃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여운이 남는 영화가 좋다. 우디 앨런 영화 중 <블루재스민>을 제일 좋아하는데, 비참함의 끝이다.

영화 속 가영의 유혹을 받는 남자들은 전부 여자친구가 있거나 유부남이라는 윤리적 제한을 갖고 있다. 단순하다. 그래야 갈등하고, 텐션이 생기니까. 더 머뭇거리고 주저할 수 있도록 만든 거다. 이야기에 있어 윤리적인 딜레마 상태를 좋아한다. 별 거 아닌 걸로도 졸지에 수렁으로 빠져버리는 상황. 나 자신도 그런 딜레마에 퐁당퐁당 잘 빠진다. 어쩌면 딜레마가 이야기의 기본 아닐까? 누군가가 바보가 될 때, 곤경에 처할 때 이야기는 재미있어진다.

그렇다면 이야기로서 연애는 어떤 가치가 있나? 사람은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인간적으로 변하지 않나? 이야기에서도 사랑에 빠졌을 때 가장 살아 있는 듯한 캐릭터가 등장한다. 어릴 때부터 그런 것들에 매료됐다. 우디 앨런, 홍상수, 허진호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고 예능 프로그램 <짝>의 애청자였다. <짝>은 거의 연애를 실험하는 다큐멘터리나 다를 바 없는데, 인간의 본능을 보여준다. 엄청 흥미롭다.

독립영화계에 연출과 주연을 겸하는 감독은 꽤 있지만, 정가영의 영화가 특별한 지점은 항상 ‘정가영’이라는 이름으로, 비슷한 모습으로 출연하기 때문이다. 정가영이라는 인물을 연기하는 까닭이 있나? 내가 아닌 캐릭터로 장편을 찍을 자신이 없었다. 그럼 마흔에 데뷔해야 할 것 같았다. 내가 가장 잘 알고, 가장 자신 있는 ‘정가영’이라는 인물을 보여줘야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나는 연기가 재미있고, 내가 나와 같은 캐릭터라 직접 연기했다. 자기 이야기를 스스로 한다는 게 부담스럽다고 느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나한텐 그런 부담이 없다. <밤치기> 별점평에 박평식 평론가가 “솔직담백 또는 자아도취”라고 썼는데, 뭐 맞는 것 같다. 자아도취가 나쁜 건 아니잖아. 영화판에서야 별로 없지, 사실 유튜브에서는 기획, 제작, 출연, 편집 다 유튜버가 한다. 그런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가영의 영화들은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너와 극장에서>에서는 영화 속 정가영이 실제 정가영이냐는 질문이 지긋지긋하다고 말했다. 불가피하게 한 번 더 물어본다면, 영화 속 정가영과 실제 정가영은 어떻게 다른가? 내가 가진 재미있는 지점들을 영화 속에선 더 재미있게 한다. 사실 동일인물이긴 하다. 너무 동일인물이라고 하면 없어 보일까 봐 그런 거다. 하하하. 영화를 만들 때, 그때그때 내가 하고 있는 고민들이 담긴다. <밤치기>에서는 구애라는 건 뭘까, 비참해지면서까지 그렇게 애정을 구할 가치가 있는 걸까. <비치 온 더 비치>에서는 한때 누구보다 가까웠던 전 남자친구와 나는 지금은 어떤 관계인 걸일까. <너와 극장에서>에서는 내 삶이 영화화되는 지점에서 나는 어떤 포지션에 있어야 할까. 지금 준비 중인 세 번째 장편 <하트>에서는 나를 힘들게 했던 경험들을 영화화하는 정가영이 나온다. 연애 감정으로서의 비참함과 창작자로서의 비참함이 뒤섞인다. 엄청 자조적인 영화다. 그렇게 영화화하고 나면 고민이 지나가는 것 같다. 나름의 해결이 된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진학하고 1년도 안 돼서 때려치우고 나와 혼자 영화를 찍었다. 학교 두 군데 때려치웠다. 학교랑 안 맞더라. 장학금 줘도 못 다닌다. 자기 돈 내고 학교 다니면서 스트레스 받는 게 이해가 안 됐다. 등록금으로 단편 한 편 찍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지. 재미있는 수업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술이 배워서 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걸리적거리는 게 많았다. 워크숍에 참여하면 품앗이로 도와준 모든 스태프를 돌아가며 도와야 하잖아. 나는 절대 그런 거 못한다. 남의 밑으로 들어가는 거. 내가 왕인 게 편하다. 하하하. 하지만 이번 작품은 영화과 재학생, 졸업생들로 프로덕션을 처음 꾸렸는데, 그 시스템을 보니 영화과에서 이런 걸 배우는구나 싶다.

시나리오부터 현장에서 연기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나? 시나리오는 빨리 쓴다. 꽂히는 느낌이 있을 때 그 느낌에 기대서 빨리 쓰고, 되도록 적은 회차로 이야기를 찍는다. 첫 장편은 딱 3백만원으로 찍었고, 두 번째 작품은 레진에서, 세 번째 작품은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지원을 받았다. 현장에선 앵글 잡고, 나 포함 인물 위치하고, 모니터링하고. 연기를 하다 보니 조감독과 촬영감독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 외엔 스태프들을 최소화하는 편이다. 적은 돈, 제한된 장소, 한정된 인물끼리 하는 작업이다 보니 현장 인원이 많아지면 밀도가 낮아진다. 겉도는 스태프가 보이면 집중도가 떨어지니까.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인원으로 진행하고, 내 작품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있는 사람들로 팀을 꾸린다.

단편 <조인성을 좋아하세요>에서는 혹시나 했는데 정말 조인성이 나온다. 어떻게 섭외한 건가? <더 킹>을 보고 꿈에 조인성이 나왔다. 꿈의 여운이 가시기 전에 시나리오를 써서 매니지먼트로 보냈는데, 바로 다음 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온 거다. 조인성이었다. 재미있게 읽었다, 언제 찍을 거냐더라. 영화 끝나고 술 한번 먹자고 하셔서 술자리도 했는데, 얼굴 보느라 무슨 얘기했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건, 나한테 “폼을 유지하라”고 하더라. 사실 그때는 “폰을 유지하라”는 줄 알고, 2G폰 쓰는 걸 유지하라는 말인가 착각했다. 생각해보니 지금의 자세를 유지하라는 말이었던 것 같다. 하하.

말 나온 김에, 2G폰을 쓰는 이유는 뭔가? 스마트폰을 쓰면 폰에 지배당하고 얽매일 것 같다. 너무 좋아하니까 거리를 둔다. 단조로운 게 좋다.

남자는 어떤 사람을 좋아하나? 백치미 있는 남자.

조인성 말고 캐스팅하고 싶은 남자 배우가 있나? 강하늘. 나는 백치미, 섹시함, 코믹 연기 세 가지를 갖춘 남자 캐릭터가 좋다. 이 셋 다 가능한 배우가 아닐까. 착한 남자, 그런데 섹시해.

남자에게 수작을 거는 ‘가영’을 좀 더 보고 싶은 동시에, 정가영의 영화 세계가 어떤 방향으로 팽창해 나갈지 궁금하기도 하다. 그때그때 욕망에 충실한 영화. 욕망들은 늘 변화하니까 어떤 내용이 될지 나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로맨틱 블랙 섹스 코미디는 계속하지 않을까. 하하.

차기작은 뭔가? 세 번째 장편 <하트> 다음 작품은 CJ에서 들어가는 상업영화다. 섹스 파트너로 만난 두 남녀의 로맨틱 코미디인데 기존 섹스 파트너 영화와 다른 점이 있다면, 여자가 주도하고 남자는 수동적으로 끌려 다닌다. 똑똑하고 연애에 회의적인 여성이 주인공으로, 캐스팅이 중요할 것 같다.

정가영의 현재 욕망은 뭔가? 입신양명. 짱이 될 거야. 청룡영화상 최다관객상 받고 싶다. 하하하. <밤치기> 별점평을 보면 생생하고 재미있다고들 평하는데, 정작 평점은 10점 만점에 6점이다. 이야기뿐 아니라 그림에 더 신경 써야겠다고 느꼈다. 앞으론 더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영화를 찍고 싶다. 10점 만점에 15점 받을 수 있는 영화 말이다.

    에디터
    이예지
    일러스트레이터
    Ileechi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