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청탁 안했지만 쓴다. 매일 한편의 수필을 독자들에게 보내는 <일간 이슬아>로 학자금 대출을 갚았고,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8쇄를 찍었다. 매일 달리고 물구나무를 서는 작가 이슬아의 오늘.
글과 독립출판물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일간 이슬아>에 대해 들어봤을 거다. 플랫폼을 거치지 않고 독자와 직거래하는 메일링 서비스를 어떻게 구상했나? 동료 작가 잇선과 고정적인 수입 없음에 대해 상의하던 중 나온 아이디어였다. <한겨레21>, 월간 <페이퍼> 등에서 닥치는 대로 청탁 받았지만, 날 고용하는 사람이 없을 때도 생업을 해야 했다. 막상 시작하니 예상보다 많은 독자가 구독을 신청했다. 이거 큰 일 났다 싶었고, 구독료를 책임지는 마음으로 연재했다. 독자들은 엄격해서, 이번 달 글이 부족하다고 느껴지면 다음 달엔 구독을 안 한다. 그런 긴장감으로 6개월간 연재했다.
연재소설이 아니라 자전적 에세이다. 작가 이슬아가 직접 경험했거나 느낀 것에 대해 매일매일 6개월간 쓴 게 535페이지에 달한다. 양으로 승부한다. 걸작 같은 한 편이 어려우니, 많이 쓰다 보면 좋은 글을 쓸 확률이 높아지지 않을까? 하하. 경험을 가공하고 픽션의 요소를 넣기도 했다. 무엇보다 내가 직접 겪지 않은 시공간에 대해 가족, 친구들에게 열심히 듣는다. 나는 다른 이들보다 훨씬 웃겨하는 사람이다. 후하게 웃고 감탄도 많고 SNS에 ‘좋아요’도 많이 누른다. 그런 게 재료가 되고 밑 작업이 됐다.
실제 이야기에서 오는 생생한 재미가 있다. <일간 이슬아>가 일기는 아니지만, 좋은 일기는 때로 어떤 형태의 글보다 훌륭하지 않나? 그런 글은 작가의 지문 같고, 글을 좋아하는 것과 글쓴이를 좋아하는 것이 같다. 당신의 글은 당신을 좋아하게 만든다. 하지만 작가 이슬아와 화자 이슬아가 구분되지 않는다는 건 양날의 검일 것 같다. 자업자득이다. 등단하지 않은 작가가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창구가 SNS밖에 없기 때문에 SNS로 구독자를 모았고, SNS에 <일간 이슬아>에 등장하는 친구들이 연결돼 있어 많은 게 노출됐다. 독자들이 메일과 DM으로 피드백을 보내는데, 내 이야기라고 생각하니 글에 대한 피드백보다 나에 대한 피드백을 보낸다. 얼굴과 몸을 평가하기도 하고, 술 먹고 하소연하기도 한다. 물론 연재 글보다 아름다운 글이 올 때도 있다. 글을 보고 떠오른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한다든지. 피곤해질 때가 많지만 그런 감동적인 순간도 있다.
작가에게 답메일로 피드백하는 방식 또한 당신이 만든 플랫폼의 일부란 생각이 든다. 항의와 문의에 응대하느라 멀티플레이어가 됐다. 주로 자정쯤 글을 보내는데, 읽고 자는 독자도 있고, 다음 날 출근하면서 보는 독자들도 있다. 읽고 자려던 독자들은 글이 늦게 도착하면 항의하기 때문에 약속을 꼭 지켜야 한다.
수필 연재와 SNS를 통해 꾸준히 자신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 창작자로서 우려도 있어 보인다. <일간 이슬아 수필집> 구절 중 공감 가는 구절이 있었다. “엄살도 자랑도 덜한 사람이 된다면 나를 덜 드러내고도 충만할 수 있을까? (…) 내가 뭘 잘하거나 못하는지 힘주어 말하지 않고도, 탁월해지기 위한 조급함 없이 하루를 잘 마무리할 수 있게 될까?” 창작자로서도 인간으로서도 ‘관종’이란 사실이 걱정된다. 내가 겪은 것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고도 괜찮은 마음이 언제쯤 생길까? 연재로도, SNS로도, 감각이 사방으로 타인과 연결된 느낌이다. 사는 속도보다 연재 속도가 빠르니 지금 겪은 경험이 얼마만큼의 경험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성급하게 쓰는 일도 생긴다. 그래서 가장 소중한 이야기는 핸드폰 일기장에만 쓰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는다. 취약해질 때는 필사적으로 일상 바깥의 일을 쓴다. 내 글이 다른 장르로 성장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신 자신의 이야기도 계속 보고 싶다. 이슬아의 글은 이슬아의 시선으로 본 세계를 더 보고 싶게 한다. 그리고 자기 시선으로 본 세계에 대해 쓰고 싶어지게 한다. 내 글을 보면 자기 이야기가 쓰고 싶어진다는 피드백을 많이 받는다. 나는 내 마음이 내게만 머물지 않았으면 한다. 아이들을 상대로 글쓰기 강사를 할 때, 글쓰기의 첫걸음은 자기 이야기를 쓰는 것이라 가르쳤다. 내 얘기 정도는 술술 쓸 정도가 되어야 다른 사람의 이야기도 할 수 있다. 내가 나로 태어나 나로밖에 살지 못하니 나로서만 삶을 체험하는데, 글쓰기를 통해 그나마 남이 되어보는 거다. <나를 뺀 세상의 전부>라는 김소연 시인의 산문집이 나왔는데, 그 제목이 내가 잘 써야 될 것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나 아닌 누군가에 대해 최대한 정확하게 쓰기 위해, 많이 묻고 듣는다. 아무래도 아주 게으르게는 못 살 거다.
그만큼 주변에 관심이 깊고, 곁에 있는 이들에 대한 곡진한 애정이 느껴진다. 주변인을 관찰해 캐릭터로 포착하는 능력이 뛰어나다. <일간 이슬아>는 복희와 웅이, 도봉산 다람쥐, 할머니, 찬이, 류와 울 등 실존하는 인물들이 등장하는 일일 연속극 같다. 징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특별함을 혼자 알기 아까웠다. 대가족 안에서 살아가는 건 복잡한 이해관계를 잘 알아채고, 누군가가 불편해하는 것도 잘 눈치채야 하는 일이다. 한 집을 배경으로 여러 다른 캐릭터가 공존하고 충돌하는 것에 익숙해서 그런가 보다.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이 개성 있지만, 복희가 특히 매력적이다. 누드모델이 되겠다는 딸에게 가장 비싼 코트를 가져와 “알몸이 되기 전에 네가 걸치고 있는 옷이 최대한 고급스러웠으면 해”라고 말하는 복희는 특별한 엄마다. 그를 엄마가 아니라 복희라고 부르는 이유가 있나? 가장 사랑하는 남이다. 오랫동안 그의 딸로 자랐기 때문에 거리를 두지 않는 실수를 종종 한다. 그런 실수 없이 고요한 제삼자로서 쓰고 싶었다. 우리가 또래였다면 어땠을까. 내가 복희보다 훨씬 더 깍쟁이이기 때문에, 그 눈부신 성정을 살짝 질투하면서도 많이 좋아했을 것 같다.
이슬아의 글이 좋은 이유 중 하나는 마음과 몸의 살림살이를 야무지게 매만지고 차려낸 생활감 때문이다. 일찌감치 독립해 글쓰기 강사, 누드모델, 잡지사 기자, 연재 노동자까지 섭렵해온 생활의 결이 글에 묻어 있다. 일찍 독립한 건 연애하고 싶어서 그랬지. 하하. 어쨌든 반가운 말이다. 욕심이 많아서 부지런했다. 말보다 몸이 앞서는 타입이다. 시간이 아까워서 시급이 센 누드모델을 했고, 전국의 화실을 다니며 옷을 벗었고, 타이머로 시간을 재며 시간 약속을 지켰다. 글 쓰는 건 부지런하지 않으면 방도가 없다. 꼼수 없이 절대적으로 시간이 필요한 일인 데다, 프리랜서가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고 흐트러지면 일을 지속할 수 없으니까. 글은 기본적으로 몸으로 하는 일이다. 등 근육을 튼튼히 유지하는 게 중요하다. 그래서 매일 달리고 물구나무를 선다.
당신의 글이 좋은 이유가 또 하나 생각났다. 지나친 비관과 염세, 자기 연민이 없다. 노력했는데 그렇게 읽히다니 좋다. 스스로 엄살을 피울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염치를 가지려 노력한다. 자기만 불쌍하면 오로지 자기 신체가 한계인 글쓰기에 머물게 되니까.
이슬아가 생각하는 강함이란 어떤 건가? 잘 회복하는 것. 왜 <엑스맨>에서 주인공인 울버린에게 자가 치유 능력을 줬겠나? 어릴 때 나는 되게 자주, 많이 우는 애였다. 울음을 참으려고 하면, 어머니는 꼭 내게 “참지 말고 울어, 울어”라고 했다. 그렇게 시원하게 울고 나면 괜찮아졌다. 그리고 또 하나, 가장 힘든 순간에도 재미있는 사람이 강한 사람이다. ‘농담력’이 도움이 된다.
당신이 글을 쓰게 하는 힘은 뭔가?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은 마음. 내가 재미있게 듣거나 느낀 걸 전하고, 같이 웃고 싶은 마음이다. 나는 존 버거, 토니 모리슨, 제임스 설터, 정세랑, 김금희 등 많은 작가의 책을 좋아하고, 그들로 인해 많이 행복했다. 왜 글을 쓰고 싶은지 생각할 때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의 글을 떠올린다. 그 사람들이 그런 멋진 걸 했잖아.
어떤 책을 좋아하나? 지난해 읽은 책 중엔 최진영 작가의 <해가 지는 곳으로>라는 소설이 제일 좋았다. 지옥 같은 상황에서도 고결한 사람들은 품위를 잃지 않는다. 모두가 밥을 빼앗길까 허겁지겁하는데도 밥을 꼭꼭 씹어 먹는 아이가 등장한다. 밥을 밥답게 먹는 그 아이의 튼튼함이 좋았다. 결국 나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는 책을 좋아하는 것 같다.
두 권의 책을 냈다. 직접 그린 웹툰과 글을 엮은 <나는 울 때마다 엄마 얼굴이 된다>는 문학동네에서 펴냈고, <일간 이슬아 수필집>은 출판사를 차려 펴냈다. 작가가 대표이자 디자이너이자 발행인이다. 온라인 메일링 연재로 시작해 실물 책 출판까지, 궁극의 DIY인 셈이다. 전자는 대형 출판사에서 출판하면서 훌륭한 편집자의 손에 만져지는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후자는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원하는 대로 편집하고 싶었다. 분량도 줄이지 않고, 제목도 바꾸지 않고, 이왕 다 만들어놓은 거 좋은 편집자 훈련도 해보고 싶어서 출판사를 차렸다. 나중엔 헤엄출판사에서 다른 작가의 글도 단행본으로 기획하고 싶다. 물류센터장이 복희고 유통센터장이 웅인데, 물류센터는 우리 집 서재고 유통센터는 아빠 트럭이다. 하하. 8쇄까지 9천 부 정도 찍었는데 포장하고 배송하는 게 여간 일이 아니다.
이슬아는 앞으로 또 어떤 시도들을 할까? <일간 이슬아 2>는 3월 말쯤 재개할 거다. 같은 방식으로 그냥저냥 하면 독자들이 계속 봐주지 않을 거다. 다른 장르도 시도해볼 생각이고, 단편 소설을 쓰려고 하는데 어떤 이야기인지는 비밀이다.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들려줘야지, 하는 마음으로 쓰는 거라 미리 말해버리면 안 써진다. 그리고 음악을 하는 동생, 이찬희와 함께 곡을 만들고 공연을 다닐 계획이다. 역시 게을러지긴 틀린 것 같다.
- 에디터
- 이예지
- 포토그래퍼
- 이강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