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가을에 어울리는 타이포그래피

2019.09.21GQ

패션과 음악처럼 서체에도 유행이 있다. 물론 고유한 개성도 있다. 각자의 또렷한 특질을 지닌 4인의 타입 디자이너에게 가을을 주제로 타이포그래피를 받았다.

Ohno Blazeface Italic by James Edmonson, Ohno Blazeface Italic Hangeul by Ham Minjoo, Illustration by Mark Frömberg.

함민주
한국에서 타입디자이너로 근무한 후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예술학교에서 타입미디어 석사 과정을 이수했다. 현재 독일 베를린에서 독립 타입디자이너로 활동하며 해외 폰트 회사들과 다국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8년에는 개인 프로젝트로 작업한 둥켈산스(Dunkel Sans)를 출시했다.

서체를 만들 때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나? 서체 이름은 ‘오노 블레이즈페이스 이탤릭(Oh no Blazeface Italic)’. 미국의 타입 디자이너 제임스 에드몬슨이 디자인한 라틴 서체다. 굵고 가는 획에서 나오는 부피감의 변주가 매력적이어서 첫눈에 반했다. 그에게 한글 스케치를 보냈더니, 한글 버전 제작을 승낙했다.

‘가을’이라는 주제로 작업하기 위해 이 서체를 택한 이유는? 탱글탱글하게 익은 가을의 열매가 떠오르는 서체다. 배경은 독일
타입 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 마크 프롬베르크가 작업했다.

요즘 서체의 유행은 무엇인가? 제목용 서체로는 독립 디자이너들의 과감하고 신선한 서체가 주목받는 듯하다. 하지만 본문용 글꼴은 아직 보수적이다. 선택의 폭이 다양하지도 않다. 모두 같은 폰트만 쓰고 동일한 디자인만 만들어낸다면, 팔레트에서 한두 가지 색의 물감만 사용하는 것과 같다.

최근 몇 년간 버버리, 생 로랑 등 많은 브랜드가 미니멀한 산세리프체 로고로 리브랜딩했다. 폰트 마켓 전체가 이와 비슷하게 흐르고 있다. 미니멀한 산세리프 스타일의 폰트들이 베스트 셀러 리스트를 점령했다. 역사 깊은 브랜드들마저 유행에 휩쓸려 개성을 잃는 것 같아 조금 아쉽다. 하지만 유행은 돌고 돈다. 하이엔드 브랜드들의 다음 단계가 기대된다.

디자인해보고 싶은 브랜드 로고와 그 이유는? 네이버의 로고. ‘A’와 ‘V’ 사이 커닝값(글자 사이 공간을 조절하는 수치)이 너무 심해서 볼 때마다 답답하고 불편하다.

좋은 타이포그래피를 결정하는 세 가지는? 텍스트의 정확한 의미 전달, 콘텐츠의 명확한 우선순위, 콘셉트에 알맞은 폰트.

한글은 타이포그래피를 디자인하기에 좋은 문자인가? 외국인 타입 디자이너들의 반응은 그렇다. 글자가 기하학적이라고 한다. 의미를 파악할 수 없어서 눈에 보이는 형태 그대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한글이 긴 본문 타이포그래피에서는 유리하다고 할 수 없다. 페이지에 나열할 글자의 결을 고려해야 하는데, 한글은 글자마다 밀도 차가 커서 그 질감을 맞추기가 어렵다.

요즘 타이포그래피 신의 화두는? 외국의 경우 폰트 제작 소프트웨어가 날로 발달하고 있다. 젊은 디자이너들이 흥미로운 아이디어로 발표하는 서체가 많다. 또 이런 서체를 활용해 다시 창작 활동을 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보면 정말 눈이 즐겁다.

서체가 소프트웨어로 제작되며 발생하는 맹점이 있다면? 손으로 스케치를 하고 벡터로 옮긴 후, 그대로 컴퓨터로만 다듬는 경우가 많다. 이 과정에서 ‘손맛’을 놓치는 경우가 꽤 있다. 컴퓨터에 너무 의존하면 형태가 단순화되고 건조해진다. 개인적으로는 벡터로 옮긴 후 프린트해서 다시 그 위에 덧칠하는 두 번째 스케치 과정을 거친다.

윤민구
바른글꼴, 윤슬체, 윤슬바탕체, 블랑, 유니어 등의 서체를 디자인했다. 스위스 로잔 예술 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글과 라틴 알파벳을 포함하는 바이 스크립트 타입 디자인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 연구소에서 디자이너 및 연구원으로 일했고, 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한글꼴 디자인을 가르쳤다.

‘가을’이라는 주제로 작업하기 위해 이 서체를 택한 이유는? 윤슬바탕체는 수필이나 시집에 많이 쓰인다. 단정한 세리프 형태를 가졌고, 날렵하게 사선으로 뻗는 획이 많아 평범한 명조체보다 손 글씨의 개성이 느껴지는 까닭이다. 가을과 손 글씨는 어울리니까.

서체의 이름 뜻은? 우리말로 햇빛이나 달빛이 반사돼 반짝이는 잔물결이라는 의미다.

글자에는 의미가 담긴다. 그렇다면 글자의 모양인 글씨, 서체는 그 의미에 얼마큼 관여할 수 있을까? 한국인 디자이너로서 한글을 디자인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한국인은 한글을 읽기 때문에 의미가 형태보다 먼저 인식되니까. 이것은 서체를 읽고 보는 독자에게 달린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타이포그래피는 유행과 어떻게 조응하며, 혹은 반발하며 나아가고 있나? 일부러 유행하는 서체들을 찾아보지는 않는다. 하나의 서체가 유행을 타면 그 시기 웬만한 편집물, 광고 등에 모두 그 서체가 쓰인다. 그렇게 폭발적으로 소비되고 나면 사라진다. 나는 그저 내가 만들고 싶은, 누군가는 필요로 할 서체를 계속 만들고 싶다.

최근 몇 년간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가 미니멀한 산세리프체 로고로 리브랜딩했다. 많은 브랜드가 산세리프 스타일로 로고를 리뉴얼한 후, 많은 이야기가 있었다. 하지만 단순히 세리프는 전통, 산세리프는 모던이라는 식의 이분법적인 구분은 이제 의미 없는 일이다. 어차피 지금 시대에는 새로운 서체가 넘쳐나고, 단지 그게 그 브랜드의 전략과 맞았을 뿐이다.

요즘 타이포그래피 신의 화두는 뭔가? 기성 문화에 대한 반발. 한국에서 한글 서체 디자인은 매우 보수적인 영역이었다. 하는 사람이 많아 몇 안 되는 디자이너가 이미 만들어놓은 길을 도제식으로 따라가야만 하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요즘은 모든 영역에서 기성세대가 만든 판에 대한 반발이 있다. 더 넓은 나라에서 다양한 경험을 접하고, 젊은 자신감을 기반으로 좋은 작업을 하는 디자이너가 많아졌다.

좋아하는 브랜드 로고가 있나? DANSE LENTE, TAMBURINS. 내가 작업했으니까. 요즘 취향으로 LOEWE, BOTTEGA VENETA.

다양한 브랜드, 아티스트와 협업했다. 그들의 특질을 어떤 식으로 포착해 글자체로 시각화하나? 대화를 많이 나눈다. 지향하는 목적을 파악하는 건 당연하고, 취향을 공유하며 신뢰를 쌓는 것도 중요하다. 지향점을 알면 서체를 시각화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서체를 보면 필자의 인품이 보인다고 한다. 글씨에 담긴 당신의 스타일은? 예전 인터뷰에서 작업이 건조하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나는 디자이너의 개성이 가능한 한 드러나지 않는 것이 좋은 서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것이 보여야 한다면 그냥 ‘건조함’이었으면 좋겠다. 건조하지만 잘 만든 서체면 충분하다.

노은유
네덜란드 헤이그 왕립미술학교에서 라틴 글꼴 디자인을 공부했으며 한글과 로마자를 위한 글꼴 디자인 옵티크를 만들었다. 안그라픽스 타이포그라피연구소에서 일했고, 아모레퍼시픽 아리따체, 대한불교조계종의 석보체 프로젝트 매니저를 역임했다.

작업한 것은 어떤 서체인가? 옵티크라는 글꼴로, 한글과 로마자가 조화롭게 짝을 이루는 데 중점을 뒀다. 옵티크는 한글은 붓으로, 로마자는 브로드 닙이라는 넓은 펜으로 쓰기 연습을 반복해 만들어낸 서체다.

각자 고유의 쓰기 도구를 사용해 글꼴을 디자인한 까닭은? 활자는 오랜 시간 동안 고유의 쓰기 도구의 영향을 받았다. 이젠 일상적으로 붓을 사용하지 않지만, 명조체와 바탕체에 그 흔적이 남아 있고 사람들은 그 형태를 편안하게 느낀다. 알파벳을 붓으로 쓰면 어색하다. 한글 또한 그렇다. 각자의 도구는 유지한 채로 그 질감만 바꾸고 싶었다.

가을이라는 주제와 ‘옵티크’는 어떤 점에서 어울리나? 글자는 언어를 담는 그릇이기에 어떤 단어 또는 문장을 담아내느냐에 따라서 표정이 바뀌는 점이 재미있다. 이번 작업을 통해 가을에 대한 글을 담아보니, 옵티크 획의 질감이 바삭거리는 낙엽과 닮은 것 같다.

글자의 모양인 서체는 글자의 의미에 어떻게 관여할 수 있을까? 서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책이라는 매체 속에서 ‘목소리’를 담당한다. 고딕체로 ‘사랑합니다’라고 썼을 때와 명조체 또는 궁서체로 썼을 때 독자가 받는 인상은 달라진다. 가독성이 좋지 않은 서체로 디자인된 책을 읽는 것은 마치 발음이 좋지 않은 아나운서가 책을 읽어주는 것과 같다.

당신의 타이포그래피는 그 유행과 어떻게 조응하며, 혹은 반발하며 나아가고 있나? 명조체를 디자인한 최정호처럼, 1백 년이 지나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글꼴을 만들고 싶다. 꿈은 크게 가지는 거니까. 서체 한 벌을 만들려면 한글만 최소 2천7백 자, 많게는 11만 자 이상을 만들어야 한다. 나는 손이 느려서 유행을 따르면 내 서체를 완성할 때 즈음에는 분명 유행이 지나갔을 것이다.

최근 몇 년간 하이엔드 패션 브랜드가 미니멀한 산세리프체 로고로 리브랜딩했다. 로고 타입만 놓고 본다면 개성을 잃어버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로고 타입은 전체적인 브랜딩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므로, 콘셉트가 미니멀하게 바뀌었다면 로고 타입도 바뀔 수 있겠지. 혹은 유행이 빠르게 바뀌니까 어떤 콘셉트도 소화할 수 있는 단순한 로고를 선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 타이포그래피 신의 화두는? 다국어 타이포그래피. 요즘은 한 국가의 언어 디자인이 그 나라 안에서만 소비되지 않고, 여러 문자와 함께 쓰인다. 10월에 열릴 국제 타이포그래피 비엔날레 ‘타이포잔치’에서 큐레이터를 맡아 한글과 함께 시릴릭, 아라빅, 타이 등 여러 나라 서체 디자인도 소개할 예정이다.

좋아하는 브랜드 로고가 있나? 생 로랑의 예전 로고인 YSL. 내 눈에 클래식이 여전히 아름다운 건 어쩔 수 없다. 또 하나는 WeWork. 요즘 수많은 산세리프 로고 사이에서 세리프로 디자인한 점이 오히려 눈에 띈다.

현승재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3년간 그래픽디자이너로 재직 한 후 ‘ZESSTYPE’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한다. 마포구청에서 서체디자이너 양성 프로젝트의 디렉터를 맡고 있고, 한글타이포그라피학교에서 한글 글자 조형에 대한 강의를 한다. 주로 로고 타입과 타이틀을 디자인하며, 전용 서체를 개발한다.

이 서체의 이름은 무엇이고 어디에서 영감을 받았나? ‘흑운체’라고 붙였다. 우연히 서예가의 글씨를 집자해 만든 책을 봤다. 글줄이 고르지 않았지만, 필체의 힘과 강약의 대비가 강렬했다. 그 흐름을 균일하게 엮은 글자를 만들고 싶었다.

‘가을’이라는 주제로 작업하기 위해 이 서체를 택한 이유는? 글자는 인상으로 주제를 담는다. 여름이 강렬하고, 겨울은 앙상하다면, 가을은 선선하고 풍요롭다. 획이 굵어 글자의 속 공간은 좁지만, 행간과 전체 공간을 비워 시원하면서도 여유로운 인상을 담았다.

한글은 타이포그래피를 디자인하기에 좋은 문자인가? 라틴 문자와 비교하면 디자인하기 더 어렵다. 조형과 구조, 글자 수를 고려하면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또한 한글은 세로 쓰기에 어울리도록 만들어지고 발전한 전각 문자다. 근대에 들어 가로쓰기로 바뀌면서 본래의 미감을 많이 잃었다. 디자인에서 활용할 수 있는 미각적 요소가 다량 사라진 셈이다.

요즘 서체의 유행은 무엇인가? 한글 서체의 경우 유행이 느껴질 만한 큰 흐름이 없다고 생각한다. 개발사와 스튜디오, 독립 디자이너 모두 개별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다양성이 흐름일지도 모르겠다.

서예와 캘리그래피, 그라피티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떻게 도움이 됐나? 서예를 통해서 필법을 배웠고, 그라피티로는 자유롭게 조형하고 표현하는 방법을 학습했다. 그라피티에서의 과도한 표현은 캘리그래피로 넘어가면서 글자로 다듬어졌다.

타이포그래피를 독학하면서 가장 필요했던 것은 무엇이었나? 타인의 평가가 가장 절실했다. 기준점으로 삼을 만한 게 없었다. 막연한 자기만족에서 벗어나기 위해 포트폴리오 플랫폼, SNS 등 다양한 채널로 작업물을 열심히 노출했다. 댓글이나 ‘좋아요’가 없어도 노출과 방문자 수를 비교했다. 어떤 방향을 선택해야 할지 가늠할 수 있었다.

요즘 타이포그래피 신의 화두는? 저작권은 인색 변화로 사용자와 디자이너 모두 인지하고 있다. 이제 유사성이 문제다. 잘 팔리는 서체를 비슷하게 만들어 판매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좋아하는 브랜드 로고가 있나? 단순하고 경쾌하면서도 굵은 로고를 좋아한다. NIKE는 가벼우면서도 인상이 강하다. IKEA는 넓은 자간과 컬러의 조합이 매력적이다.

디자인해보고 싶은 브랜드 로고와 그 이유는? 특정 브랜드보단 게임 타이틀.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표현할 여지가 많다.

좋은 타이포그래피를 결정하는 세 가지는? 일관적이고 균일한 조형감, 안정적이고 단단한 구조, 목적에 부합하는 사용성.

서체를 보면 필자의 인품이 보인다고 한다. 글씨에 담긴 당신의 스타일은 뭔가? ‘블랙’. 짙은 글자를 주로 그린다. 판독성보다는 주목성과 조형성을 우선시한다. 위 서체의 이름 ‘흑운’도 블랙에서 연유했다.

    에디터
    이예지, 이재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