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노키즈존이라는 함정

2019.12.04GQ

성인에게는 방해받지 않고 조용히 식사를 즐길 권리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이 권리 이전에 배제는 아닐까? 나의 권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다시 생각한다. 어른들에게 어린 시민의 존재를 금지할 권리가 있는 걸까?

이 글은 한때 노키즈존이었던 카페에서 쓰고 있다. 한때인 이유는 지금은 아니기 때문이다. 망원동에서 좋은 원두로 꽤 유명한 이 카페가 노키즈존이었던 때, 나는 카페의 유리문에 예쁘게도 적힌 ‘No Kids’라는 단어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활짝 문을 열고 들어가 커피를 마시곤 했다. 반려동물은 대환영인 이 카페가 아이들은 출입금지인 것이 이상한 일인 줄도 몰랐다. 노키즈존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가 있기 전 대다수의 사람 또한 그랬을 것으로 생각한다. ‘아이가 없으면? 조용하겠지. 유모차 때문에 동선이 방해받을 일도 없고, 쾌적하겠지.’ 실제로 그런지 아닌지 알지도 못하고 경험한 일도 별로 없지만, 생각보다는 느낌 같은 것으로 노키즈존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나 역시 그랬다. 시야에만 들어오지 않으면 아이들은 없는 존재가 되고, 떠올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날, 세 살 딸을 키우는 친구가 제주로 가족 여행을 갔다. 몇 주 전 제주에서 휴가를 보냈던 나는 좋았던 카페며 식당을 추려 그에게 보내주었다. 검색해본 친구가 말했다. “네가 보낸 가게들 다 노키즈존이야. 갈 수 있는 데가 없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 있는 데가 없다니? 그럼 아이와 함께 있는 사람들은 리조트나 호텔에만 머물러야 한다는 말인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얼마 뒤 돌이 갓 지난 아이를 데리고 나온 동료와 식사를 했다. 음식점이 몇십 개는 되는 쇼핑몰에서 만나기로 했다. 기저귀도 갈기 위해선 백화점이나 쇼핑몰이 편하다는 것은 나 또한 알고 있었다. 몰랐던 건 아기 의자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아기를 안고 어르며 식사를 하지 않는 한, 아기에게는 당연히 아기의 몸에 맞는 의자가 필요하다. 아기 의자를 준비해놓은 곳은 그 큰 쇼핑몰에 입점된 식당 중 두세 군데에 불과했다. 다시 한번,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거의 모든 식당이나 카페가 노키즈존이거나 노키즈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라니, 저출산 대책 마련이 전 세계에서 가장 시급한 나라에서 벌어지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닌가.

내가 이상함을 느낀 그 시기는 제주로 시작해 서울까지, 노키즈존인 카페나 레스토랑을 공유해 아이와 함께인 사람들이 헛걸음하지 않도록 하자는 온라인상의 논의가 시작되던 즈음이기도 했다. 그제야 나는 노키즈존에 대해서, 아이가 없어야 하는 공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다. 사람들은 어떤 이유로 아이들을 거절하고, 심지어는 그들이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을 반대하기까지 하는가. 가장 간단한 논리는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아이들이 업장에 금전적 피해를 준다는 것이다. 그들이 내는 소음이 공간의 분위기를 해칠 수 있을뿐더러, 제 몫의 돈을 지불한 만큼 마땅히 쾌적함을 누려야 하는 성인 손님의 권리를 침해하기 때문에 아이들의 입장을 막아도 된다는 논리다. 일단 모든 아이를 잠재적 소음유발자이자 손해를 끼칠 가능성이 농후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문제는 차치하고, 이 논리 안에서 정말로 배제되고 혐오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살필 필요가 있다. 노키즈존에서 1순위로 배제되는 영유아의 경우, 홀로 이동할 수 없다는 특징이 있다. 이들에게는 보호자가 있고, 있어야만 한다. 그러니까 이 배제는 아이들만이 아닌 보호자, 대부분의 경우 아이의 양육자를 대상으로 한 것이다. 물론 아주 높은 확률로 이 양육자는 여성, 그중에서도 젊은 여성이다. 어떤 업소가 노키즈존을 선택한 이유라며 웹상에서 돌고 있는 글의 대부분은 ‘맘충’으로 불리는 여성 양육자를 공격한다. 과장되었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 있었을 법한 사건의 면면을 보면, 업주들이 피해를 보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과연 이러한 피해를 주는 것이 정말로 엄마와 아이뿐인가? 식당과 카페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절대적 수를 보았을 때도, 실제로 벌어지는 크고 작은 분쟁이나 소위 ‘진상 고객’의 면면을 보았을 때도, 아이와 엄마가 과연 여기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가? 하지만 배제는 오직 이들에게만 선택적으로 빠르게 벌어진다. 이 선택적 배제를 이야기하지 않고 노키즈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노키즈존은 이 사회가 ‘강약약강’을 내재화하고 있다는 증거이자, 일상적으로 드러나는 약자를 향한 혐오의 방증이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에서 김지영(정유미)이 카페에서 ‘맘충’이라는 수군거림을 받는 장면은 이 혐오를 분명히 보여준다. 사람들은 아이가 약자이기 때문에 배려할 생각이 없고, 맘충이라는 자극적인 단어 아래 개별적이고 고유한 개인은 사라진다. 자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개인의 작은 손해를 끔찍한 고통으로 여겨온 한국 사회는, 시민 개인이 마땅히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또 다른 구성원을, 그중에서도 약자를 배려하고 함께 살아가려는 태도를 갖게 만드는 데 실패했다. ‘맘충’과 ‘틀딱’(노인을 비하하는 신조어)이 약자를 언어로 특정해 분리하고 있다면, 노키즈존은 기어코 물리적으로 약자를 배제한다.

나 역시 조카들을 데리고 있다가 실제로 맘충이라는 말을 들었던 경험을 하지 않았더라면, 지인들이 겪는 크고 작은 일들을 나누지 않았더라면, 별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업주가 받는 피해에 대한 논리와 성인의 권리라는 말은 애초에 생각과 고민의 여지를 차단한다. 노키즈존이 찬성과 반대의 문제로 논의해서는 안 되는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이 이야기를 소리 내서 해야 하는 이유이며,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이유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여전히,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은 채로 노키즈존이 선택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노키즈존은 찬성과 반대나 논란의 범주에 놓아야 할 사안이 아님을 알게 된다. 노키즈존은 한 사회의 시민이 나이나 성별, 인종 등과 상관없이 차별받지 않아야 하고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는 아주 기본적인 인권과 관련된 문제다. 무엇보다 개인이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시민으로서, 무엇보다 어른으로서 가져야만 하는 책임의 문제다. 아이가 이 사회에서 살면서 특정 장소에 갈 수 없다면, 이유는 단 하나, 아이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작고 약하고, 주의력과 조심성이 성인보다 떨어지는 아이가 위험해질 수 있는 곳에 이들의 출입을 막는 것이 어른의 책임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보호가 아니라 거절이며, 배제다. 현재의 노키즈존은 명백하게 후자다.

지금 내가 커피를 마시는 이 카페는 더는 노키즈존이 아니다. 공간이 널찍하지는 않지만 유모차도 들어올 수 있다. 노키즈존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부터 방문하지 않다가, 노키즈존을 해제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찾기 시작했다. 문에 붙어 있던 노키즈존 문구를 언제, 왜 떼었는지는 묻지 않았지만 아마도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나는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고민했으면 좋겠다. 시작은 거기서부터다. 모두가 시민이 되는 길도,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생각하고 고민하는 데서 출발한다.

최근 친구와 여행을 갔다가 겨우 물어물어 찾아간 카페가 노키즈존이었던 적이 있다. 함께 간 친구에게 나는 노키즈존에는 가지 않는다고, 여기가 노키즈존인 줄 알았더라면 다른 카페를 찾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친구에겐 여행에 데리고 오지 않은 일곱 살 딸이 있다. 친구는 그런 말을 내게서 처음 들어봤다고 했다. 딸과 함께 있을 때 들른 곳이 노키즈존이면 사람들이 불편해할까 봐 더 서둘러 나온다고 했다. 친구는 노키즈존을 만든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라고, 아이들이 폐를 끼치면 주인 입장에서는 싫을 수 있지 않겠냐고, 이해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그럼 아이에게는 뭐라고 설명해주는지를 물었다. 친구는 대답을 피했다. 도대체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가게의 주인은 너와 같은 아이들이 들어올 수 없는 공간을 만들었고, 넌 그 어떤 잘못도 없지만 어쩌면 나중에 잘못을 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에, 혹시라도 누군가에게 피해를 줄 수도 있기 때문에 이 가게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누구도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른에게는 그들의 존재를 금지할 권리가 없다. 그리고 어린 시민으로 이 사회를 살아가는 아이들에게는 출입할 권리가 있다. 우리 사회는 인권에 대해서 다시 이야기해야만 한다. 어쩌면 여기, 노키즈존이었지만 이제는 아닌 바로 이곳, 개인이 깊이 고민해서 시민으로서 옳은 결정을 내린 이 자리에서부터. 글 / 윤이나(작가)

    에디터
    이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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