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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 문학의 새로운 장

2020.02.06GQ

장류진, 정세랑, 김초엽의 소설을 읽으면서 여기, 그리고 누군가를 떠올린다. 이 소설들에는 지금의 호흡이 있고, 한국 현대 문학이라는 장 자체를 새로이 구성해가는 힘이 있다.

말도 안 돼. 월급을 포인트로 줬다고? 화재의 소설 <일의 기쁨과 슬픔>(창비, 장류진)을 읽기 전, 대강의 줄거리를 듣자마자 든 생각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도 안 돼”는 그 소설에 대한 반응은 아니었다. 그런 회사의 생리를 믿고 싶지 않았던 내 소망이 만들어낸 분통 같은 거였다. 동시에 오만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기만’이라든지, ‘도리’라든지, ‘합리’라든지, ‘신뢰’, ‘공정’ 같은 많은 단어. 그리고 그 단어들 무더기 위로 누군가, 말 그대로 ‘누군가’가 떠올랐다. 아마도 이 누군가는, 그런 회사라도 다닐 수 있다면(정규직이라면), 심지어 월급이 밀리거나 회사에서 잘리는 것보다는 그나마 나은 상황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지도 모를 거였다. 누군가는 내가 될 수도, 내 친구나 사촌이 될 수도 있었다. 두 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이가 되는 이 좁은 세상과 소설의 무대인 판교가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대표의 치사한 보복 같은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월급 지급 형태를 나름으로 이용해 삶을 꾸려가는 사람이, 이상한 톱니들이 맞물리듯 내 삶에 미묘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아니 실은 매우 말이 되며, 말이 너무 되어서 이 소설집을 놓칠 수 없었다. 이 외에도 청첩장을 주고 받으며 벌어지는 숨막히는 심리전 속의, 나를 미치게 하지만 미워하긴 미묘한 ‘빛나 언니’라든가(‘잘 살겠습니다’), 아주 같잖게 여자를 품평하고 대하는 저를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드러내는, 누가 봐도 꽤 괜찮은 남자라고 자부하는 졸렬하기 짝이 없는 나(‘나의 후쿠오카 가이드’)는 또 어떤지.

이런 소설은 또 어떤가. 들어는 봤나, 읽어는 봤나. <규중조선비서>라는 고서가 있다. 주인공의 힘겨운 직장 생활을 버티게 해주었던 직장 동료 언니들이 갑자기 남편들을 데려오더니 결혼을 해버리고 퇴직으로 회사를 떠난다. 나는 혼자 남아 진이 빠지고 자신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 또렷하게 인지하지도 못할 지경으로 지치고 만다. 그리고 결국, 그 퇴사한 언니들에게 조언을 구한다. 언니들은 저 비밀의 책을 빌려주며 남편을 불러낼 수 있다고 말한다. 나는 속는 셈 치고, 다른 곳도 아닌 회사 옥상에서! 남편을! 멸망인지 절망인지 희망인지 하는 ‘망’을 중얼거리는 뭔가를 ‘소환’한다. 말도 안 돼, 옥상에서 뛰어내리기 직전의 어떤 도망의 끝에 맞닥뜨린 그것이 남편이란다. 그리고 그는 나의 생활을 어찌어찌 꾸려가게 해주는 중요한 인테리어 소품 같은 것이 되어준다.(<옥상에서 만나요>, (창비)) 정세랑의 이야기들은 장류진의 그것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말이 매우 되었으며, 구석구석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저 이야기를 예로 들어 말하자면, 대저 남편이란, 이도 저도 안 될 무렵에야 무릇 소환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말이 된다. 말이 너무너무 돼. 인간이면 고맙고 아님 어쩔 수 없지만, 소환해버렸으니 같이 살긴 살아야 했던 조선시대의 수많은 여자들이 짐작되었다. 생각하면 욱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이 있으나, 소설을 읽으며 낄낄거렸던 게 도대체 언제였던가 싶을 정도로 대소했다. 어쩌다 ‘그것’에게 물려 영원히 77사이즈로 살아갈 뱀파이어 여자(‘영원히 77 사이즈’)도, 그 여자의 이런저런 궁리와 최초의 살인 장면은 웃지 않고는 읽을 수가 없었다. 심각한데, 분명 심각한 문제들에 여자가 직면한 게 맞는데, 어쨌든 뱀파이어니까, 적어도 이미 죽은 이상, 그 여자가 누군가에게 위협당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안심해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또 김초엽이 있다. 그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허블)의 과학자 안나는 공간 차원의 이동이 결국 시간 차원의 이동이 될 때의 미래를 배경으로 한다. 최첨단 기술이 발달한 미래에도, 능률과 효율에 대한 비용 계산은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서로 만날 수 없게 한다. 48세에 여성이자 비혼모였지만, 우주비행사로 선발된 최재경(‘나의 우주 영웅에 대하여’)은 앞서가는 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의 삶에 어떤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 선명하고 아름답게 보여준 소설이었다. 누군가의 삶에 누군가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볼 기회를 얻었다. 보통 영향이라고 하면 부정적 영향에 쉽게 휩쓸리기 마련이지만, 그런 휩쓸림 속에서 하나의 지푸라기가 되어주는 것의 아름다움에 대해, 김초엽을 읽으며 다시 생각했다. 사회적으로 완전히 이해받는 삶을 사는 사람이거나, 누구에게나 선한 사람만이 아름다운 영향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복수도 나의 힘이고, 증오도 나의 힘이었겠지만, 그것만이 나를 키우는 팔 할의 전부는 아니었다. 사회적으로는 용인 받기 어려운 상태의 불완전한 사람들의 불완전한 사랑과 격려도 누군가에게는 중요한 경험이 된다. 나를 지금의 모습으로 다져 올린 것은 사랑의 경험이자 사랑받았던 경험들, 누군가를 동경하고 존중했던 감정들이기도 했던 것이다.

한국 소설 하면 김승옥이 떠올랐던 때도 있었다. 2020년에 와서 언제 적 김승옥이냐 할지도 모르겠지만, 평론가 김현이 “감수성의 혁명”이라고 표현한, 그가 만들어낸 내면의 풍경을 열심히 읽었던 이가 많을 것이다. 나도 그중의 하나였다. 일별하자면, 식민지 시기를 거치며 태동한 근대 소설은 해방기, 한국 전쟁, 남북 분단, 독재 정권 시절 – 민주화 투쟁 등 한두 줄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역사적 격랑 속에서 여기까지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성을 무시하고 소설을 읽어냈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소설의 내용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소설을 창작하고, 소설을 향유하는 작가나 독자 역시 시대를 휩쓸었던 감각과 질서에 순응하거나 배반하는 방식으로, 언제나 연관되는 방식으로 존재해왔다. 그리고 시대에 억눌려 있던 개인의 내면을 발견하고, 동시에 시대 감각을 벼려냈다고 여겨지던 최인훈, 이청준, 김승옥, 서정인 등이 한국 문학사를 구성해 오던 때가 있었다. 이들은 한국 현대사의 상처를 직시하고, 그 상처를 보여주던 사람들로서 열심히 작품 활동을 했고 그 할 몫을 다 했다.

앞서 언급한 장류진, 정세랑, 김초엽의 작품들을 보면, 저 한국 현대사의 상처와 아주 멀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사소해 보이고, 가벼워 보일지도 모른다. 일하고 사랑하고 전전긍긍하는 젊은 애들 이야기라고 쉽게 정리하고 넘어가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모를 마음이 드는 것은, 순전히 저 소설들을 직접 읽으면서 누릴 즐거움을 위해 아주 짧게 정리하다 보니 벌어진 내 잘못이다. 한국 현대사이자 민족 수난사인 저 사건들은 여전히 큰 상처로 벌어져 있는 상태다. 돌이킬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상처 위에서 어떻게든 온전히 살아가려다 보니, 치사하고 졸렬한 법칙들이 우리를 구성하는 피와 살이 되었을 것이다. 구태여 내가 말하지 않아도, 사실 그 누구라도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긴 시간 축적되어 온 일이다. 여전히 소설은 그런 세계를 그리고 그 세계를 구성해 나가는 개개인을 그린다. 근대 이후 소설이라는 장르가 지금과 같은 형태로 자리잡아온 이래로, 이것은 당연한 일은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럴 법한 일이라 놀랍지는 않다. 그리고 저 소설들에도 그런 상처가 자리 잡고 있으며, 그 상처 위에 살아가는 개인들이 있다. 분명 저 소설들에는 지금의 호흡이 있고, 한국 현대 문학이라는 장 자체를 새로이 구성해가는 힘이 있다. 시대상이라는 것, 상처라는 것이 모두에게 동일하거나 균질하지 않다는 것은 자꾸 누군가가 남겨두지 않으면 잊히는 진실이다. 진실의 언어는 새로운 작가와 새로운 독자를 받아 갱신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같이 영상 미디어가 발달한 세상에, 소설은 어떻게 되려나? 지레 겁을 먹고 소설은 끝났다고 선언하신 이들도 있기는 하다. 세상에 재미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가, 게임도 있고 영화도, 드라마도, 애니메이션도 있다. 예능도 있고. 그러나 소설은 끝나고 난 뒤에 우리에게 내면을 발견할 언어를 남긴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에 뭔가를 남기겠지만, 소설이 끝나고 난 뒤에 우리는 혼자서 알게 되는 것이다. 이 페이지를 다 읽은 내가 있다는 것을. 내면의 발견이 별건가? 자의식 과잉이란 주화입마에도 한번 빠져보고, 그러면서 지금의 언어로 명료하게 여긴 어디, 나는 누구, 사고해보면 되는 것 아닌가. 소설은 언제나 ‘여기’, ‘누군가’를 위해 있다. 여전히 새롭고, 여전히 소설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지금 저 작가들의 소설과 그 일을 도모해 나갈 수 있다는 것이 기쁘다. 글 / 김복희(시인)

    에디터
    김아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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