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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트 메이커 포스트 말론의 모순적 세계

2020.05.13GQ

명랑하고 쾌활한, 혼돈 상태인, 늘 술에 취해 있는, 그러면서도 끝내주게 음악을 잘 만드는 히트 메이커. 포스트 말론의 엄청나게 복잡하고 믿을 수 없이 모순적인 세계.

셔츠, 톰 포드. 타이, 샤르베. 코트, 디올 맨.

셔츠, 톰 포드. 타이, 샤르베. 팬츠, 아미리. 코트, 디올 맨. 슈즈, 크리스찬 루부탱.

수트, 세루티 1881. 셔츠와 타이, 모두 톰 포드. 슈즈, 크리스찬 루부탱.

셔츠, 벨루티. 목걸이와 귀고리는 모두 뮤지션의 것.

블레이저, 팬츠, 슈즈, 모두 돌체 & 가바나. 셔츠, 톰포드. 모자와 시계는 모두 뮤지션의 것.

코트, 지방시. 셔츠, 디올 맨. 팬츠, 톰 포드. 모자는 뮤지션의 것.

 

“잠깐, 버드 라이트에서 셀처 Seltzer가 나왔네?” 포스트 말론이 사우스 로스앤젤레스의 한 편의점에 멈춰 서서 말했다. 어딘가는 새벽 다섯 시 무렵이었겠지만, LA는 아니었다. 포스트 말론도 몇 시인지 신경 쓰지 않았다. 어쨌거나 그 편의점은 가짜였다. 포스트 말론은 슈퍼볼 광고를 극비로 촬영하면서 대사를 연습하고 있었다. 세트 디자이너들이 카센터 건물을 편의점으로 바꾸어 놓았는데, 정말 진짜처럼 보였다. 버드 라이트를 빼고 진열대에 있는 상품이 모두 가짜라는 점을 제외하면 말이다. 점심시간이 되자, 포스트 말론은 프라이버시를 위해 주차장에 설치한 천막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 들어갔다. 그는 생각보다 키가 크고 체격이 좋았다. 거기에 짙은 갈색 카우보이 부츠까지 신어 키가 몇 인치는 더 커 보였다. 아이스박스에 자리를 잡고 앉아 카멜 담배 한 갑을 피우면서 식사로 준비된 치즈 스테이크와 프라이드치킨에는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촬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쉽네요. 외울 대사가 별로 많지 않아서.” 그는 여러 사람 앞에서 대사 읊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일은 좀 부끄럽거든요.”

포스트 말론은 알고 있다. 사람들이 자신의 수줍음 많은 성격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말이다. 비단 그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뮤지션 중 하나이기 때문은 아니다. ‘Rockstar’, ‘Sunflower’, ‘Circles’ 등 지난 몇 년간 어떤 뮤지션도 포스트 말론처럼 꾸준히 블록버스터급 히트곡을 발표한 적은 없다. 스포티파이는 그를 2019년 최다 스트리밍 아티스트로 선정했다. 닐슨 미디어 리서치에 따르면, 그의 앨범 <Hollywood’s Bleeding>은 2019년 9월에 발매되었음에도 그해 사람들이 가장 많이 청취한 앨범이었다. 그의 음악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면서 포스트 말론은 사교적인 이미지를 얻기도 했다. 그는 이제 겨우 스물네 살로, 즐겁게 성공을 만끽하고 있다. 고급 취향을 향유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공했지만, 여전히 싸구려 취향이 주는 쾌감을 잃지 않고 있다고 팬들을 안심시키면서 말이다. 포스트 말론의 스폰서로는 버드 라이트 외에도 그의 이름을 따서 리미티드 에디션을 선보인 크록스,‘플레이밍 핫 리몬 Flamin’ Hot Limón’ 칩스의 광고 모델로 그를 선택한 도리토스가 있다. 그는 이제 세계적인 셀러브리티가 되었지만 여전히 외부에서 온 침입자처럼 행동한다. 화려한 파티를 배회하면서도 여전히 눈꺼풀을 무겁게 내리뜨고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포스트 말론의 음악은 얼핏 들어보면 혐오스러울 수도 있다. ‘변두리 팝Suburban Pop’이라고 포장된 허세 섞인 힙합인데, 얼굴에 문신 가득한 백인 남자가 전 여자친구의 배신에 대해 소심한 지적질을 하는 내용이다. 하지만 지난 몇 년 동안 포스트 말론을 회의적으로 보던 사람들까지도 그를 싫어하기란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의 앨범은 점점 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롤링 스톤>은 2018년 앨범 <Beerbongs & Bentelys>를 “새로운 방식의 돈 자랑 우로 보로스(별 다섯 개 중 두 개)”라고 혹평했으나, 지난해 앨범 <Hollywood’s Bleeding>은 “뜬구름 잡던 어둠에서 ‘탑40 골드’로 올라서는 재능(별 네 개)”이라고 호평했다. 사실 그의 노래는 모두 멜랑콜리한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이 우울함이 편한 음악을 만드는 힘 중 하나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구리다’라고 가차 없이 말한다. 이렇게 자기 평가를 밀어붙인 다음에야 실은 그렇지 않다고 인정한다. “진짜 열심히 하거든요. 그렇지만 스스로 구리다고 하는 건 ‘모든 사람이 내 노래를 좋아하는 건 아니고, 싫어하는 수많은 사람도 있지만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방식이에요. 약간의 자기 비하는 큰 효과가 있죠.” 그가 웃는다.

포스트 말론의 첫 앨범, <Stoney>의 제목은 친구들이 그를 부르던 이름에서 따왔다. 그는 불안 발작으로 끝없이 가라앉는 느낌을 경험한 후 마리화나를 끊었다고 말했다. <Stoney>의 첫 번째 곡 첫 소절은 이렇게 시작된다. “깨진 위스키 잔에 코데인을 들이켰지.” 그는 자신의 식습관이 그때 이후로 바뀌었다고 말한다. 지금은 술보다 센 것은 입도 대지 않는다. 그렇지만 술보다 약한 것도 가까이하지 않는 것 같다. 12월에 광고를 촬영하던 시기는 약 두 달 동안 투어를 쉴 때로, 그는 신이 나서 LA에서 거의 2주 동안 휴가를 즐겼다고 설명했다. “1초도 취하지 않았던 적이 없어요.” 그가 말했다. “잠을 잘 수가 없어서 술에 취해 오후 3시까지 깨어 있었죠.” 그런 스케줄에도 불구하고 카메라 앞에서 매력적으로 보이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그리고 촬영이 끝나갈 자정 무렵, 그의 진짜 하루가 막 시작되었다. 그는 즐길 거리를 찾아 LA의 어두운 밤 속으로 불현듯 사라졌다.

몇 주 후, 뉴욕에 방문했을 때까지 그는 여전히 즐기고 있었다. 포스트 말론은 타임스퀘어에서 열리는 ABC의 ‘New Year’s Rockin’s Eve’ 무대에 서게 되었다. <TMZ>의 카메라맨은 호텔 근처에서 포스트 말론이 오른쪽 뺨 가득 철퇴 모양의 페이스 타투를 하는 모습을 기습적으로 촬영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중세 시대 기사, 고대 이집트와 로마 문화에 빠져 있었다. 새해가 밝아오자, 그는 무대에 서서 최고의 히트곡인 ‘Circles’을 열창했고, ‘Congratulations’ 순서에서 은빛 종이를 휘날리며 공연의 클라이맥스를 장식했다. 집에서 TV로 공연을 보던 시청자들은 포스트 말론이 무대와 관객석 사이로 떨어져 보안요원의 부축을 받는 장면을 보지 못했다. 그때도 그는 내내 웃고 있었다. 맨해튼의 술집들이 문을 닫을 때까지 그는 피곤해 하지 않았으며, 좋아하는 인디 밴드 ‘비치 포슬 Beach Fossils’ 멤버들을 만났다. 포스트 말론은 투어 중에 라스베이거스에 갔다가 돈을 엄청 잃었고, 작곡가 브라이언 리와 같이 즉흥적으로 일본을 방문했다. 음악계의 보증된 히트 메이커 중 한 명인 그는 업계 관계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이 해외 일정은 포스트 말론에게는 휴가이자 비공식적 파업이었는데, 관계자들은 이를 미처 알지 못했다. 그는 “내 주변 모두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이렇게 푸념한다. “가끔은 날 좀 내버려둬요. 나만의 시간이 없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거든요.”

대륙을 바쁘게 오가던 포스트 말론이 숨을 고르기 위해 머문 곳은 지난 2년간 그의 은신처였던 유타의 집이었다. 산비탈에 크고 각지게 지은 이 집은 LA에서 비행기로 단 몇 시간이면 갈 수 있지만, 심적으로는 훨씬 멀게 느껴진다. 어느 흐린 날, 포스트 말론은 긴팔 화이트 레깅스에 달라스 카우보이스팀 저지(55번, 레이튼 벤더 에쉬)를 입고 저녁 시간 즈음 침대에서 일어났다. 이론적으로 유타는 그가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할 때 가는 곳이지만 실제로 혼자 있는 경우는 드물다. 이날은 조용히 집안일을 하는 가족들과 그의 아버지 리치 포스트가 있었다. 포스트 말론의 음악에 대한 열정과 자긍심은 멋진 구레나룻을 가진 수다스러운 아버지에게서 온 것 같았다.

포스트 말론의 본명은 ‘오스틴 리처드 포스트 Austin Richard Post’다. 뉴욕 시라큐스 언저리에서 별거하던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아이팟으로 건즈 앤 로지즈, 조지 스트레이트, 제이 지의 음악을 즐겨 들었다. 잡다한 음악적 취향을 가졌던 셈이다. 처음으로 좋아했던 두 앨범은 스테픈 울프의 ‘Magic Carpet Ride’ 같은 곡이 실린, 모터사이클을 주제로 한 컴필레이션 앨범과 힙합 히트곡인 ‘Lean Back’이 수록된 팻 조와 테러 스쿼드의 앨범 <True Story>였다. 어린 시절에는 거실로 불려 나가 아버지 친구들 앞에서 ‘Lean Back’에 맞춰 춤추며 재롱을 떨기도 했다. 그가 혼자서 비디오 게임인 기타 히어로를 마스터하자 어머니는 진짜 기타를 사주었다. 아버지가 달라스 카우보이스 구단의 매점 관리인으로 취직하면서 포스트 말론은 텍사스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크라운 더 엠파이어’ 같은 밴드에 이끌려 로컬 메탈 코어에 푹 빠졌다. 그는 소프트웨어를 해킹해서 비트를 만들고 그 위에 랩을 얹으면서 동시에 메탈 밴드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2013년,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LA로 이사했다.

포스트 말론이 LA에서 만난 사람 중 하나는 영국 출신의 젊은 음악 경영자인 ‘드레 런던 Dre London’이었다. 그는 포스트 말론이 제 형편에 맞춰 부리는 스웨그와 다재다능함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포스트 말론은 엔시노에 있는 드레 런던의 셰어 하우스를 들락날락하면서 오후부터 랩을 하기 시작해 어쿠스틱 기타에 맞춰 러브 송을 부르며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이때부터 드레 런던은 포스트 말론의 매니저로 계약해서 지금까지 그를 관리해왔다. “처음부터 항상 사람들에게 말해왔듯” 드레 런던이 입을 뗀다. “포스트 말론은 힙합을 하지만 래퍼는 아니다.”

처음에는 힙합과 랩 사이의 미묘함을 구분 짓는 사람들이 없었다. 2015년 포스트 말론은 ‘White Iverson’을 발표했다. 밤늦게 사운드클라우드에 곡을 업로드하고 다음 날 수십 회 정도의 조회 수가 올라갈 것이라 예상하면서 잠자리에 들었다. 그는 “아침에 일어나서 봤는데 7천인가 3만인가? 기억이 안 난다”고 회상했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서 대마초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조회 수가 올라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야, 이거 정말 죽여주네’라고 했어요. 내 인생 최고의 날 중 하나였죠.” 몇 달 뒤에는 뮤직비디오가 올라왔는데, 포스트 말론은 렌트한 롤스로이스 앞에 쭈그리고 앉아서 돈 자랑을 시작했다. 최면에 걸린 듯 몽환적인 비트와 함께 시끄러운 음악이 쏟아지고, 갑자기 부드럽고 애절하게 가사를 웅얼거리는 스타일이 정말 몽환적이다. “돈 벌기 시작할 때 난 어렸지 / 내가 사라지고 나면 넌 날 생각하겠지 / 난 한 번도 가진 적 없는 우승 반지처럼 돈을 원해”. 당시 사운드클라우드를 비롯한 여러 스트리밍 사이트에는 안개 낀 듯한 흐릿한 보컬이 돋보이는 미스터리한 가수로 도배되었다. 포스트 말론은 릴 요티 Lil Yachty, 스푸키 블랙 Spooky Black, 아이 러브 마코넨 I Love Makonnen이나 융린 Yung Lean 같은 싱잉 랩 뮤지션 중 하나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심지어 지금도 전혀 다른 스토리를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첫 히트곡의 성공을 넘어서려다가 실패한 뒤, ‘White Iverson’을 부른 원 히트 원더로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것 말이다. 2016년 말에 ‘Stoney’를 발표하며 음악계에 변화의 조짐이 불기 시작했다. 미고스 Migos의 퀘이보 Quavo가 피처링으로 참여한 ‘Congratulations’는 포스트 말론의 운명을 구하기 위해 필사의 노력을 다한 곡이었다. 이 곡은 2017년 초반부터 반응을 보이더니 점차 인기를 얻으면서 그해 가장 성공한 노래 중 하나가 되었다. 이 곡으로 포스트 말론은 팝 장르도 소화 가능한 만능 뮤지션으로 인정받았다. 그는 힙합을 잘 알았지만 드레 런던이 말했던 대로 래퍼는 아니었다. 그는 동네 형 같은 유쾌한 남자이자, 우울한 코데인 흡입자이자, 누구도 잘생겼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십 대가 가장 사랑하는 뮤지션이다. 포스트 말론이 얼굴에 타투를 하는 것은 일종의 방어 기제일 수 있다. “내가 남들에게 어떻게 보일지에 대한 불안을 느끼기 때문인 것 같아요. 그 불안을 쿨한 것으로 가려서 스스로 약간의 자신감을 가지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어요.”

포스트 말론의 히트곡 대다수는 커리어를 시작할 때부터 함께 음악을 해왔으며, 이제는 포스트 말론 음악 팀의 중추적인 멤버인 작곡가 겸 프로듀서, 루이스 벨 Louis Bell과 함께 작업했다. 루이스 벨은 이제 인기 있는 프로듀서가 되어, 최근에는 테일러 스위프트, 카밀라 카베요, 라나 델 레이 등의 앨범에 참여했다. 그는 포스트 말론이 비트를 듣고 거의 바로 멜로디를 만드는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포스트 말론은 스스로를 예측하지 않아요. 트랙 하나를 15분 동안 반복해서 틀어놓고 롱테이크로 한 번에 곡을 만드는데, 그건 자신이 뭘 원하는지를 분명히 알기 때문이에요.” 포스트 말론은 기술적 결함을 걱정하지 않는 법을 익혔다. “노래를 잘 부를 필요 없어요. 그냥 빌어먹을 진심을 보여주는 거죠. 데이비드 번 David Byrne이 말하길, ‘사운드가 좋을수록 사람들은 당신을 믿지 않는다’잖아요.” ‘White Iverson’이 첫 히트곡이 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하면서, 포스트 말론은 복잡한 인종 역학이 자신의 커리어를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인정했다. 그는 힙합에 푹 빠진 백인 남자였고, 흑인 문화에도 매료되어 있었다. 뮤직비디오에서 그는 콘로 헤어에 금니를 하고 등장해 일종의 소원성취를 이뤘다. 이렇게 인종을 오가는 정체성은 최근 유행이 끝나고 있다.

포스트 말론이 몇 년 뒤에 데뷔했으면 콘로 헤어는 그의 음악을 무색하게 만들었을지 모른다.

‘White Iverson’이 폭발적 인기를 얻으면서 그는 뮤직비디오에 대해서 해명 할 일이 생겼다.

만약 그가 흑인이었다면 일상적으로 여겨졌을 ‘N-word’에 해당하는 비하적 단어를 웅얼거렸다는 것에 관해서 말이다. 포스트 말론은 ‘N-word’를 말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그 일부분이 되기를 바랄 정도로 힙합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는 명백히 사과를 거절했다. 그는 훌륭한 뮤지션이기 이전에 자신의 우상을 모방하는 평범한 래퍼였다. “나는 열렬하게 맥 밀러, 트래비스 스콧, 에이셉 라키같이 되고 싶었다”고 그는 말한다. 포스트 말론은 때때로 정통 힙합으로부터 멀어지려고 했다. 그가 특히 좋아한 래퍼는 맥 밀러였다. 2018년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이 둘은 가까운 음악적 동료이자 친구 사이였다. 그는 맥 밀러가 기존의 힙합계와는 동떨어진 음악적 연결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맥 밀러의 첫 히트곡은 인디 록 밴드인 수프얀 스티븐스의 곡을 샘플링한 것이었다. “내 생각에 그 것이 제일 쿨한 곡이었다”고 포스트 말론은 말했다. 2013년 포스트 말론은 성조기 티셔츠를 입고 밥 딜런의 명곡 ‘Don’t Think Twice, It’s All Right’를 커버한 영상을 유튜브에 올렸다. 이 영상에서도 그는 직접 기타를 치며 여전히 특유의 웅얼대는 불안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포스트 말론의 거칠게 떨리는 보컬은 멜랑콜리함을 불러일으키고 싶을 때 아름다운 음악적 도구가 된다. 스스로 염소 소리라고 농담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음악적 우상인 이모락 밴드 브라이트 아이즈 Bright Eyes의 코너 오버스트 Conor Oberst를 떠올리게 한다. “<I’m Wide Awake>, <It’s Morning>은 가장 슬픈 앨범이에요. 앨범을 틀어놓고 술을 마실 때마다 눈이 빠져라 울었죠.”

이상하게도 이런 식의 감정 때문에 포스트 말론은 가혹한 비판을 받았다. 2017년 폴란드의 한 미디어와 인터뷰하면서 그는 컨템퍼러리 힙합은 감정선이 부족하다고 밝혔다. “울고 싶고, 삶을 고찰하고자 한다면 힙합을 듣지 말라”면서, “삶을 이야기하고 거지 같은 현실에 대해 내뱉는 힙합도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을 말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다. 그래서 울고 싶을 때, 그러니까 자리 잡고 앉아서 멋지게 울고 싶으면 나는 밥 딜런의 음악 같은 것을 들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듬해 <워싱턴 포스트>의 비평가 제프 와이스 Jeff Weiss는 텍사스에서 열린 포스트 말론의 홈커밍 콘서트에 대해 “은박지로 된 왕좌에 앉은 가짜 창백한 왕”이라는 혹평을 써 내려가며, 그가 힙합을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제프 와이스는 “편할 때는 힙합의 쿨함과 스웨그를 가장하고 명분을 따질 때는 발을 뺄 줄 안다”고 비판했다. 포스트 말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부분이 바로 두려운 지점이다. 그는 힙합 안에 남아 있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훨씬 의미 있고 세련된 음악 스타일로 나아가기 위해 계속해서 힙합을 탈피하려고 안간힘을 쓴다는 것 말이다.

이제 포스트 말론은 힙합을 이야기할 때 조심하려고 노력한다. 래퍼의 의미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 영 서그 Young Thug 같은 힙합 영웅을 재빨리 인정한다. 그러나 포스트 말론을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진짜 이유는 음악 자체와 관련 있다기보다는, 흑인들에 비해 백인 힙합이 주류 음악계에서 쉽게 성공을 거둔다는 인식 때문이다. 포스트 말론은 이제 그가 영감을 받은 대부분의 뮤지션을 넘어섰다. 포스트 말론은 정상에 오르기까지 자신이 좋아하는 곡에서 영향을 받아 시시콜콜한 여러 음악을 만든 것 빼고는 딱히 불쾌한 일을 저지른 적이 없다. 하지만 미국에서 성공을 거둔 여느 사람들처럼 이제는 성공을 가능케 한 역사와 시스템을 고려할 이유가 생겼다. 그는 이제야 그 의미를 생각하기 시작했고, 성공하는 데 시스템의 도움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이제 제가 하는 일을 가능하게 만든 것에 대해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감사하고 되돌려줄 때가 되었어요.”

포스트 말론과 어울리면 그가 얼마나 큰 성공을 거뒀는지를 쉽게 잊게 된다. 유타에서의 어느 오후, 그는 도리토스가 떨어져 가자 사러 나가려고 일어났다. “코스트코에 가야겠어요.” 그가 말했다. 그리고 롤스로이스 팬텀, 람보르기니 아벤테도르, 맥라렌 720S 스파이더, 그리고 지난여름에 3백만 달러를 주고 산 부가티 시론 등, 할인받지 않고 산 총 네 대의 흰색 자동차가 있는 차고로 들어갔다. 포스트 말론은 코스트코에 간 적이 없다. 하지만 분명 쇼핑은 좋아한다. 여느 팝스타처럼 스니커즈, 크록스, 카우보이 부츠가 가지런히 정리된 신발 컬렉션이 있는 거대한 신발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여느 팝스타와 달리 총도 수집한다. 바 카운터에는 소총 몇 개와 ‘맥심 9 소음권총’ 등 십여 정의 총이 놓여 있다. 그는 이 총기류를 “레고의 어른 버전”이라 부르며 장난감이라고 묘사하지만, 난동에 대한 안전을 염두에 두고 수집하는 것이다. (<TMZ> 에 따르면, 2018년 포스트 말론이 살았던 캘리포니아 집에 세 명이 침입해 권총으로 때리고 강도질을 했다.) 그는 태평해 보이는 반면, 그의 음악은 편집증적인 구석을 보여준다. 유명해지고 부자가 되기 전부터 부와 명예의 위험성을 노래해왔다. “우리는 돈을 엄청 번 남자가 결국 마지막에 홀로 집에 남게 되는 완전 지루하고 뻔한 스토리의 영화를 늘 봐왔잖아요.” 그가 덧붙인다. “그런 영화는 항상 각성을 불러일으켜요.”

유타에서의 밤은 깊었고 포스트 말론은 여전히 일본 여행 후 시차 적응에 시달리며 엄청난 양의 버드 라이트와 그날 처음 맛본 버드 라이트 셀처 망고 맛 한 병의 도움으로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가 매번 고통을 이야기하다 보니 어떨 때는 그 고통이 일종의 유머처럼 들리기까지 한다. 메디슨 스퀘어 가든 무대에서 그는 영 서그와의 초특급 감성 컬래버레이션으로 탄생시킨 곡 ‘Goodbye’를 “슬픈 시간, 울음 같은 것, 비통함 같은 것을 표현한 노래”라고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일생 동안 특별히 연관되지 않는 슬픔에 대해 생각했다고 강조했다. “중학교 시절, 매일 밤마다 잠들지 못해 울었어요. 고등학교 때도 똑같았어요. 이 빌어먹을 것들을 잊기 위해 맥주를 마셨지만 사라지지 않았죠. 그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제 속에 내재된 무언가와 관련이 있죠.”

포스트 말론은 정신 건강의 중요성에 대해 명확하게 말하고자 했다. “저는 완전 미친놈이에요. <Stoney>를 발표한 뒤에 몇 년 동안 악화되었어요.” 많은 뮤지션처럼 효과적으로 치료를 받으면 음악이 퇴보할까 봐 두려워한다. 물론 그도 자가 치료의 위험성을 알고 있다. 최근 세상을 떠난 맥 밀러뿐 아니라 2017년에는 릴 핍이, 2019년 12월에는 주스 월드 등 그의 음악적 동료들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그게 저였을 수도 있어요.” 포스트 말론이 말했다. 초기 싱글 ‘Too Young’은 살고자 하는 열망을 담았고, 커트 코베인, 래퍼 뱅크롤 프레시, 릴 핍 등 살아남지 못한 뮤지션의 이름을 타투로 남겼다. 하지만 정신 건강 문제로 치료를 받고 있냐는 질문에는 “현재 노력하고 있다”고 애매하게 답했다.

5년 전 포스트 말론이 힙합 스타가 되겠다고 선언했을 때, 많은 사람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그가 혼돈의 삶 속에서 평화를 찾는 데 적합한 노력을 이야기한다 해도 많은 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일어나니 너무 아프고 뻐근했어요. 하지만 적어도 이것이 음악의 아름다운 점이죠. 무언가 뇌를 스치면 컴퓨터 앞에 앉아 비트를 만들고 ‘White Iverson’ 같은 곡들을 만들어요. 그것만 있으면 되죠.”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솔직히 나도 모르겠어요. 제가 누군가에게 영감을 주는 놈은 아니었지만, 빌어먹을, 제가 할 수 있다면 당신도 할 수 있잖아요?” 그는 숨을 고르며 이 문장은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고 고백했다. 래퍼 치프 키프가 부른 ‘Get Money’의 가사를 바꿔 표현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 말이 여전히 그의 진심처럼 들렸다.

    Kelefa Sanne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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