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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스키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꼭 필요한 이유

2021.10.04전희란

눈과 귀를 닫으면 그제야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1만원부터 1억원을 호가하는 요즘 위스키 시장에서, 내가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고집하는 이유.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대중적으로 알려지게 된 사건이 있다. 관련 일화는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일명 <파리의 심판>. 1976년 프랑스 와인 전문가 9명이 참여해 프랑스 와인과 미국 와인을 섞어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진행했다. 결과는 모두의 예상과 달리 프랑스의 참패였다. 세계 최고의 와인이라는 절대적 지위를 누리던 프랑스 와인의 명성에 금이 간 사건이자 맹목적으로 프랑스 와인이 최고라 여기던 이들에게 충격을 안겨준 사건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우리가 기존에 갖고 있던 고정 관념을 깨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우리는 생각보다 맛을 모른다. 그리고 맛으로만 가치를 평가하지 않는다. 타인의 평가, 명성, 가격 등 외부의 부수적인 요소들을 통해 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효과는 무수한 실험에서 이미 증명되었다. 와인을 비롯한 주류 품평회에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평가한다는 것은 그만큼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본질을 제대로 볼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자, 그러면 본격적으로 위스키와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관해서 얘기를 해보자. 그동안 위스키는 상대적으로 블라인드 테이스팅과 거리가 멀었다. 위스키는 술 가운데 가장 객관적인 스펙이 존재하기 때문이고, 가치를 가격으로 반영할 수 있는 술인 까닭이다. 특히 가장 명확하게 가치를 표현할 수 있는 ‘숙성 연수’라는 것이 존재한다. 숙성 기간이 길수록 그만큼 증발되어 많은 손실이 발생한다. 당연히 가격이 비싸지고 가치가 올라간다. 그리고 질 좋은 캐스크를 쓴다거나 알코올 도수가 높은 캐스크 스트렝스(물로 희석하지 않은 원액) 등 객관적으로 가격을 수치화할 수 있는 스펙이 너무 많다. 들어간 비용과 쏟은 시간, 정성에 따라 비싼 위스키와 값싼 위스키가 나뉘어져 왔으니 위스키의 가격과 가치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요새 위스키에도 블라인드 테이스팅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싱글 몰트위스키를 필두로 위스키의 급격한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위스키의 가격이 코인 저리가라 할 정도로 무섭게 올랐다. 이제 위스키도 재테크 수단으로 각광받고 있다. 경매에서 연일 신기록을 경신하며 몇억짜리 위스키도 즐비해졌다.
예전에는 위스키는 비슷한 스펙을 갖고 있으면 어디서 만들든 어떤 브랜드든 가격 차이가 크지 않았다. 게다가 위스키를 구하기 위해서 경쟁할 필요도 없었다. 위스키 생산량보다 위스키 소비자가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은 품질의 비싼 위스키는 그만큼 값을 지불하면 누구나 살 수 있었다. 공을 들인 만큼, 오래된 만큼, 도수가 높은 만큼, 좋은 캐스크를 쓴 만큼 가격이 비쌌다. 즉, 정량화된 수치만큼 비쌌기 때문에 우리가 가격 너머의 가치를 의심할 필요가 없었다.
하지만 근래 들어 많은 사람이 위스키를 찾고 있다. 인기 있는 위스키는 아무나 살 수도 없어졌다. 그러자 가격이 오르고 리셀 시장이란 게 생겼다. 위스키 테크, 위스키도 하나의 투자 상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위스키에도 스펙을 속이고, 외부 요소들로 품질을 속이고, 가격만 높은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위스키도 제대로 된 가치를 물을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비싼데도 품질은 떨어지는 위스키 사이에서 진짜 맛있는 위스키를 골라내는 것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해보면 항상 예상보다 충격적인 결괏값이 나온다. 우리는 생각보다 맛을 잘 모르니까. 물론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실 맛의 편차는 가격 차이만큼, 인지도 차이만큼 크지 않다. 쉽게 말하면 1만원짜리 술과 1천만원짜리 술의 가격은 1천 배지만 맛은 그만큼 차이가 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는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다. 가격, 브랜드 등을 알고 마시면 대부분이 비싼 위스키, 유명한 위스키를 맛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람들의 잘못이 아니라 우리의 뇌 구조가 그렇게 명령한다.


그래서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할 때 굳은 각오가 필요하다. 기존에 갖고 있는 편견을 버릴 준비, 새로운 가치를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은 이런 도전을 시도하는 것 자체를 꺼린다. 아마도 진실 앞에 설 두려움 때문에.
과거 모 위스키 수입 회사에 몸담았을 때 추진했던 위스키 블라인드 테이스팅 사례를 하나 들어볼까 한다. 당시 우리 회사의 위스키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분명 비슷한 급의 타사 위스키에 비해 맛이 떨어지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떠도는 외부 이미지로 인해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심지어 맛이 없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그래서 야심 차게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준비하기로 했다. 편견 없이 마신다면 우리 회사 위스키가 결코 뒤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그래서 위스키 마니아 20여 명을 초대해 비슷한 가격대의 위스키 8종을 놓고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진행했다. 그 결과 가장 이미지가 좋지 않았던 우리 회사 위스키가 공동 2등이라는 높은 점수를 받았다. 예상대로였다. 사람들은 대중들의 시선이나 떠도는 평가만 듣고 맛 없을 거라 단정 지었던 것이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이 끝나자 참여했던 대다수의 마니아가 말 없이 돌아 갔다. 그 후로 그들이 다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참여하는 일은 없었다.
블라인드 테이스팅은 대개 사람들이 믿고 있던 가치에 혼란을 일으킨다. 그동안 애지중지 모아온 장 속의 위스키 컬렉션을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열린 자세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 도전한다면, 위스키를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지고 크게 성장할 것이며 새로운 장이 열리는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는 현재 김포에서 국산 싱글 몰트위스키를 만들고 있다. 이제 거의 1년 가까이 숙성되어 제법 위스키스러운 티를 내기 시작하고 있다. 내가 느끼기에는 부족할 것 없이 맛이 좋지만 객관적인 검증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럴 때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블라인드 테이스팅이다. 그래서 종종 내가 만든 위스키를 주변 사람들에게 블라인드 테이스팅으로 맛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다 최근에 진행한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누군가가 맛을 보고는 일본 ‘치치부 위스키’인 것 같다고 대답한 것이다.
사실 필자는 일본의 치치부 위스키 증류소에서 위스키를 만드는 방법을 배워왔다. 그리고 6년 뒤 김포에 직접 위스키 증류소를 만들기 시작했고,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치치부 위스키 증류소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다. 이렇게 만들었으니 당연히 내가 만드는 위스키가 일본 치치부 위스키와 비슷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하지만 필자가 만든 위스키라는 정보를 미리 알고 마셨다면 치치부 위스키와의 공통점을 찾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이렇게 편견 없이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하다 보면 의외의, 예상하지 못했던 위스키의 넓은 세계를 발견하기도 한다.
최근 한국의 위스키 시장 성장세가 눈에 띄는 수준이다. 위스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는데 시중에 온갖 광고와 현혹하는 달콤한 속삭임들이 우리를 유혹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떤 위스키가 진짜 맛있는지, 어떤 위스키를 사야 할지 많은 분이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선뜻 외부 평가에 따라 위스키를 샀다가 실망한 적도 많았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과감하게 블라인드 테이스팅을 해볼 것을 권한다. 오직 품질, 맛만을 추구하려 하는가. 위스키가 진짜 어떤 술인지 궁금한가. 그렇다면 눈과 귀를 한번 닫아보시길. 글 / 김창수(김창수 위스키증류소 대표)

    피처 에디터
    전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