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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달을 마무리하며 읽기 좋은 책 추천 12

2021.12.02김은희

열두 달을 완독하며 열두 권을 품었다. 2021년과 보낸 책 12.

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민음사
완독의 원동력 —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 소설이라서 당연히 읽어야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것보다는 지금은 잠시 쉬고 있으나 상반기에 한참 진행했던 독서 팟캐스트 <사각사각>에서 소개할 수 있으려나 하고 읽었다. 소개해야 해서 읽었지만, 정말 재미있었다. 444쪽에 이르는 책을 단 이틀 만에 읽었으니 재밌긴 재미있었나 보다.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그러나 저러나 하나부터 열까지 (여러 성격의) 재미밖에 없다.
밑줄 그은 문장 — “가끔, 이런 특별한 순간에 사람은 행복과 아픔을 동시에 느껴.”
이런 사람에게 — 무언가 간절하게 원했던 적이 있는 사람. 지금도 그 간절함이 떠오르는 사람. 서효인(시인, 안온북스 대표)

녹색 커튼으로 강희영, 문학동네
완독의 원동력 — “네 생각이 나서 주문했어.” 집 앞에 놓인 정체불명의 봉투가 친우가 보낸 책 선물이라는 걸 알았을 때, 무슨 일이 있어도 끝까지 읽으리라 다짐했다. 누군가를 떠올리게 하는 이야기란 무엇일까. 그 애정을 아낌없이 표현해주는 마음이란 무엇일까. 내게는 없는 것 같은 성정을 더듬으면서 <녹색 커튼으로> 들어섰다. 이 녹색 커튼은 투명했고, 보드라웠고, 빛났다.
밑줄 그은 문장 — “스스로를 전소시킨 계절이 다 지나가면 그때 우리는 어떤 옷을 꺼내 입을까. 옷장에 남아 있는 게 없어.”
이런 사람에게 — 계절을 느끼는 사람에게. 이세(드라마 작가)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어크로스
완독의 원동력 — 이 책의 주인공은 철학자들이 아니라 저자인 에릭 와이너다. 그런데 철학을 논하는 이 남자, 어째 각이 딱 잡힌 ‘선생님’ 같지 않다. 어딘가 궁상맞고 칠칠치도 못한 중년 남자다. 게다가 ‘아빠스플레인’을 하다가 수시로 사춘기 딸한테 ‘까이기’까지. 그러니까, 저자가 책 속에서 그려내는 자신의 모습은 내 모습과 많이 닮아 있다. 자기 학대와 ‘아재 개그’를 섞어가며 철학자들에게 “그래서 인생의 의미는 뭔데? 뭐냐니까?”라고 징징거리며 묻고 다니는 중년 남자의 모험담을 어떻게 끝까지 읽지 않을 수 있을까.
밑줄 그은 문장 — “좋은 질문은 문제의 프레임을 다시 짜서 완전히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한다. 좋은 질문은 문제의 해답을 찾게 할 뿐만 아니라 해답을 찾는 행위 그 자체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이런 사람에게 — 슬슬 머리숱 걱정을 하는 사람들. 펴지지 않는 주름과 빠지지 않는 나잇살을 바라보는 사람들. 농담이 아니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에 나온 표현을 따르자면 “자신의 나이와 충돌”하기 시작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 삶의 격랑에 휩쓸려 가다가 문득 ‘여기는 어디, 나는 누구?’를 떠올리는 이가 있다면 이 책을 권한다. 백승주(언어학자)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민서출판사
완독의 원동력 — 그때 여행은 보통과 다르고 싶었다. 뮌헨으로 가는 길이니까 뮌헨을 담은 무언가와 함께하고 싶었고, 그렇게 전혜린과 닿았다. 객관적인 사실로는 1950년대에 독일 뮌헨으로 유학 갈 만큼 유복한 집안의 장녀, 번역가, 문장가. 그를 기억하는 이들의 주관적인 감상으로는 서울의 거리에서도 뮌헨의 카페에서도 ‘손님’이던 사람, 끊임없이 동요하며 아무 곳에도 머물지 않던 사람, 오늘의 침묵에 이르기 위해 언제나 말을 했던 사람. 정작 전혜린의 수필집을 펼친 때는 여행이 끝나고도 오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제야 나는 여행이 시작된 기분이었다.
밑줄 그은 문장 — “안개비와 구라파적 가스등과 함께 내가 그리워하는 것은 그때의 나의 젊은 호기심인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에게 — 어디로든 떠나고 싶은 사람에게. 그러나 그러지 못한 사람에게. 김은희(<지큐> 피처 에디터)

친절한 화학 교과서: 괴짜 엄마가 들려주는 흥미진진 화학 세계 유수진, 부키
완독의 원동력 — 미국에서 대학원을 다닐 때 책 수선 관련해서 화학 수업을 들을 일이 있었는데, 안 그래도 고등학교 때 화학을 포기했던 사람이 이제 와서 화학 수업을, 그것도 영어로 들을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잡는 심정으로, 아주 기본적인 기초라도 미리 다시 한번 이해해보려는 마음으로 구매했던 책이다. 막연하게 지루하고 어려운 원소의 나열이라고만 생각했던 화학 용어를 우리 일상과 가까운 예시들로 설명해놓은 작가의 쉬운 설명 덕분에 마지막 장을 덮을 수 있었다. 아마 이렇게 쉽고 재밌는 설명들이 아니었다면 성격상 분명 또 첫 챕터만 읽고 닫아버렸을 것이다.
밑줄 그은 문장 — “화학을 통해 병든 사람을 고치고, 우주로 날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나요?”, “화학은 세상을 이루는 물질을 다루는 학문입니다. 하늘과 땅은 물론 우리가 사는 집과 옷, 음식, 그리고 생명을 만드는 재료의 속성을 알고 우리의 삶에 이용하고자 하는 학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 학창 시절 화학이 재미없거나 어렵게 느껴져서 포기한 사람들, 가만히 있는 것처럼 보이는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과 물질들이 실은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고 싶은 사람들. 재영(재영 책수선 대표)

배우에 관한 역설 드니 디드로, 문학과지성사
완독의 원동력 — 인터넷에서 배우들이 연기 워밍업을 하는 영상을 우연히 본 적이 있다. 그때 배우를 업으로 삼는 사람은 나와 완전히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타인이라는 존재를 자기 자신의 몸을 통해 소화시키는 능력을 봤을 때 약간 충격적이기도 했다. 나는 내 자신의 몸과 생각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하는 편이라 타인이란 존재를 접해도 그 존재에 대해 단지 생각하는 데 그치는 반면, 배우는 타인이란 존재 그 자체가 되었다. 그 능력이 마치 초능력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더 열심히 책을 읽었던 것 같기도 하다. 책을 쓴 드니 디드로는 나와 사고방식이 비슷한 듯했는데, 책에선 줄곧 드니 디드로의 머릿속 사람 1, 2가 등장해 대화를 나눈다. 분열적인 서술을 따라가면서 디드로가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상상하는 게 즐거웠다. 그 당시 프랑스 배우들에 대한 일화도 흥미롭게 읽었다.
밑줄 그은 문장 — “<극시론>에서 디드로는 다음과 같이 밝힌 바 있다. ‘나는 오래전부터 혼잣말에 익숙하다. 사람들 모임에서 빠져나와 슬프고 고통스러운 상태로 집에 돌아가서는 서재에 틀어박혀 나한테 묻는다. 무슨 일이지요?…… 화났나요?…… 네…… 잘못 처신했나요?…… 등의 식으로. 그러면서 나는 나 자신으로부터 진실을 캐낸다.’”
이런 사람에게 — 디드로는 배우로서 지녀야 할 자질에 대해 말하지만 그 자질이 현대 배우들에게도 중요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배우론에 대한 책이라 할 수 있지만 배우가 되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진 않다. 그보다 조금 소심해 보이는, 한 프랑스 사상가이자 극작가의 면모를 알고 싶은 사람에게 추천한다. 윤지양(시인)

완벽한 개업 축하 시 강보원, 민음사
완독의 원동력 — 강보원의 글을 비평과 에세이로 먼저 접했다. 그리고 그가 시를 쓴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인과 비평가, 에세이스트가 어떻게 다른지, 한 사람이 세 가지 역할을 다 잘할 수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강보원의 글이라면 이런 의문 너머의 즐거움을 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차례대로 읽지 않고 틈틈이 하나씩, 손이 가는 대로 읽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다 읽었더라. 천천히, 설렁설렁. 어쩌면 책을 끝까지 읽기 위해 필요한 건 힘을 빼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완벽한 개업 축하 시>는 완벽한 힘 빼기의 기술을 알려주는 책이다.
밑줄 그은 문장 — “그는 그가 생각하지 못한 많은 것들 때문에 얼굴을 감싸고 울음을 터뜨릴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에게 — 자영업자.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는 사람. 정지돈(소설가)

언다잉 앤 보이어, 플레이타임
완독의 원동력 — 고통을 피하지 않고, 다룰 수 있어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무렵 이 책의 소개글을 보고 읽기 시작했다. 작가는 유방암 투병 중 느낀 것들을 적어가지만, 독자를 결코 연민에 빠져 있는 간병인으로 만들지 않는다. 고통이 매복되어 있을 땐 보이지 않던 삶의 살풍경에 대해 말한다. 어제까지 사랑을 나누던 침대 위에서 우리는 죽어갈 수 있다고. 그런 사실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며 읽기 시작했다.
밑줄 그은 문장 — “아마존에서 판매되는 티셔츠들이 보여주듯 언제든 암을 향해 ‘나 같은 년을 고르다니 너 잘못 걸린 거야’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사람에게 — 올해를 돌이켰을 때 쉽게 끄덕이지 못하는 사람들, 다친 적 없이 아픈 사람들, 목 놓아 소리치고 싶은 사람들, 무엇이든 돌파하고 싶은 사람들, 내가 나를 간병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서윤후(시인)

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문학동네
완독의 원동력 — 단편소설의 ‘대가’라고 생각하는 윤성희 작가의 새 단편집이었기에 망설임없이 집어 들었다. 모든 장면, 모든 문장 마다 인물의 생애가 녹아 있어,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단편소설 속 짧게 묘사된 인물들의 삶을 읽었음에도 길고 긴 인생을 함께 살아낸 기분이었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중장년층 여성의 삶을 다뤘음에도 마치 내 삶을 묘사한 것처럼 공감이 되었다.
밑줄 그은 문장 — “엄마, 눈 한 번 깜빡일 시간에 빛이 지구를 일곱 바퀴나 돈대. 딸은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눈을 감았다 뜨곤 했다. 눈 깜빡할 시간. 그 시간에 빛이 지구를 몇 바퀴나 돈다고 생각하면 자신의 고민은 하찮게 느껴진다고 했다.”
이런 사람에게 — 인생의 고난에 지친 사람에게. 모국어로 된 텍스트의 아름다움을 느끼고 싶은 사람에게.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에게. 박상영(소설가)

당신의 노후 박형서, 현대문학
완독의 원동력 — ‘노후’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노후에 대한 생각이 머릿속을 찔러 들어오는 시점은 저마다 다르겠지만, 나의 경우는 부모님 때문에 조금은 이른 나이부터 노후에 대한 생각에 괴로웠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다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나름 열심히 사셨다고 생각하는 우리 부모님이 준비하지 못하고 놓친 노후를 떠올리면 늘 가슴이 아팠다. 그러한 개인적인 그늘 때문인지 자연스레 <당신의 노후>를 집어 들고 한 페이지씩 읽기 시작했다. 소설 속에서 그리는 현실은 너무나 끔찍한 상상이지만, 한국의 정치인들을 생각하면 이러한 미래도 올 수 있겠다는 불신이 맞물려 오히려 더욱 재밌게 읽지 않았나 한다.
밑줄 그은 문장 — “국가는 모든 죽음을 부검할 만큼 한가하지 않다. 그게 다 국민의 세금이다. ”
이런 사람에게 — 당신의 노후가 궁금한 사람. 유재필(서점 오혜 대표)

종료되었습니다 박하익, 황금가지
완독의 원동력 — 중고 서점 소설 코너에 진열된 책을 훑어보다가 ‘네? 밑도 끝도 없이 종료되었다고요?’ 우리가 언제 시작한 적이 있었나…. 이유 모르게 당당한 제목의 책을 보고는 홀린 듯 집어 들었는데 이야기에 빠져드는 몰입 제로백이 슈퍼카 수준이었다. 첫 페이지를 읽는 순간, 편도체가 100퍼센트 활성화 상태에 이르렀다. 책을 읽는 동안엔 내가 주인공과 함께 모든 페이지에 존재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마지막 문장까지 읽고 나서는 아픈 뒤통수를 어루 만졌다. 그러곤 한참을 멍하게 앉아 있었다.
밑줄 그은 문장 — “최고의 형벌은 사랑이야. 죄인에게 사랑을 깨닫게 하는 거야. 피해자를 향한 불타는 사랑 말이야.”
이런 사람에게 — 신선한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에 목마른 이. 완독이 주는 쾌락을 맛보고 싶은 사람. 나의 이야기에 조금이라도 혹한, 지금 당신. 김보라(영상 디렉터)

태평양을 막는 제방 마르그리트 뒤라스, 민음사
완독의 원동력 — 영화로도 만들어진 <연인>을 재미있게 읽었다. <태평양을 막는 제방>은 <연인>보다 34년 앞서 쓰인 책인데, 작가가 “두 책은 한 몸”이라고 할 만큼 출발점을 공유하고 있는 소설이라고 해서 읽기 시작했다. 파괴적이면서도 미묘한 감정을 그리는 간결한 서술과 날카로운 장면들에 붙들려서 다음, 그다음을 읽게 되었다.
밑줄 그은 문장 — “갑작스러운 광적인 희망으로 마침내 오랜 마비 상태에서 깨어난 평야의 농부 수백 명이 온 힘을 쏟아부어 제방을 쌓았는데, 그 제방이 태평양 파도의 단순하고 가차없는 공격으로 단 하룻밤 사이에, 마치 카드로 쌓은 성처럼 그대로 무너져버린 광경을 어느 누가 비탄과 분노 없이 떠올릴 수 있겠는가?
이런 사람에게 — 사랑과 증오가 뒤얽힌 관계에 대한 치밀한 묘사를 보고 싶은 분들에게. 김세영(민음사 편집자)

    피처 에디터
    김은희
    포토그래퍼
    김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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