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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지도 않는 아트북을 사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2022.08.02전희란

점원은 키오스크, 은행은 스마트폰이 삼킨 디지털 시대에도 아트 북은 건재하다. 두껍고 비싼 게 전부는 아닌 아트 북의 유용함에 대하여.

첫 해외여행지는 뉴욕이었다. 대학교에서 국비 지원 해외 연수 참가자를 모집한다길래 충동적으로 신청서를 냈던 게 발단이었다. 얼떨결에 떠난 뉴욕은 매일이 현란했다. 볼거리만큼 살 거리도 어찌나 많던지. 매 순간 소비욕이 솟구쳤지만, 학생 신분임을 상기하며 MoMA가 새겨진 연필 한 자루도 고심 끝에 구매했다. 졸라맨 허리띠는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스트랜드 북 스토어, 뉴요커가 사랑하는 중고 서점이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올라 2층에 들어서니, 수만 권의 아트 북이 꽂힌 책장이 펼쳐졌다. 분야도 중세 미술부터 동시대 현대 미술, 아시아 고미술 등으로 다양했고, 제본된 모양새도 남달랐다. 샘플 세일에 온 사람처럼 정신없이 책을 담았더니 어느덧 장바구니는 묵직해졌다. 4백 불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억눌렀던 소비욕이 어쩌다 서점에서 터진 거지, 아트 북이 대단한 희귀서라 사재기한 건 아니다. 예술을 다룬다면 모두 아트 북이다. 예술 코너 스테디셀러인 곰 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아트 숍에 있는 전시 도록, 작가가 직접 기획·출판하는 아티스트 북, 그리고 영화·게임·패션 브랜드의 비주얼 콘셉트 양장본까지 폭넓게 아우른다. 아트 안에 순수 미술, 사진, 패션 등이 포함되듯 예술적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다.


예술은 무언가를 규정하는 일을 경계하는 학문이다. 아직 순수 미술의 정의도 명확하지 않은데, 하물며 아트 북은 어떠하리. 아트 북 안에는 여러 장르가 구분 없이 뒤섞여 있지만, 진행의 편의상 도록, 화집, 아티스트 북으로 분류해보겠다. 도록은 전시 기록물로 기획 의도, 작품 이미지, 비평문을 총망라한 서적이다. 전시가 끝나면 남는 건 도록밖에 없다는 말이 있을 만큼 텍스트와 이미지가 골고루 들어가 있다. 화집은 보다 이미지 중심이다. 종이 한 장에 이미지 한 점을 큼직하게 프린트하는 디자인으로 읽는 책이 아닌 보는 책에 가깝다. 이미지가 빽빽하게 들어가기에 수록 가능한 작품 개수가 절대적으로 많아야 제작할 수 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중견 작가나 시대를 풍미한 미술 사조를 중심으로 출간이 진행되고 있다. 작품을 담은 책을 흑백으로 인쇄하면 ‘나무야 미안해’와 같은 행동이다. 따라서 풀컬러 양장본이 주를 이루고 비싼 몸값도 자랑하는데, 호크니의 <A Bigger Book: Collector’s Editon>이 좋은 예다. 그의 10대 시절 작품부터 아이패드 드로잉까지 총망라한 책으로 7백50만원의 가격이 책정돼 있다.(책을 올려놓는 북 스탠드 값도 포함된 금액이다.)


요즘 부쩍 서점가에서 자주 보이는 영화, 게임, 패션 아트 북도 화집의 일종이다. 패션 하우스는 예술적 헤리티지를 선보일 수단으로, 영화와 게임 업계는 비주얼 콘셉트를 설명하고자 오프라인 매체를 택한다. 에르메스가 이를 잘 활용한 브랜드다. 환상적인 스카프 디자인을 종이로 구현한 <Hermès Pop Up>은 페이지를 넘기면 얼룩말이 움직이고, 나무에서 잎사귀가 피어난다. 화려한 종이 커팅과 역동적 움직임으로 스카프가 패션 아이템 이상의 아트 피스란 사실을 각인시켰다.사람이 키오스크로 대체되는 디지털 시대에 왜 굳이 오프라인을 고집할까 싶겠지만, 하드웨어 컨트롤을 생각하면 납득이 간다. 온라인 매체의 경우 소프트웨어는 창작자 손안에 있지만 하드웨어는 아니다. 원하는 화면 사이즈를 위해 스마트 폰을 새로이 개발할 순 없으니까. 반면, 오프라인 서적은 판형, 제본 방식, 종이와 커버 종류 등 세부 요소를 하나하나 고를 수 있는 데다 편집 디자인이 자유로운 편. 스크롤 몇 번이면 집중력이 끝나버리고 마는 디지털 화면과 달리, 책에는 깊이감이 있다. 무언가를 심도 있게 다루기에 여러모로 책, 아트 북이 유효한 방식이다.


요구 사항이 많은 아트 북은 일반 책보다 제작 방식이 까다로운 편이라 전문 출판사가 따로 있다. 3대 아트 출판사로 불리는 프랑스 ‘애슐린’, 영국 ‘ 파이돈’, 독일 ‘타셴’이 대표적이다. 애슐린은 유독 패션 하우스와의 협업이 잦다. 거쳐 간 브랜드만 해도 샤넬, 디올, 까르띠에, 쇼메, 불가리, 몽블랑. 애슐린에서 아트 북을 만들어야 진정한 하이엔드 브랜드 반열에 올라선다는 우스갯소리마저 있을 정도다. 미술사의 바이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최초로 출간한 파이돈은 클래식하고 유서 깊은 이미지가 강하다. 마지막으로 타셴은 가장 실험적인 아트 북을 만든다. 너무 진보적이란 이유로 출판을 꺼리는 마이너 장르까지 섭렵한다. 20세기에 출판된 책 중 가장 비싼 책과 호크니의 <The Bigger Book>을 펴낸 곳도 타셴이다. 퀄리티 있는 아트 북을 사고 싶다면 이들 출판사를 기준으로 삼으면 된다.


요즘 활발히 생산되는 아티스트 북은 작가가 만든 책 정도로 설명 가능하다. 여기서 ‘만들다’는 작가가 기획·편집한 책과 작품으로서의 책 모두를 의미한다. 18세기, 영국의 화가이자 시인 윌리엄 블레이크가 자신의 그림과 글을 엮은 책이 최초의 아티스트 북으로 추정된다. 자신의 시각 예술과 문학을 하나로 합치길 원했던 그의 니즈와 책이 맞아떨어졌던 것. 작가가 출판 과정의 A to Z를 홀로 컨트롤하는 일은 당시에는 꽤 급진적이었다고 한다. 그래도 블레이크의 방식은 명맥을 이어갔고, 그로부터 아티스트 북은 작가가 독자적으로 출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전적으로 작가에 의해, 작업의 연장선(또는 작업 그 자체)으로 기획한 책이 전통적인 출판 규범과 비평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 그렇기에 아티스트 북은 작가의 입김이 많이 깃든, 아트 북 중에서도 가장 아티스틱한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ISBN(국제표준도서번호)를 벗어 던지고 자유를 택한 것이다.


아티스트 북의 규모는 독립 출판의 성장과 더불어 점점 커지는 중이다. 독립서점이나 페어에 가면, 전보다 작가가 제작한 아트 북이 부쩍 늘었다. 작가들 사이에서 책 만들기가 유행처럼 번지기라도 했을까? 작업하기도 바쁜 작가는 왜 책을 낼까? 드로잉 북 <Piece Pith>를 출간한 정이지 작가는 말한다. “본 작업만으로 해소되지 않는 욕망 때문이 아닐까. 평소 자료 수집과 훈련 차원으로 꾸준히 드로잉을 하는 편이다. 이중 페인팅화되지 않는 그림을 묵혀두기 아쉬워 책으로 엮어냈다. 작품으로 발표하기 어려운 이미지를 소개한다는 면에서 아카이빙이라 볼 수 있지만, 다른 매체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하는 점에선 작업의 일환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쓸모없는 물건은 탈락한다. 만드는 사람에게는 작업이자 작업을 보완해주는 역할이지만, 소비자 입장에서는 또 다르다. 수요가 있어야 공급이 있는 법인데, 그렇다면 보는 사람에게 아트 북은 어떤 쓸모를 지닐까. 우선은 보는 맛. 아름다운 이미지를 우수한 퀄리티로 인쇄한 아트 북은 보는 즐거움이 있다. 원하는 색감이 나오지 않으면 손해를 보더라도 재인쇄를 감행할 정도로 프린트에 진심인 책. 실물 작품과 가장 유사한 이미지를 책 한 권에 응집한 아트 북은 방구석 미술관 그 자체다. 머리 아픈 독서가 필요 없다는 것도 장점이다. 책이 유익한 건 사실이지만, 가끔 쏟아지는 텍스트에 숨이 막힐 때가 있다. 반면 아트 북은 그림책 보듯 감상하면 되니 얼마나 쉬운가. 외서를 사도 부담이 없다.


몇 달 전 업무상 한 디자이너의 집을 방문했다. 누가 보아도 디자이너의 집처럼 잘 꾸며져 있길래, 인테리어 비법을 슬쩍 물었다. “보기 좋은 아트 북은 인테리어 아이템으로도 좋다. 보통 표지 디자인을 상당히 신경 쓴 양장본이라 어디에 두어도 포인트가 되어준다. 큰 고민 없이 선반이나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 그만이다. 적은 비용과 수고로 평범한 인테리어에서 벗어날 수 있어 애용한다.”


머리가 복잡할 때면 책장에서 아트 북을 꺼낸다. 유럽 미술관에 온 것처럼 몽글몽글한 기분을 주는 외서를 주로 본다. 고백하자면, 이 글을 쓰면서 스크랜튼에서 구입한 윌리엄 켄트리지의 드로잉 북을 여러 차례 꺼내 봤다. 도통 기사가 써지질 않아 리프레시 차원에서 펼쳤는데, 역시나! 그림 가득한 페이지를 멍하니 보고 있으니 머리가 맑아지고, 도입부 힌트까지 얻었다. 보면 볼수록 신통방통한 책. 이것이 아트 북이다. 읽을 필요 없이 그저 바라봐도 괜찮은 책. 그것도 내가 원할 때마다 손이 바로 닿는 물건. 이 대목에서 정이지 작가의 대사가 떠오른다. “역시 아트 북의 가장 큰 매력은 원하면 언제든 펼쳐볼 수 있다가 아닐까.” 글 / 이효정(아트라이터)

피처 에디터
전희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