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 마요. 나 지금 진지하니까. 백돌이 유세윤의 괜한 진심.
GQ 라운딩 자주 나가요?
SY 오늘도 뉴코리아 CC 다녀왔어요. 아내 얼굴이 그려진 마지막 골프공을 물에 빠뜨리고 왔네···.
GQ 오늘 타수는요?
SY (수줍게 몸을 움츠린다) 108···.
GQ 몇 달 전 ‘라베’가 117이었는데, 많이 줄었네요.
SY 요즘은 90대도 몇 번 찍었어요.
GQ 오, 정말요?
SY 안성 베네스트 CC에서 ‘라베’ 93 찍었어요. 백돌이들이 라베 찍기 좋은 곳이라고 추천해서 갔거든요. 거기는 옆 홀로 공이 넘어가도 칠 수 있더라고요. 구력이 10년인데 멀리건, 드롭 없이 친게 올해부터예요. 전에는 컨시드로 그냥 넘어간 적도 많았죠. 이제 진짜 제 타수를 알게 됐어요.
GQ 집에 스크린 골프장을 설치한 장동민, 프로 준비하는 유상무를 비롯해 친한 코미디언 모두 실력이 제법이던데요. 독보적 꼴찌인 기분이 어때요?
SY 미안하죠.
GQ 왜요?
SY 함께 필드 나가면 대기하면서 앞팀, 뒤팀 다 보거든요. 같이 치는 멤버의 공이 쭉쭉 시원하게 나가야 게임하는 맛이 나요. 사실 전에는 필드 나가도 웃길 생각만 했어요. 오늘은 무슨 드립 쳐서 SNS에 올릴까? 진지함이 없었죠. 잘 치는 사람이랑 필드 나간 이야기는 무용담이 되지만, 그 반대는 이야깃거리도 안 되죠.
GQ 닭갈비집에서 주걱 들고 스윙 시범, 수상 스포츠하러 가서도 줄창 골프 얘기. 요즘 희극인들 모두 골프에 진심이더군요. 골프 앞에선 웃음 욕심보다 실력 욕심이 앞서는 걸까요?
SY 잘 쳤을 때의 쾌감이 있거든요. 저는 라운딩 나가면 그 손맛을 한두 번쯤 겨우 느끼는데 진짜 잘 치는 사람들은 이 손맛을 매번 느끼는구나, 생각하면 부럽고 분하죠. 공이 시원하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 광경을 보면 스트레스가 촤아아악 날아가는 기분이에요. 공이 휘면 스트레스도 부메랑처럼 꺾여서 돌아오는 느낌이죠.
GQ기억에 남는 스윙이 있어요?
SY 유상무 부부랑 라운딩 나가서 화단 근처에 있는 공을 어프로치로 홀 컵에 바로 넣었어요. 사람들은 버디인 줄 알고 환호했는데 사실 보기였어요.
GQ 많은 사람이 함께 라운딩 나가고 싶은 상대로 유세윤을 뽑아요. 나상욱 프로도 골프 콘텐츠 많이 만들어달라고 댓글 달았더라고요. 세윤 씨가 아주 잘 치게 되면 왠지 섭섭해할지도 몰라요.
SY 한번은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설렁설렁 치는데 잘 치기까지 한다, 그러면 얼마나 멋있을까. 그러려면 연습해야 하는데 원···.
GQ 구력이 10년인데 본격적으로 타수를 줄여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은 언제예요?
SY 어느 날 주변을 보니, 저 빼고 모두 곧잘 치는 거예요. 어쩌다 팀을 짜서 게임을 하면 제가 민폐더라고요. 도망가고 싶었던 게 한두 번이 아니에요.
GQ 필드 위에서 고치고 싶은 버릇이 있어요?
SY 스윙이 자꾸 빨라지고 힘을 잘 못 빼는 것.
GQ 구력이 오래되었다고 늘 잘 치는 것도 아니고, 선수라도 위기 앞에선 장사 없더군요. 코미디와 골프의 유사한 부분을 발견하기도 해요?
SY 완급 조절. 힘 빼고 쳐야 공이 멀리 가는데, 개그도 마찬가지예요. 힘이 잔뜩 들어가면 보는 사람도 불편하게 느껴요. 억지 개그 같죠.
GQ 코미디언 유세윤을 골퍼라고 상상해봤어요. 그렇다면 너무 빨리 싱글을 쳐버린 선수가 아닐까.
SY 으하하하.
GQ 유세윤이 평생을 두고 의식하게 되는 인생의 ‘라베’는 언제일까요?
SY 공개 코미디 하던 시절, 하는 코너마다 인기를 누리던 때가 있었어요. <개그 콘서트>, <코미디 빅리그> 할 때의 저는 굉장히 유연했던 것 같아요. 그때의 내 모습은 다시 볼 수 없을 것 같아요. 만약 지금 무대에 올라간다면 긴장할 것 같아요. 그때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었다면, 지금은 다른 질감이에요. 떨다가 왠지 실수할 것 같아요.
GQ 어떻게 다른데요?
SY 내가 하는 코미디가 트렌디한가? 아직도 감이 살아 있을까? 의구심이 들거든요. 당시는 그런 걱정조차 하지 않았어요. 예술병에 단단히 걸렸죠. <맨 온 더 문>에서 그린 앤디 카우프만처럼 나는 코미디가 아니라 진짜 예술을 하고 있다고 생각 했어요. 나는 니들을 웃기려고 나온 게 아니야, 니들이 웃지 않아도 나는 최고의 코미디를 하고 있어. 이런 ‘병신’ 같은 생각을 했죠.
GQ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왔어요?
SY 그러게나 말이에요. 제 자신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어요. 그때를 떠올리면 이불킥하는 순간도 있는데, 한편으론 아무것도 모르고 내 멋에 빠져 있던 때가 그리워요. 지금은 너무 알아버렸어요.
GQ 골프 하면서 새삼 발견하는 면모도 있어요?
SY 겁이 많아요. 골프에서도 그대로 드러나죠. 스윙을 끝까지 올려서 마무리해야 하는데 자꾸 (어깨보다 조금 높은 정도) 요만큼만 올려서 쳐요.
GQ 공에 멘털이 투영되는 셈이네요.
SY 맞아요. 골프는 굉장히 예민한 운동이라서 힘이 조금만 들어가도 공에 작용을 하더라고요. 오늘도 그랬어요. 같이 치는 사람들에게 잘 보이고 싶었는데, 겉으론 편한 척했지만 결국 들키게 되더라고요. 공은 거짓말을 안 해요.
GQ 필살기 ‘구찌’ 같은 거 있어요?
SY ‘구찌’ 잘 안 하는데 저는 주로 이런 말에 흔들려요. 치기도 전에 “굿 샷!”, “충분히 원온하겠다”.
GQ 망해라가 아니라, 잘하라는 기대가 부담돼요?
SY 그러면 더 힘이 들어가거든요. 아, 누군가 필살기 ‘구찌’ 가르쳐준 적 있어요. 어드레스할 때 “너 공치기 전에 숨 몇 번 쉬는지 알아?” 이 얘기하면 자기도 모르게 숨을 세게 된대요.
GQ 시도해본 적 있어요?
SY 아유, 아니요. 백돌이라서 ‘구찌’ 주면 안 돼요. 데리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여겨야죠.
GQ 최근 라운딩에서 기억에 남은 풍경이 있어요?
SY 어릴 때부터 가장 친한 친구랑 단둘이 야간 라운딩을 나갔어요. 중학교 때 골프를 배우던 친구인데 최근에 다시 시작해서 스코어는 저랑 비슷해요. 백돌이. 어둑어둑할 때부터 같은 잔디를 밟고 필드에 나가 같은 방향의 노을을 보고, 별것도 아닌 이야기를 나누는데 참 좋더라고요. 덜 재밌고 더 행복하다. 요즘 자주 하는 말이에요. 편안했는 지 공도 잘 맞았어요. ‘라베’ 찍은 날이에요.
GQ 서핑도 잘하잖아요. 골프와 비교하면 어때요?
SY 둘 다 혼자의 취미인데, 골프는 묘하게 사람들을 어울리게 하는 무언가가 있어요. 서핑은 철저히 혼자죠. 반강제로 스마트폰을 멀리 두고 멍하니 바다를, 육지를 바라보면서 네다섯 시간을 보내요. 생각의 찌꺼기가 사라지는 느낌이죠.
GQ 요즘도 SNS 지웠다가 깔았다가 반복하나요?
SY 맞아요. 둘러보기를 보다 보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나 지금 왜 이러고 있지? 알고리즘이란 게 저도 모르게 제 내면을 보여줘요. 추한 것, 어두운 것도 다 거기에 있죠. 내 의지로 이것을 이겨보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요.
GQ 그런데 그 의지가 자꾸 지나요?
SY 네. 그런데 이기는 사람 별로 없는 거 같아요.
GQ 이렇게 자신감 없는 사람에게 ‘필드 위의 건달’이란 별명은 어떻게 붙었죠?
SY 어쩌다 한번 잘 치면 건달처럼 으스대서.
GQ 필드 위에서 가장 멋있다고 느끼는 건 뭐예요?
SY 벙커 샷 잘 치는 사람요.
GQ 스스로가 멋있다고 느낀 적도 있어요?
SY 없어요. 친구랑 나갔을 땐 분명 잘 쳤는데···.
GQ 골프는 몰라도, 골프로 웃기는 능력만은 최고가 아닐까 하는데요. 유튜브 해볼 생각은 없어요?
SY 아직은 실력이 안 돼서요. 80대 진입이나 해야···.
GQ 요즘 챙겨 보는 골프 유튜브는 뭐예요?
SY 임진한 프로의 임진한클라스, 홍인규 골프tv 정도요. 못 치는 사람 채널은 안 봐요. 옮을까 봐.
GQ 잘 치게 된다면 채널 이름은 뭘로 지을 거예요?
SY 유세윤의 골프 레슨?
GQ 예전 <지큐> 인터뷰에서 1, 2등도 싫고 3, 4등쯤 하고 싶다고 말했어요. 그 마음 여전해요?
SY 지금도 같아요. 앞쪽에 있는 사람들은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거 같아요. 우리 편이라는 생각도 안 하고요. 중간쯤 있어야 좋은 것 같아요.
GQ 기준의 차이겠지만 유세윤을 1등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여전히 있을 텐데요.
SY 한때는 그렇게 생각한 적도 있지만 그래도 티를 안 냈죠. 그래야 그나마 덜 미워 보이니까.
GQ 골프에서는 어때요?
SY 골프는 아주 잘해도 좋을 거 같아요. 잘하고 싶어요. 골프 잘 치게 되면 겸손할 생각 없어요. 마구 과시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