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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이들의 목소리 – 한지원 감독

2023.11.16김은희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한지원 감독이 9살 때 그린 그림

할머니가 큰 만화책방을 하셨어요. 네모난 소파들이 마주 보고 있고, 벽에 쫙 만화책이 있고, 밤새도록 만화책도 보고 짜장면도 시켜 먹는, 이제는 거의 없는 형태의 클래식한 만화방이었어요. 제가 굉장히 좋아했던 작품은 ‘짱구’. 물론 그때 저는 유치원생이어서 만화방 대부분을 차지한 무협지나 순정만화, <윙크>나 <챔프> 같은 두꺼운 만화잡지 속 이야기보다 <짱구는 못 말려>에 마음이 갔겠지만 ‘짱구’는 지금 봐도 잘 만들었고 그림 자체가 예뻐요. 그 비슷한 거를 그려보려고 스프링 달린 연습장을 샀던 기억이 나요. 엄마 말씀으론 그림은 두 살 때부터 그렸대요. 쌍둥이 언니가 있는데 쌍둥이 둘이 시끄럽게 굴어서 엄마가 크레파스를 주었더니 둘이 조용히 그림을 그리더라고, 그렇게 시작됐다고 하시더라고요.(한지원 감독의 쌍둥이 언니는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한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뭐 하는 사람이야?” 여기저기 묻고 다닌 건 중학생 때 <원령공주>(2003)를 보고 나서였어요. 누군가 관여하면 되게 독특하고 이상하고 멋있는 게 나오는구나. 작가주의적 애니메이션이라는 게 있구나. 그때 처음 알았어요. 그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고 싶다. 애니메이션 감독이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는데 어쨌든 이런 작품이 나오는 데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고 싶다 깊게 생각했어요.

<코피루왁>(2010)

처음으로 완성한 애니메이션은 <기타소녀>(2009) 라는 작품이에요. 습작이라고 해야겠죠. 그러니까, 요즘에는 애니메이션 툴이 많이 보급돼서 미리 경험해보는 분이 많은데 저는 대학교에 가서 처음 접했어요. (한지원 감독의 데뷔작으로 알려진)<코피루왁>(2010)은 2학년 때 작품이고, 그보다 앞서 1학년 때 <기타소녀>를 만들었어요. <기타소녀>가 곧 <코피루왁>으로 확장한 셈인데 밴드부에서 고군분투하면서 로커가 되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 예미가 남자아이 강보에게 같이 록을 하자고 설득하지만 강보는 입시 공부해야 한다며, “너 록 그런 꿈 부질 없어”라고 마치 애어른처럼 그러죠. 그렇게 친구와 갈등하면서 입시 시기를 지나는 이야기예요. <기타소녀>는 강보의 장례식장에서 펼쳐지는 상황만 가지고 만든 거고, 밴드 키스 KISS 멤버들이 관뚜껑을 박차고 나와서 공연하고 그러는 되게 이상한 내용이에요. 제가 고등학생 때 메탈리카 내한 콘서트도 가고 밴드 키스와 해비메탈을 한창 좋아했어요. 그 시기를 압축해서 작품을 만들어보고 싶었어요. 당시 저 스스로는 예미랑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요. 저는 록을 하지는 않았지만 비유하자면 애니메이션이 그런 대상이었죠. 왜 꿈을 포기하지? 꿈을 왜 포기하는 거야? 이런 분노? 그런데 어떤 경우에는 그럴 수밖에 없을 수도 있고, 나도 다르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과도기에 배웠어요. 입시 자체도 좁은 문이지만, 애니메이션 감독이 되는 건 더 좁은 문이고, 너무 많은 부딪힘이 있으니까.

<코피루왁>(2010)

세상에 내보인 저의 첫 애니메이션 <코피루왁>은 제게 좀 복합적인 느낌을 줘요. 연출이 신선하다, 충격적이다 한 굉장한 호평도 기억에 남고, 어떤 포인트에서는 지금 제 개인적으로도 노력하고 있는 부분인데, 당시 저와 정말 친밀한 사람들이 말한 (애니메이션에 대해 함께 이야기 나누고 배웠던) 선배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다던 이야기도 기억에 남아요. 그 부분은 이후 작업 여정에서 싸워나갔죠. 영향 받지 않고 나의 스타일을 찾아나가는 과정으로 만들어가는 기회가 되는 피드백이었어요. 무언가와 닮았다는 이야기는 앞으로도 계속 제가 싸워나가야 하는 주제 같아요. 최근에는 이런 책임감을 많이 느껴요. 예를 들어, 스스로 하루에 몇 번 정도 ‘나는 한국 사람이야’ 자각하세요? 안 하시죠? 그러니까 나는 나잖아요. 한국에 사는, 한국말을 하고, 한국 문화가 디폴트인, 그냥 한국 그 자체잖아요. 그래서 저는 그냥 내가 되는 것, 솔직하게 작품을 바라보는 것, 내가 자연스럽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내가 받은 자동적인 미디어의 영향과 분리하는 것, 이게 고유의 작품이 나오는 방법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예가 있죠. 일본 애니메이션에 자주 나오지만 그건 사실 일본에서만 나올 수 있는 장면인 경우가 있어요. 주인공의 방이 2층에 있는 것. 아무리 좁은 집이라도 “어이! 타다이마(다녀왔습니다)!” 하고 들어와서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 방이 있어요. 놀러 온 친구가 돌아가면 주인공이 2층에서 내다보며 “잘 가” 하죠. 한국에서는 그런 장면이 나올 수 없거든요. 지금 우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서 저 아래 점처럼 보이는 친구한테 “잘 가”라고 하죠. 그런데 제가 <코피루왁> 할 때는 그 영향을 받아서 주인공 방이 2층에 있었어요. 무의식적으로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에서 본 앵글이 계단이 예쁘게 나온 장면들이었고, 그게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와 연출로서 저한테 각인된 거죠. 이런 걸 분리하는 작업들을 하고 있어요. 제가 받은 자동적인 영향에서 분리하고, 무의식적인 영향들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개인으로서의 솔직함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는 것. 굳이 한국인이라는 인식에서라기보다 내가 찾아낸 삶의 경험들과 내 주변 사람들과 나의 시선으로 채우는 것.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딸에게 주는 레시피>(2017)

애니메이션이란 이런 것이구나 깨달음을 준 작업은···, 애니메이션은 지금도 모르겠어요.(웃음) 앞으로 이런 걸 해야겠다, 앞으로 내 애니메이션은 이런 것이겠구나 싶었던 작품은 있어요. <딸에게 주는 레시피>(2017)와 그 이후에 나온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예요. <딸에게 주는 레시피>는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정말 정신없이, 미친 듯이 애니메이션을 막 만들면서 장편 감독을 꿈꿨지만 확 안 되던 답답한 때, 그간의 작업 환경들과 같이 일한 사람들을 다 정리하고 혼자가 된 시기가 있었는데 그 이후에 만든 첫 작품이에요. 공지영 작가님의 에세이가 원작이고, 제게 필요한 메시지들이자 스스로를 치유하기 위한 과정이기도 했는데 내게 필요한 이야기, 내게 울림이 되는 이야기를 어떠한 연출적 타협 없이 생각나는 대로 옮겨본, 처음으로 스스로를 완전히 믿어본 프로젝트였어요. 이래도 되나? 저래도 되나? 그런 것 없이 ‘이게 생각났어? 해!’, ‘이게 생각났어? 해!’ 이런 식이었어요. 뭔가 좋았어요. 많은 분이 굉장히 좋아해주셨고요. 아주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반응의 크기와 상관없이 제가 그 반응의 결을 느끼거든요. 솔직하게 한 작품에 대한 반응들에서 엄청난 긍정적인 느낌들을 받아요. 아무리 큰 프로젝트가 와도 이 마음을 잃으면 안 되겠다, 그런 계기가 됐어요.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

그다음에 한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는 <딸에게 주는 레시피>를 하기 전에 몇 년 동안 힘들었던 그 시기를 정리한 단편이에요. 메시지적으로나 애니메이션 감독으로서 살아가는 자세를 많이 고민했어요. 그간 제 삶의 어떤 시기를 압축해서 단편을 만들곤 했는데,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는 아주 오랫동안의 방황 끝에 오랜만에, 십몇 년 만에 다 시 만들어본 저의 오리지널 단편이에요. 생각만 하면 뭐든지 뿅 가질 수 있는 엄청난 마법을 쓸 줄 아는데 그 마법을 잃어버린 여자 이야기예요. 왜 마법을 잃어버렸냐면 생각을 떠올릴 수 없게 돼서. 마법은 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원하는 걸 떠올리지 못하게 된 거죠. 자신이 잊어버린 게 무엇인지 찾는 내용이에요. 맞아요. 저와 맞닿아 있는 이야기예요. 저도 하고 싶은 걸 떠올리지 못하게 된 적이 있었어요. 지금은 다시 그걸 찾았고. 앞으로도 계속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야겠다, 이런 방향성으로 가면 되겠구나, 많은 의미와 성취감을 준 작품이에요.

애니메이션은 창작자 차원에서도, 육성하는 차원에서도 인내심이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한 편의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데 3년, 4년, 5년 걸리는 게 기본인데 어떤 지원 사업은 “1년 안에 완성해서 제출하세요”라고 해요. 하루에 애니메이션을 몇 초나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해보면, 우리가 보는 움직이는 1초를 만들기 위해 10장의 그림이 들어간다 치면(애니메이션 1초에 평균 24에서 12 프레임이다.), 러프하게 10장을 그린 다음, 깨끗하게 다시 10장을 그리고, 그 10장을 채색하고, 배경을 그리고, 그걸 합치고···, 실상 며칠이 걸리는 거죠. 이 방법은 AI처럼 대체할 수 있는 수단이 나오면 분명히 대체가 될 거예요. 그런데 아직까지는 AI가 미야자키 하야오처럼 작화를 못 하기 때문에.(웃음) 우리가 하는 대부분의 일이 한 땀 한 땀 하는 것이고, 그 한 땀 한 땀 안에 창의적인 선택들이 들어가서 그 작품의 고유성을 만든다고 생각해요. 그러려고 예술을 하는 것이기도 하고. 예술이라는 것 자체가 ‘이마아안큼’의 노동력을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들여줘서 내가 편하게 보는 게 묘미잖아요. 작화 한 장, 한 장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정말 달라지거든요. 그런 다름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희열이에요. 애니메이션이 가진 이 독특한 부분에 대한 이해도가 널리 퍼졌으면 좋겠다 싶은데, 그걸 널리 퍼뜨리려면 창작자들 역시 정말 좋은 작품을 많이 보여줘서 ‘이런 것이 더 잘되면 어떨까?’ 같이 상상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이 별에 필요한>(공개 예정)

지금은 <이 별에 필요한>(공개 예정)이라는 작품에 몰입하고 있어요.(넷플릭스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애니메이션 영화다. 우주인 난영과 뮤지션 제이의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의 롱디 로맨스’로, 배우 김태리와 홍경이 목소리 캐스팅됐다.) 저의 첫 창작 장편 애니메이션이기도 하고, 감독으로서 또 한 번 배워나가는 중요한 관문이기도 하고, 욕심이 너무 많은데 작업 기간은 한정돼 있고, 너무 어려워요. 작품을 하는 과정이 힘들지 않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긴 해요. 매 작품을 할 때마다 이보다 더 힘든 건 없을 거라는 생각의 연속이에요. 이번 작품에서는 밸런스를 찾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완성도를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효율적으로 해낼 수 있을까 매일매일 고민이에요.

스태프 채용 공고 보셨구나, 네. 다른 것보다 저희 프로젝트와 결이 맞는 게 중요해요. 저희 콘셉트 디자인이 SF·미래인데, SF 디자인이라 하면 자동적으로 갖다 붙이게 되는 기믹 같은 것들이 있어요. 그런 걸 쓰지 않고 하다못해 길거리를 지나가다 마주치는 힙한 카페에서 길러오든, 미술 전시회에서 본 현대 미술 작품에서든, 정형화된 것이 아닌 미감과 동시대성을 흥미로워하는 대상에게 항상 더 마음이 가요. 우리가 보는 미래적인 순간들이라고 해야 할까요?

한지원 |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시절 완성한 단편 모음집 <생각보다 맑은>(2015)이 극장 개봉하며 최연소 극장 애니메이션 감독 타이틀과 함께 데뷔했다. 신작 단편 <마법이 돌아오는 날의 바다>(2022)로 선댄스 영화제, 팜스프링스 국제 영화제 등 유수 영화제에 초청돼 해외 상영 중이다. 현재는 넷플릭스가 한국에서 처음으로 선보이는 애니메이션 영화 <이 별에 필요한>을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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