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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률 “사랑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2023.12.27김은희

순간을 모아, 애정. 장률의 전부.

퍼 재킷, 김서룡. 네크리스, 스와로브스키. 링, 톰우드. 브레이슬릿, 돌체&가바나. 슈즈, 크리스찬 루부탱. 팬츠, 벨트는 모두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마지막으로 통화한 동료는 누구인가요?
CR 이학주 배우가 기억나네요. 학주 배우가 작품 <연인> 촬영 마무리해서 너무 고생했다고 얘기 전하고 소소한 이야기들 서로 나누고 그랬어요. 보현이도 <정신병동에도 아침이 와요> 봤다고 잠깐 통화하고, 그렇게요.
GQ 특히 이런 일이나 촬영 앞두고 주변 사람과 자주 통화하는 것 같아서요.
CR 맞아요. 친구들하고 같이 작업할 때 진짜 제가 제일 자주 전화하죠. 무슨 생각하고 있냐. 요즘 작업 잘 되고 있냐. 특히 작업하면서 그런 얘기들하면 서로 한테 힘이 많이 되는 것 같아요. <마이네임>할 때는 안보현, 박희순 배우께 전화하면서 불안함을, 어떻게든 저의 불안함들을 계속 얘기드리곤 했어요.
GQ 그게 긴장을 푸는 방식인가 봐요. 대화를 나누면서, 속을 끄집어내면서.
CR 그러니까 항상 그런 생각은 하는 것 같아요. 일단 저도 제 안에서 어떤 여러 각도로 이 인물을, 작품을 생각하곤 하는데 거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서, 다른 사람들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는지 들으면 ‘이런 각도로도 볼 수 있구나’ 생각하게 돼요. 그러면서 인물의 입체성을 조금 찾아가는 것 같아요. 조금 더 직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래서 많이 물어봐요.

셔츠, 타이, 팬츠, 벨트, 모두 보테가 베네타.

GQ 최근에는 무엇을 물어봤어요?
CR 지금 <춘화연애담>이라는 작업을 하고 있어서 감독님하고 얘기했던 순간들이 떠오르는데, 회상 장면이 있어요. 플래시백 장면에서 이 인물의 눈빛이나 표정이 좀 부드러우면 어떨까 싶었어요. 처음에 대본 읽을 때는 이 인물이 나쁜 캐릭터는 아니지만 눈빛이 굉장히 살벌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러면 회상 때는 오히려 부드러울 수도 있겠는데?’ 싶어서 감독님한테 여쭤 봤죠. “감독님, 부드럽게 해볼까요, 아니면 좀 못된 눈빛이 나오면 좋을까요?” 그랬더니 “살벌한 게 좀 더 어울릴 것 같다” 그러시더라고요. 감독님은 편집점이나 여러 부분을 생각하고 계실 거잖아요. 그런 디테일에 대해 얘기하는 편이죠. 즉각적으로 우리가 탁 캐치해야 하니까. 그런데 그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러니까 저는 부드러운 최환의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생각까지 도달했다 보니까, 부드러움과 날카롭게 살벌한 느낌이 믹스되는 순간이 생기더라고요. 그런 순간이 대화를 나누며 참 제가 도움을 많이 받는 부분이에요.
GQ 답을 정해놓고 질문을 던지는 고집쟁이는 아니군요.
CR 옛날에, 20대 때는 좀 더 고집스러운 부분도 많았던 것 같아요. 연습을 그만큼 많이 하고 준비를 많이 하다 보니까. 그런데 이게, 말씀드렸다시피 한계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데 그 한계는 또 다른 가능성으로 넘어가는 어떤 척도이기도 한 것 같거든요.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이를 탁 넘어가는 순간이 실은 주변 사람들, 함께하는 사람들의 의견에 귀 기울일 때이고, 그때 제가 또. 다른 가능성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이 점점 많이 들어요. 예전에는 ‘어떻게든 내가 준비한 걸 보여줘야지’가 강했다면 지금은 그보다는 준비하는 건 내가 하는거고 현장에서 사람들과 함께하는 건 새로운 순간을, 새로운 빛나는 순간을 함께 만들어가는 작업이니까 그렇게 하고 싶어요. 나이가 많이 들어도 “어떻게 해야 돼?” 계속 물어보고 싶어요.
GQ 그래서 장률씨의 대화 상대들이 다 그런 이야기를 하나봐요.
CR (눈이 동그래지며) 뭐라고 하시는데요?
GQ 잘하면서 엄살부린다고.
CR 하하하하하. 이게, 배우들은 카메라가 돌아가고 촬영하는 그 직전까지도 누구나 불안함이 있는 것 같아요. 내가 준비한 것이 과연 사람들을 설득해낼수 있을까? 최종적으로는 관객을 설득해야 하는 일이니까. 그 불안함들을 계속 소통하다 보니까 가끔은 상대 배우들을 피곤하게 하나 싶기도···. 그런데 저는 함께하는 배우들이랑 연기 얘기할 때 너무 행복해요. 그게 좋아요. 왠지 모르겠어요. 연기 얘기할 때 제가 말을 잘하는 것 같아요. 계속 얘기해요. 즐거워요.

코트, 돌체&가바나. 팬츠, 아미리. 슈즈는 스타일리스트의 것.

GQ 스스로 낯가리는 성격이라고 하죠?
CR 낯가려요. 어떤 경우에 가리냐면, 그러니까 이렇게 일대일로 만나면 잘해요.
GQ 어쩐지. 이것 역시 엄살이라고 생각했어요. 낯 하나도 안 가리는 것 같은데.
CR 맞아요, 하하하하. 일대일, 이런 소수에는 강해요. 다수···, 예를 들면 작품을 시작하면 스태프도 많고 배우도 많잖아요. 그런 상황에서는 말을 잘 못 하겠어요.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다들 잘해요. 그러다 보니까 많은 사람과 친해지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리는 듯해요. 천천히 이렇게 한 명 한 명 만나면서 친해져요.
GQ 낯가림을 해제시키는 장률 씨의 코드는 무엇인가요?
CR “어떻게 연기를 하게 됐어요?” 이런 얘기. “촬영 감독님은 어떻게 하다가 촬영을 시작하게 되셨어요?” 이런 얘기. 말 그대로 ‘어떻게 살아왔는가?’, 저는 그게 궁금해요. 그래서 항상 어떻게 이 일을 시작하게 됐는지, 어떤 과정이 있었는지, 힘든 순간은 언제였는지, 사람마다 사연이 있을 것이고 저는 그 사연이 너무 궁금해요. 가끔은 제가 사회자가 되기도 해요. 잘 듣고 싶어요. 저도 저만의 연기를 시작한 계기, 과정, 힘든 순간, 좋았던 순간, 그런 시간을 보내온 배우라서 더 그런 것들이 궁금한가 봐요.
GQ 혹시 상상을 잘하는 편인가요?
CR 상상, 그렇죠. 인물을 그릴 때 상상력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GQ 그럼 우리 상상 좀 해볼까요? 장률 씨가 마을을 만든다면 어떤 모습일까요?
CR 저는 예전부터 그런 게 있었어요. 사람들이 치유할 수 있게 돕고 싶다는 꿈. 그래서 치유의 마을이었으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와서 마음의 휴식을 취한다든지, 함께 노래를 부를 수도 있고, 몸을 다친 사람이 있다면 의사분들이 계셔서 정말 치료해줄 수 있는. 그래서 다음 여정을 떠나게 해줄 수 있는 마을.

톱, 아크네 스튜디오.

GQ 그곳에서 장률 씨의 역할은요?
CR 저는 대화하는 거 수다떠는 거 좋아하니까, 여행을 하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힘들었던 순간을 다 들어주고 싶어요. 해결책을 제시한다기보다 들어주고 싶어요. 낯선 곳에 왔는데 누군가 내 얘기를 들어준다면 너무나 좋을 것 같아요. “어디 여행하셨어요? 나는 여기 여행했는데 이런 이런 느낌이 있었어요. 거기에는 뭐가 있나요?” 하면서.
GQ 정말 상상을 잘하시네요. 이게 무슨 허무맹랑한 이야기야, 할 수도 있을 텐데.
CR 잘해요, 저? 순간 떠올랐어요. 그렇게 대화 나눌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GQ 왜 마을 타령하나 싶죠? 장률 씨 연기 시작점이 <우리 읍내>라고 알아서요.
CR 그래서! 맞아요, 맞아요.
GQ “어떻게 연기를 시작하게 됐어요?”라는 질문을 자주 던진다고 했는데, 그간 인터뷰에서 장률 씨는 연기를 할 때마다 그때가 자꾸 생각난다고 하더군요.
CR 그때가 생각이 나요, 이상하게. 저한테는 첫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이 일에 대한 어떤 감정을 느꼈던. 운 좋게 제가 조지라는 역할을 맡았는데 조지라는 아이가 태어나서, 쭉 커서, 옆집의 에밀리라는 사랑하는 친구와 결혼까지 하게 되고, 와중에 누군가 돌아가시기도 하는 그런 일생을 그리는 따뜻한 얘기죠. 그때가 왜 이렇게 생생한지 모르겠어요. 뭔가 컨트롤이 잘 안 됐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열일곱여덟 살 때니까 찾아오는 감정들을 그대로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거죠. 슬픔이 찾아오면 슬프고, 기쁨이면 너무 기쁘고. 모든 신경이 다 깨어났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제가 서른네 살이니까 ‘어떤 세월을 살아냈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을 떠난다면 이런 슬픔이겠다’ 생각할 텐데,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니까 연습할 때는 그냥 우는 척하는 거죠. 그런데 무대에서는 왜 그렇게 슬프던지. 커튼콜도 계속 으으으 울면서 마치고 난 다음에 이런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건 정말 행복하다, 계속 이 일을 하고 싶다, 연기를 딱 처음 사랑하게 된 순간이었던 것 같아요. 네, 그랬어요.

블랙 롱 스팽글 셔츠, 스팽글 팬츠, 모두 아미리. 네크리스, 스와로브스키.

GQ <우리 읍내>를 요약한 한 문장은 이렇더라고요. “극적인 사건이 벌어질 일 없는 평범한 마을 속 사람들의 삶과 죽음을 그린 이야기”. 이를 통해 열일곱에 연기와 사랑에 빠진 장률이 지금 다시 이 이야기를 떠올려보면요?
CR 너무 하고 싶다. 이 작품으로 관객을 만나는 순간을 언젠가는 다시 해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보다 제가 하고 싶다고 말하는 이유는, 추억하고 싶어요. 그때의 느낌을. 아마 그렇게 연기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지금은 나이와 경험이 있다보니까 기술적으로 어떤 더 좋은 연기를 탐구해나갈 테지만, 그때만큼 순수함을 가지고 이 작품에 뛰어드는 느낌은···, 그때는 사실 제가 순수하려고 한 게 아니잖아요. 그때는 그냥 순수했기 때문에 자연스러웠던 거죠. 다만 지금도 개인적으로 일상을 보낼 때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않고 매순간이 소중하다고 생각하고 살아가고 싶어요. 어떤 만남도, 아무리 짧게 만나는 사람도. ‘TMI’인데 영화 <어바웃 타임> 좋아하거든요. 영화 맨 마지막 장면이 카페에서 주문을 하는데 카페 사람과 아이 콘택트하면서 오늘 좋은 하루 보내라, 이런 대화를 나누는 걸로 기억해요. 그런 사랑이 있는 삶을 살아가고 싶어요.
GQ 생각나요. 그 전에는 주인공이 사는 게 바빠서 직원과 눈도 안 마주치고 바삐 커피만 가지고 나가다가 일상의 소중함을 느끼곤 순간에 집중하잖아요.
CR 맞아요. 그렇게 살아가고 싶어요. 일만 생각하고 살아가다 보면 확 매몰되는 순간이 있는 것 같더라고요, 자신한테. 그런데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같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런 에너지를 느끼면서 살아가고 싶어요. 제가 그걸 좀 잘해요. 집 앞 편의점 사장님이랑 얘기 나누고 그런. 순간 순간 나눠서 대화하는 거 좋아해요. “사장님, 장사 잘되죠?” 일대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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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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