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내고 42.195km를 뛰는 사람들의 심리는 뭘까? 차도 있는데 굳이 달려서 서울 반 바퀴를 도는 이유.

러닝이 유행인 게 실감이 난다. 집에서 게임하는 게 낙이던 친구들도 뛰기 시작했다. 새벽 2시까지 술 마시던 놈이 갑자기 러닝화를 사고, 탄수화물 끊고, 가민 시계를 찬다. SNS에 러닝 관련 릴스를 만들어서 올리기까지. 솔직히 처음엔 어이없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10여 년 전에 이렇게 달리기를 시작한 내 생각이 나서. 이 친구가 얼마나 진심인지도 느껴져서. 나도 마라톤을 뛰었다. 10번은 족히 넘었고, 한때는 트레일러닝에 빠져 장거리를 뛰고 이산 저산을 옮겨 다녔다. 요즘은 의욕이 많이 꺾여서 10km 대회만 가끔 뛴다.
잃어버린 방향
마라톤 당일, 출발선 분위기는 묘하다. 새벽 공기는 축축하고 사람들은 쓸데없이 진지하다. 신발 끈을 고쳐묶고 젤을 까먹고 테이핑을 붙인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장면이다. 너도나도 앞다퉈 “한계를 넘겠다”며 돈까지 내고 42km를 뛰다니.
왜일까. 예전에는 삶이 단순했다. 대학 가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 키우고, 집 사고. 그게 인생의 낙이었다. 힘들고 팍팍한 인생이었지만 적어도 방향은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평생직장은 사라졌고 집값은 잡을 수 없이 폭등했다. 연애도 결혼도 확신이 없다. 열심히 살아도 뭐가 남는지 모르겠다. 목표가 흐릿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스스로 고통을 만든다. 아주 명확하고 단순한 목표를 위해. ‘42.195km 완주’ 얼마나 아름다운 문장인가. 애매하지 않다. 뛰다가 토하든 절뚝이든 결승선만 넘으면 된다. 인생은 복잡한데 마라톤은 명쾌하다.
실제로 뛰어보면 몸이 망가지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느껴진다. 25km쯤부터는 무릎이 삐걱거린다. 30km를 넘기면 발톱은 뽑힐 것 같고, 허벅지는 돌덩이가 된다. 배도 고파 미치겠다. 러너스 하이?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지금 이걸 왜 하고 있지?’라는 러너스 현타가 온다. 땀인지 눈물인지 모를 액체가 얼굴에 흐르고, 길바닥에 주저앉고 싶은 충동이 수십 번 온다.

삶의 잡음이 꺼지는 순간
우리는 평소에 진짜 고통을 느낄 일이 별로 없다. 불안은 많다. 스트레스도 많다. 그런데 대부분 흐릿하다. 월요일 회의, 읽씹당한 카톡, 통장 잔고, 미래 걱정. 현대인의 괴로움은 대체로 추상적이다. 반면 마라톤은 다르다. 지금 내 폐가 터질 것 같은지, 허벅지가 버티는지가 더 중요하다. 고통이 지나치게 구체적이다. 그러니까 오히려 머리가 조용해진다. 삶의 잡음이 꺼진다.
사람들이 달리는 이유
SNS에서는 다들 행복한 척하지만 실제로는 방향을 잃은 사람이 많다. 그러니까 저녁 7시에 한강으로 나간다. 숨이 턱끝까지 차오르는 순간만큼은 살아 있다는 감각이 분명해지니까. 어떤 사람은 명품을 사고, 어떤 사람은 클럽에 가고, 어떤 사람은 주식을 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새벽에 10km를 뛴다. 방법만 다를 뿐 결국 다 같은 이야기다. ‘나 아직 살아 있다’는 감각을 찾으려는 몸부림.
결국 완주했다. 기록은 처참했다. 몇 번은 거의 폐인처럼 들어왔다. 며칠은 다리가 아파서 계단도 제대로 못 내려갔고, 고래를 잡은 초등학생처럼 엉성하게 걸었다. 그런데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진짜 오랜만에 뭔가를 끝냈다는 느낌.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스펙 한 줄 추가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끝까지 버텼다는 사실이 이상하게 사람을 울컥하게 만든다.

인생이 바뀌냐고?
글쎄. 마라톤을 뛰었다고 갑자기 일론 머스크처럼 성공하는 건 아니다. 통장에 돈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없던 여자 친구가 생기는 것도 아니다. 다음 날 출근하면 여전히 팀장은 잔소리를 하고 메신저는 터진다. 그런데 한 가지는 변한다. “나는 끝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이다”라는 감각. 그건 생각보다 꽤 오래 남는다. 어쩌면 사람들이 마라톤에 인생을 거는 이유는 단순하다. 너무 많은 것이 불확실한 시대라서. 그 와중에 유일하게 확실한 건 자기 다리로 결승선을 넘는 순간뿐이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