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가수는 입을 다무네

2010.09.01장우철

가수는 많다. 노래도 지천이다. 그런데 가수가 가수로 보이지 않는다. 노래가 노래로 들리지 않는다.

얼마 전 MBC <뉴스데스크>는 ‘5초 가수 수두룩’이라는 도발적인 뉴스 한 꼭지를 전했다. 내용인즉, 멤버가 여럿인 아이돌 그룹의 경우에 한 명이 한 곡에서 입 벌려 노래하는 시간이 (다같이 부르는 부분을 제외하면) 급기야 5초에 불과하다는 지적이었다. 공중파 뉴스에서 분석해 다루기로는 이례적인 이슈였는데, 마침 논란은 인터넷으로 번졌다. 노래 못하는 가수도 가수냐는 식의 말이 주를 이뤘다. 누가 누구보다 잘 부른다, 말도 안 된다, 아무개가 가수라면 차라리 내가 가수다…. 논란은 흐지부지되었다. 노래를, 누가 잘하고 누가 못하나로 따지면 결국 하나마나 한 소리가 될 수밖에 없다. 자기 취향을 떠벌이는 재미 말고는 아무런 알맹이가 없는 번다한 얘기판. <뉴스데스크>가 촉발시킨 ‘5초 가수’논란도 그 수순을 밟고 말았다.

<뉴스데스크>의 지적이 ‘왜 노래가 줄어들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면 어땠을까? 그건 전혀 다른 얘긴데 말이다. 노래라는 형식 자체가 대중음악판에서 점점 그 비중을 줄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 노래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발표되는 노래의 물리적인 수가 줄어드는 것이 열악한 시장성에 관한 문제라면, 한 곡의 노래에서 가수의 목소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한국 대중음악 자체의 변화다. 단적인 예로 요즘 유행하는 이런저런 노래를 반주 없이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익숙한 그 노래로 들리지 않을 것이다. 박자를 맞추려 박수를 쳐도, 노래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서로가 안 맞아 엉킬 것이다. 우리가 요즘 듣는 노래는 가수의 입을 통한 가창만이 아니라 연주와 효과음과 심지어 무대연출까지 모두를 포함하고 있는 형태다. 한 소절이 끝나고 다음 소절로 이어지는 관계에서 응당 그러해야 했던 자연스런 흐름은 더 이상 노래의 불가결한 요소가 아니다. 뒤틀리고, 변주되고, 엇나가고, 쉬었다 가고, 아예 돌아서버린다. 그래도 한 곡의 노래가 된다. “그게흐름이에요. 뭔가 획기적인 거, 강한 거, 새로운 걸 원해요. 대중도 그렇고 가수도 그렇고 기획사도 그래요. 귀가 번쩍하는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후크 송이든 뭐든 크게 상관없죠. 전체적인 노래로서의 완결성 보다는 그런 요소요소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죠. 작곡가 입장에서는 오히려 좀 편한 구석도 있어요.” 유명 작곡가 B가 말한다. “다 필요 없고 아이디어 하나만 좋으면 운 좋게 뚝딱 해먹을 수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요.”

가수의 목소리가 점점 악기 중 하나의 역할로 변하고 있다. 보코더니 오토튠이니 하는 방식으로 로봇처럼 변조된 목소리가 댄스뮤직에 널리 사용되는 것을 그런 흐름의 본격적인 시작으로 볼 수 있다. (모자란 가창력을 숨기는 용도로도 막중한 임무가 있다지만.) 통상 한 곡의 노래는 반주 부분과 노래 부분으로 가를 수 있지만, 딱히 구분이 불필요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얘기가 가능하다. 어떤 가수가 한 노래에서 5초 밖에 부르지 않는 것은 가창력 문제와 별개로 그 가수의 목소리가 5초 정도 필요하다는 얘기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가수는 가수지만 어쩐지 가수라고 부르긴 뭣한 이름들이 무대에 가득하다. 조용필이나 이은하에겐 자연스럽게 붙는 가수라는 말을, 소녀시대나 엠블랙에 붙이려면 어색해지는 것이다. 가수가 아닌 것도 아닌데.

노래가 달라졌다. 당연히 가수도 달라졌다. 가수가 무대에서 선보이는 건 하나로 통합된 여럿이다. 요즘의 좋은 가수란 노래를 매개로 그 무대를 통해 즐길 만한 좋은 것을 주는 사람이다. 태양은 그런 점에서 요즘의 좋은 가수 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의 무대는, 처음 보는 진지한 것으로 채워져 있다. 고유한 장르로서의 해석과 어떤 새로움에 대한 기대에 동시대적이면서도 세련된 경험을 보여준다. 그런데 한 가지 여백이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노래를 모두 부르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태양의 최근 히트곡 ‘I Need a Girl’무대를 보면, 그가 라이브로 직접 가창하는 부분과 미리 그의 목소리로 녹음한 코러스가 교차하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그것은 우선 무대에서의 활동적인 퍼포먼스를 위한 지혜로운 방식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지금 한 곡의 노래는 이미 가수가 노래로만은 전담할 수 없는 규모가 되었다는 예도 된다. 이것이 기존의 립싱크 논란을 돌파하는 진취적인 방안인지에 관해서는 다른 관점에서 생각해야겠지만, 지금 한 곡의 노래에서 가수의 가창이 차지하는 역할을 생각한다면, 분명 앞서나간 결과물이다.

‘이런’상황에서, 좋은 가수를 판단하는 기준으로 ‘가창력’만을 따지는 건 착오며 열등한 방법이 아닐까? ‘누가 뭐래도 가수가 노래를 잘해야 가수지’라는 말은 백 번 천번 옳을지언정, 백 번 천 번 모두 정확한 쓰임을 담보하진 못한다. 걸핏하면 ‘아무개 MR 제거’라는 말이 검색어 상위에 오른다. 한 가수의 라이브 무대에서 반주며 코러스며 여러 상황은 쏙 빼고 목소리만 듣는 것이다. 흥미로운 오락 아이템이다. 궁금하니까. 자극적이니까. 하지만 자체로 폭력적이다. 그리고 고스란히 덫이 된다. 최근 손담비의 ‘퀸’ MR 제거 파일이 인터넷을 달궜을 때, 그 파일을 통해 우리가 확인한 건 뭘까? 손담비의 가창력이 부족하다며 지적하는 일종의 쾌감? 무엇인들 가능하지 않은 게 없겠지만, 그건 개인적인 감상으로 한정시킬 일이다. 손담비라는 가수의 가치가 어떻게 가창력으로 평가될 수 있을까? 지금 손담비라는 이름의 가치나 이미지가 노래를 잘해서 만들어진 ‘손담비’일까? 손담비는 노래를 못해도 된다는 얘기가 아니다. 대중음악이 기술과 내용으로 발전하는 만큼 청자의 태도도 다채롭게 진보하는 것이 옳다.

한편 이 얘기는, 요즘 노래는 도대체 들을 게 없다는 식의 수구적 우격다짐과 통하는 부분이 있다. 주류 대중음악의 흐름이 점점 가수의 목소리에 기대지 않는 쪽으로 가고 있음을 이해하는 것과 별도로, 무대에서 점점 ‘절창’을 만나는 일이 사라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 때문이다. 노래하지 않는 가수가 늘어난다. 그나마 무대에 있는 가수도 점점 입을 다문다. 대신 넋놓고 보는 무대와 귓속을 꽉 채우는 소리의 향연이 넘친다. 선택해야 한다면 결국 스스로 음악을 찾을 일이다. 마땅히 좋은 청자가 있는데, 어떤 가수가 노래하지 않을 수 있을까?

    에디터
    장우철
    스탭
    일러스트레이션/김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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