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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방의 여자

2011.04.04유지성

옆방엔 여자가 있었다. 아침엔, 두 번째 상상을 했다.

테헤란로에선 손바닥으로 비를 가렸다. 첫 봄비였다. 얇은 면 재킷이 울코트만큼 무거워질 때까지 불이 켜진 모텔은 없었다. 강을 건너야 했다. 보조석에서 어깨를 터는 여자의 팔목을 꾹 잡았을 때, 손가락 사이로 스르륵 물이 빠져나왔다.

공들여 글씨를 양각한 건물은 하나같이 창문만 밝았다. 잘 사람은 자고, 두 번 할 사람은 또 하고, 나갈 사람에겐 아직 이른, 새벽 5시. ‘무드등’을 켜놓은 방에선 그림자가 새어나왔다. 업, 다운, 업, 다운. 업, 업, 업. 그러고 보니 소리도 좀 들리는 것 같았다. 음미사와 코아아트홀이 없어진 이후로 종로엔 잘 가지 않았다. 등 꼿꼿이 세우고 기껏 <로드무비>나 <나쁜 교육>같은 걸 봐놓고, 또 비디오방에 가서 <4월 이야기>를 빌리곤 했다. 그게 제일 짧아서였다. 오럴 섹스 같은 건 모를 나이였으니까, 48분 정도면 충분했다.

“삼만원입니다.”

간판에 내 천川자가 그려진, 방이 열 개나 될까 싶은 모텔은 오르막길 끝에 있었다. 차 번호판은 대개 가려져 있었다. 크고 검은 차일수록 더욱 그랬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엘리제를 위하여’가 단선율로 흘렀다. 별 인사 같은 것도 없이, 각도계 모양으로 파인 구멍에서 덜렁 열쇠가 나왔다. 하모니카 길이의 얇은 플라스틱에 키가 대롱대롱. 모텔 등급에 무궁화나 별 같은 건 없겠지만, 카운터의 모양은 방 안을 가늠하는 데 꽤 도움이 됐다. 호텔 프론트처럼 수트까지 차려입고 90도로 인사를 하는 곳엔, 최소한 벽걸이 TV 정도는 걸려 있었다. ‘스위트룸’에선, 풀장이며 스팀사우나 같은 것도 ‘인테리어’였다.

카드를 찍지 않고 열쇠를 돌리는 곳은 오랜만이었다. 다행히 좁거나 지저분하진 않았다. 다만, 처음 보는 기괴한 풍경이었다. 갓 쓰고 말을 타고 달리다 코너를 돌면 최신형 콜라 자판기가 있다는, 민속촌이 이런 모습이겠지. ‘칼라 테레비’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 같은 20인치 TV 위엔 안테나가 삐죽 솟아 있었다. 정직하게 네모난 상아색 테이블과 의자는 이케아IKEA에서 샀나? 천장엔 초가집 방문같이 나무틀에 창호지를 발라놓은 장식품이 붙어 있었는데, 칸칸마다 종이의 장력이 전부 다 제각각이라 빗살이 제멋대로 휘어 있었다. 휴, 내가 연을 만들어도 저거보단 잘 만들겠다.

“이런 날 어쩜 다들 집에도 안 가는지. 여긴 또 어떻게 알았어요?”
미간을 찌푸린 여자가 좌우로 고개를 돌릴 때마다 물방울이 튕겼다. 오늘의 섹스는 험난할지도 모른다.

“먼저 씻어요.”

두 시간 전에 처음 만난 여자였다. 모텔끼리 공동구매를 하는 게 아닌가 싶은 ‘W’ 모양의 나무 옷걸이에 재킷을 걸자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젖은 스타킹은 꼬깃꼬깃 말려 순대처럼 바닥을 굴렀다. 샤워기와 동시에 TV를 켰다. TV에선 아침 날씨가 한창이었다. 일요일의 기상캐스터는 평일보다 좀 더 느긋하다. 서울, 부산, 광주, 제주를 훑는 동안 물소리는 점점 높아졌다. 이런, 세수는 하지 말라는 당부를 빼먹었다. 제아무리 머리가 젖은 여자가 흰 셔츠를(만) 입고 까만 스타킹을 신어도, 그러니까 온갖 ‘판타지’를 충족시켜도 화장이 지워진 얼굴엔 별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사랑하면 눈곱에 귓밥까지도 예뻐 보인다는 말 같은 건 대체 누가 하고 다니는 걸까.

여자는 오래 씻었다. 누워 있다간 자칫하면 잠들겠다는 생각에, 허리를 뒤로 붙여 침대 머리맡에 등을 기댔다. 철컥, 문 열리는 소리. 옆방에 사람이 들어왔다. 모텔 방을 배정하는 순서는 잘 모르지만, 아마도 방금 들어간 손님의 바로 옆방을 내준다는 건, 방이 거의 다 찼다는 말일 것이다. 여전히 창문 밖으론 빗방울이 떨어졌다. 갑자기 따뜻해진 날씨에, 주말 밤은 그냥 넘기기 어려운 유혹이었을 테다. 비 오늘 날, 소주는 보통 때보다 더 잘 팔렸겠지. 방이 없는 게 당연했다.

옷이며 가방 같은 게 털썩털썩 떨어지더니, 금세 두툼한 이불이 펄럭 날개를 펴는 소리가 들렸다. 급하군. 둘 다 고주망태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씻고 자시고 할 채신머리는 술집에 놔두고 왔을까? 그렇게 잠자코 있자니 목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목소리는 가라앉는 빗소리보다 무거워, 침대 아래로 파고들었다. 몸을 낮춰봤지만, 음성보단 음파에 가까운 진동이었다. 무슨 말인지 하나도 안 들렸다. 여자를 설득하는 걸까? 조심스러운 의문문의 리듬으로 매트리스가 통통거렸다.

앙칼진 여자의 목소리가 들린 건 그때쯤이었다.
“오빠, 조금만 있다 하자, 잠깐만, 잠깐만.”
“옆방에 다 들려, 쉿, 쉬잇.”

남자의 목소리 톤이 올라가, 처음으로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여행에서 ‘실패’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있었다. 일부러 차를 놓치고 우격다짐으로 방을 잡았다가, 따귀를 맞을 뻔했다는 식이였다. 그러나 여긴 시내 한가운데 싸구려 모텔이다. 로맨티시즘 같은 건 진작에 거세된 장소. 오래된 연인이라면 꼭 오늘일 필요도 없을 텐데, 처음이라면 오늘 같은 날엔 집에 데려다주고 다음을 더 기약하는 게 더 나을 텐데.

“하지 마, 그만! 전화 왔어, 전화 왔다고!”

풉, 핑계라곤. 저 방에선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비를 맞으면, 생각했던 것보다 술이 금방 깬다. 맘을 독하게 먹고 들어와도, 갑자기 이 남자와 내가 왜 여기 있나 하는 생각이 들면 끝이다. 더군다나, 이런 부정적으로 ‘아방가르드한’ 기운이 가득한 방이라면 더욱 그렇다.

“내일 하자 내일, 응? 응?”

샤워장에 들어간 ‘내 여자’보다, 이 여자의 목소리가 좀 더 친숙해질 무렵, 세수를 깨끗하게 한 여자가 걸어 나왔다.

“얼른 와서 이거 좀 들어봐요.”

머리에 물기가 있는, 수건 안엔 몸뿐인 여자를 바로 덥석 안지 않은 건, 정말로 화장을 지워서일까? 어쨌든 이쪽 ‘ 일’보단, 저쪽 ‘이야기’에 더 흥미가 있었다. 벗어서 좋은 여자, 입었을 때 예쁜 여자를 구분하기 시작한 건, 작년부터다. 아까 바Bar에서 도톰한 스타킹에, 가슴을 양껏 모은 톱을 입고 있었을 땐 참 좋았는데. ‘양감’이란 단어는 이런 아쉬움을 표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겠지.

“아, 오빠 미쳤어? 그만, 그만!”

간지러운 것과 성적 희열이 친구 사이라면, 비명과 신음은 그보다 좀 더 가까웠다. 여자의 목소리는 첼로더니, 비올라를 넘어, 바이올린의 제일 높은 음표를 짚고 있었다. 여자가 소리를 질렀을 때, 내 방의 여자는 몸을 벽에 바싹 붙였다. 귀가 레슬링선수처럼 납작해졌다. 가슴이 벽을 밀어내는지, 벽이 가슴을 밀어내는 건지 알 수 없는 자세는 농염했다. 벽에 미끄러진 수건이 스르르 배 아래로 떨어졌다. 뒤로 쭉뺀 엉덩이가 내 얼굴 앞으로 솟아올라, 여자의 굴곡이 눈앞에 있었다.

옆방의 비명소리 때문인지, 벽에 눌린 가슴 때문인지, 바이올린의 곡선을 떠올린 탓인지, 내 몸이 딱딱해졌다. 그대로 그녀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전희는 하지 않았다. 여자의 상반신이 벽 쪽으로 기울수록 엉덩이는 점점 솟아올랐다. 이 벽이 이러다 쓰러지는 건 아니겠지. 이 방에서 나는 소리는, 분명 저 방에서도 들린다. 남자는 더 달아오를 테고, 여자는 더 조바심이 날 것이다.

“다른 거 못해?”
“자세 바꿀까?”
“아니, 그냥 이렇게 하자. 그,대,로.”

여자의 허리가 바이킹 모양으로 움직였다. 올라올 때 한 번, 내려갈 때 한 번, 목소리가 끊겼다. 처음 만났기 때문에 이 여자의 성적 취향까지 알 순 없다. 원래 이렇게 적극적인 여자인 걸까? 여자는 후배위를 고집했다. 옆방을 의식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특별히 화장기 없는 얼굴이 보고 싶진 않았기에, 그대로 놔뒀다. 손톱으론 벽지를 박박 긁는 게 귀엽기도 했다. 벽에 붙은 입술이 일그러질 때마다, 옆모습이 간신히 보였다. 허리를 빨리 움직일수록, 옆방의 소리가 잦아들었다.

섹스가 끝나자 햇빛이 창호지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런 모텔에선 일찍 나가란 얘기도 하지 않겠지. 스르르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전국~ 노래자랑!”하는 소리가 들렸다. 옆에 누워 있던 여자는 벌써 화장실에서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저 소리에 깼나보다 싶었는데, 옆방에서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엔 온 벽이 울릴 만큼이었다. 설마 지금까지 깨 있었던 건가?

“오빠,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안 이러기로 했잖아!”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남자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저 달래다가, 격앙되더니, 이내 꽈당 문이 닫혔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으니, 알 수가 없었다. 남자의 4분의4박자 구두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드라마틱하게, 여자의 울음이 멎었다.

    에디터
    유지성
    아트 디자이너
    Illustration/ Fingerpain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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