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살찐 미남은 없다

2017.05.24GQ

크림 케이크에 포크가 남긴 주저흔. 심장병을 감내하려는 의지와 라볶이의 손짓 사이. 먹자마자 뱉는 토사물 발사체. 절식과 폭식으로 억압을 다루는 법. 과잉 섭취와 과잉 성취로 나뉜 삶. 농경 사회의 레트로 유토피아. 고단백 저탄수화물 이론의 호언장담. 신체 수고를 최소화하는 기구…. 올리버 삭스가 신경과학을 위해 했던 것을 이제 모든 사람이 지방 과학에 바친다. 골상학자나 나치 과학자라도 된 듯 신체 형태와 치수, 측정과 계량에 달려들면서. 이윽고 디지털 황야에서 천만의 도적 떼로 변한 건강 구루들이 미친 몸을 향한 집단적 꿈을 실어나를 때, 남의 말을 잘 믿는 남자들은 칼 없이도 목이 잘린다.

나이는 가면‐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쓰고 있는 무엇-을 벗기고 몸의 헐거운 틈을 살로 채운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 숨 쉬는 칼로리 백과사전이자 지방 파시스트가 되었다. 쓸 데도 없이 비활성 상태로 집히는 지방을 추적하고 발로 차버린다. 지방은 삶과 죽음에 영향을 주는, 결장만큼 중요한 내분비 기관이 아니라 그냥 노란 기름 덩어리일 뿐이라서. 하긴, 3천 년 동안 뚱뚱한 남자를 추앙하는 조각은 본 적이 없다. 부처만 빼고.

미스터 올림피아는 체지방 4퍼센트로 경쟁한다. 미켈란젤로 다비드상의 체지방은 한 16퍼센트쯤 되려나? 내가 그 정도 되려면 천 년은 걸리겠지? 나도 보충제를 먹고 스테로이드도 맞아야 하나? 도시의 힙스터 체육관 쥐들을 위한 탑승 안내 방송은 늙은 세포에게 젊은 세포처럼 행동 하는 법을 가르치고, 고갈되는 콜라겐을 붙들고, 근육을 재훈련시킨다. 이 시대의 승자는 연예인도 금수저도 아닌 오직 지방을 통제하는 자. 남자도 궁둥이 0.7 비율의 허리로 경배받는 여자처럼 이상적인 신체 표본을 정했다. 동시에 SUV만큼 불룩한 남자를 필요로 하는 건 그 알량한 우월감을 갖고 싶어서. 하지만 근력도 속도도 기술도 지구력도 없는 자에게 주어진 운동 체계는 너무 정직하고 구식이라 바벨을 들자마자 3일도 못 간다는 걸 알아챌 수밖에 없다. 근육은 스스로를 느끼는 방법이며 자신감과 두려움의 기준. 머리에 리본을 맨 열 살 소녀가 된 남자들은 뼈만 남아도 너무 찐 거고, 아무리 운동을 해도 안 한 거나 마찬가지다. 야박하게 매겨진 평균 체중 차트를 볼 때 정확도 떨어지는 좌절감. 5킬로그램이 끝없이 들락날락하는 시시포스의 삶. 기어이 뿔 같은 흉근을 만들어봤자 체중 문제에서 벗어날 날은 영원히 오지 않는다. 현실을 똑바로 보며 스스로의 남성성에 만족하는 표준 체형들조차 복부만 좀 줄이면 그녀가 전화할 거라고 믿는다. 하지만 뱃가죽이 사발처럼 파인들 전화는 오지 않는다. 그녀는 살이 아니라 살을 대하는 당신 태도가 싫은 거니까. 이 복근 숭배 시대에 성인 대다수는 그렇게 임상적인 과체중이 되었다.

이 와중에 새 몸을 만들어 새 사람이 된 남자는 170도 안 되는 키로 2미터처럼 걷는다. 거울 중독자로 몇 개월 살다가 문득 키가 도로 주저 앉은 자아에게 묻는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거였나?” 1년에 겨우 2킬로그램이 늘던 관대한 시절은 끝났으니 돌아갈 길을 찾아야 한다. 어릴 땐 재미로 운동했지만 이젠 살기 위해서 한다. 하루에 할당된 팔굽혀펴기 횟수를 채운 날, 무릎에서 우두둑 소리가 날 때 뿜어져 나오는 울버린의 본성. 그러나 결과가 어떻든 슈퍼맨으로 살았던 이들은 다시는 클라크 켄트로 돌아갈 수 없다.

인생은 불공평하다. 신진대사율도 운명처럼 불공평하다. 성별, 유전자, 호르몬, 염색체, 인종, 나이에 따라 칼로리 소비량은 다 다른데, 나는 근육을 최상의 컨디션에 맞춰 손쉽게 사용하는 법을 배운 운동선수도 아닌데. 오직 나만이 내 신진대사율을 안다. 얼마나 많이 먹고 죽도록 안움직였는지는 나만 알기 때문에. 6천 년에 걸친 문명이 겨우 초라한 실내의 기름기 번들거리는 카운터에서 고열량 메뉴를 걱정하는 신세로 전락하다니. 그래도… 뚱뚱한 사람들의 행동학은 고려되어야 한다. 비만은 도덕적 결점이 아니라 단순히 의학적 문제이며, 원인은 나태와 폭식이 아니라 식욕을 자극하는 유전자일 게 분명하니까. 감기 바이러스조차 살찌게 한다는 건 아무도 몰랐겠지. 우리는 많이 먹도록 만들어진 피조물. 적당한 과식은 없다. 하지만 원하는 걸 다 먹고 버터를 공장처럼 퍼붓는데도 체중이 그대로라는 연놈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살을 빼야 한다. 신진 대율을 높여준다는 커피를 하루에 한 말 마시고 식욕을 억제한다는 담배를 두 보루 피우고 열흘간 잠도 자지 말아야지. 저녁 7시 이후엔 공기도 입술을 지나갈 수 없어. 200칼로리 밀크셰이크 한 컵은 일생 큰 차이를 만들거든. 일주일에 200그램이 늘면 한 달에 857그램, 1년에 1042그램, 20년 후면 20857그램이 늘잖아. 그래도 줄어든 만큼 높은 정밀함으로 추가되는, 자기 운명을 조절하는 지방의 교활한 능력은 따라갈 수 없다. 결국 창자를 우회하고 위를 작은 발칸 반도처럼 분할시키는 수술만이 세월의 바위에 눌려 난파된 자를 구조하는 마법의 탄환인 건가….

여자의 몸은 피하 지방을 있을 만한 곳에 배치한다. 당뇨나 부르는 남자의 더럽게 큰 내장 지방과는 비교할 수 없다. 그러나 야비하게도 지방을 수치스러워하는 문화는 여자를 겨눈다. 의료 기록이 이미 비만인 남자조차 공개적으로 살집 있는 여자를 조롱한다. 못생긴 것들은 거울도 안 보는 법이지. 그런데, 엄밀히 말하면, 날씬한 몸이란 젊음처럼 하나의 상품이며 구매 가능한 혜택이라서 계급 문제와 엮이고 만다. 하루의 칼로리를 줄이는 행위는 구루병을 앓는 르완다 여섯 살 아이의 옵션이 아닌 것이다. 어쩌면 며칠은 몸에 남은 지방에 기대 살아야 한다. 다른 측면으로, 마하트마 간디나 메이즈 감옥에서 죽은 바비 샌드에게 단식은 대장을 비우는 해독이 아닌 필사의 정치적 무기이기도 했다. 삶보다 중요한 명분을 위해 시간을 오래 끌며 스스로를 천천히 죽이는 행위였으니까.

마태복음 6장 16절만 봐도 초기 기독교인들은 굶는 것을 참회와 정화라고 믿었다. 음식을 거부하는 영광스러운 순간. 갈비뼈가 만져질 때의 승리감. 배설은 음식을 갈망하는 성스러운 근거였으니 굶주림의 겸허한 관념도 배출 없인 아무것도 아니었다.(그렇지만 먹는 게 그렇게 중하면서 화장실은 개차반인 한국 맛집, 그 배변의 배반은 감당할 길이 없다….) 아무튼 내가 살을 빼고 싶은 진짜 이유는 살찐 미남은 없기 때문에, 오직 그것 때문에…. 죄 많은 오늘, 예수가 40일간 금식하던 광야를 잊고 40일간의 아침 삼겹살을 생각한다.

    에디터
    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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