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ictorial

힙합 아이콘 그 이상, 켄드릭 라마

2018.09.23GQ

시대, 세대, 힙합의 아이콘으로 한정하기엔 아직도 꿈틀대는 것이 너무 많은 켄드릭 라마.

2018년 5월 30일, 뉴욕 원토의 존스 비치 극장 무대에 선 켄드릭 라마.

 

켄드릭 라마가 브롱스의 뉴욕 엑스포 센터 근처에서 1985년형 뷰익 르세이버를 타고 있다. 후디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칼레로.

브루클린의 한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켄드릭 라마가 연어 요리를 주문했다. 검은색 야구 모자를 쓰고 흰색 티셔츠를 걸쳤으며, 푸른빛이 도는 회색 바지 차림. 나는 10인석 테이블에서 그의 오른편에 자리를 잡았다. 생선을 선택한 켄드릭을 제외하고는 자리를 함께한 모두 치즈 버거와 미디엄 레어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감자 튀김과 크림 시금치가 접시에 함께 나왔다. 주변 테이블에 손님들이 많았지만, 누구도 우리에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신비스럽고 수줍음을 잘 타는 것으로 유명한 켄드릭은 음악, 농구, 정부, 세금, 다른 래퍼들, 상 등에 관한 얘기를 나누며 조금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NBA 동부 콘퍼런스 결승 7차전을 앞둔 전날, 르브론 제임스가 TDE 티셔츠를 입고 연습했다는 얘기를 들려주었다. 켄드릭은 다음 날 저녁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30일 일정의 TDE 챔피언십 투어의 일환이었다. 공연은 이미 매진된 상태.

식사 중에 켄드릭과 할렘과 브루클린에서 일어나는 변화들에 대한 얘기를 나눴고, 또 어째서 뉴욕이 더 이상 잠들지 않는 도시가 아닌지에 대한 견해가 오고 갔다. 템테이션스(켄드릭의 이름은 템테이션스의 리드 싱어 에디 켄드릭스에서 가져온 것이다), 커티스 메이필드, 마빈 게이, 마이클 잭슨, 갱스터 랩 등 켄드릭이 캘리포니아 컴튼에서 자라며 들었던 음악에 대한 주제도 올랐다.

켄드릭에게 그래미상 최우수 앨범 부문에 후보로 올랐다가 세 번이나 떨어진 건 잊으라고 말한 뒤, 흑인 최초이자 클래식이나 재즈 외의 뮤지션으로서 퓰리처상 수상자가 된 것을 축하했다. 켄드릭은 항상 생각에 잠겨 있거나 상대의 얘기를 경청하는 듯하다가도 갑자기 활짝 웃으며 벌어진 치아를 보이거나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인터뷰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서로를 잘 알고, 힙합과 컴튼의 길거리 문화에 뿌리를 둔 거침없는 언어로 대화했다. TDE 대표인 데이브와 켄드릭은 서로의 말을 대신 이어서 할 수 있을 정도로 각별했다. 점심 식사를 마친 후 다 함께 메르세데스-벤츠의 스프린터에 올라타 이동했다. TDE와 나이키(켄드릭은 나이키와 신발 컬래버레이션 계약을 맺기도 했다)가 협업한 제품을 판매하는 맨해튼 허드슨가의 팝업 매장에 잠시 들른 후 도심 외곽에 있는 호텔로 자리를 옮겨 1시간 넘게 인터뷰를 계속했다.

켄드릭 라마의 앨범 판매량은 현재까지 1천7백80만 장 이상이다. 총 29개 부문에서 그래미상 후보에 올랐고, 12개 부문에서 수상했다. 그의 음악은 하버드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기도 했다. 예리함, 철학적, 당당함, 용기, 혁신적 스토리텔러 등이 켄드릭 라마를 설명하는 단어로 자주 쓰인다. 그의 작품은 제임스 조이스와 제임스 볼드윈에 비견되기도 한다.

켄드릭과 함께 작업을 한 뮤지션 중에는 제이지, 에미넴, 닥터 드레, 비욘세, 리한나, 보노, 퍼렐 윌리엄스, 제이락, 마룬5 등이 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 살아온 과정을 바탕으로 미국에서 젊고 가난하지만 재능을 가진 흑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가사를 쓴다. 뮤지션이자 프로듀서인 퍼럴 윌리엄스는 “켄드릭은 우리 시대의 밥 딜런이고, 마일스 데이비스지만 자기만의 뭔가를 분명 갖고 있어요. 교육적인 내용을 담으면서도 훈계하는 듯한 느낌이 들지 않게 하는 그의 능력은 놀라울 뿐이에요”라고 말했다. 켄드릭에게 엄청난 성공과 유명세를 얻고도 왕성한 작업을 이어갈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묻자 “물론 진정성과 의지가 꺾일 수 있어요. 하지만 저의 강점은 여섯 살 때쯤 가장 아름다운 시절부터 열네 살 무렵 가장 비극적인 순간까지 양극단을 모두 겪어봤다는 거예요. 제가 겪은 경험을 음악으로 엮어 사람들이 그 안의 갈등을 똑똑히 볼 수 있게 하죠. 성장 과정이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건 맞아요. 어느 날 아침 만화를 보고, 시리얼을 먹고, 학교를 마친 뒤 집으로 걸어왔어요. 평범한 하루였죠. 그러다 4시부터 11시까지 하우스 파티가 열렸는데, 집 밖에서는 총격전이 벌어지고 있었어요. 그게 제가 겪은 세상이에요. 저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예요.”

켄드릭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 중에는 컴튼이나 LA 출신의 NBA 선수들이 있다. ‘Black Boy Fly’에서 “난 아론 아플라로를 질투했었지”라며 언급되기도 한 올랜도 매직의 포워드 아론 아플라로는 “폭력으로 가득한 컴튼에 살면서 스스로의 재능을 깨닫고, 누군가의 성공을 보며 ‘질투심’을 갖는 건 나쁘지 않아요. 켄드릭은 질투심으로 뭔가를 갈구할 수 있었던 거죠. 자신이 무엇을 이룰 수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어요”라고 했다. 켄드릭이 살던 동네 근처에서 자라난 토론토 랩터스의 더마 드로잔은 “켄드릭의 랩에 담긴 이야기는 모두 우리가 극복해야 했던 것들이에요. 또 그것들을 통해 성장해야 했어요”라고 말했다. 오클라호마 시티 선더의 포인트가드 러셀 웨스트브룩은 “켄드릭은 저와 같은 동네에서 자랐는데, 그가 음악을 통해 성장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설명하는 것을 이해하면서 많은 영감과 자극을 얻어요. 켄드릭은 거친 도심에서의 삶이 어떠한지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거예요”라고 했다.

켄드릭 라마 더크워스는 31년 전 어머니 파울라 올리버와 아버지 케니 더크워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래로는 동생이 4명 있다. 그는 여덟 살 무렵부터 프리스타일 랩을 시작했는데, 주로 마약에 관한 랩을 했다. 그러던 중 ‘케이닷’이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한 열여섯 살부터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당시 데이브 프리의 차고에서 녹음을 하고 있었는데, 그때 데이브가 무슨 일이 있어도 제 음악을 탑(앤서니 탑독 티피스)에게 들려줘야겠다고 했어요. 탑은 막 음악 비즈니스에 발을 들이던 참이었고요. 보컬 녹음 첫날, 탑은 제게 ‘이게 정말 네 실력인지 보자’라고 했어요. 저는 그냥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2시간 동안 땀 흘리며 프리스타일 랩을 했죠.” 데이브 프리는 “켄드릭의 랩을 처음 들었을 때 다시 들어봐야 했어요. 완성도가 매우 높고 복잡했는데, 무엇보다 그가 아직 어렸기 때문이에요”라고 말했다. 이제 TDE의 대표가 된 탑은 “마이크를 잡을 때마다 다 자란 어른의 관점에서 랩을 했어요. 그 후로 15년간 저는 모퉁이에서 랩을 하던 꼬마가 문화 장벽을 허무는 천재로 성장해나가는 것을 지켜봤어요”라고 했다.

켄드릭이 초등학교 때 알던 친구 대부분은 현재 세상을 떠났거나 감옥에 있다. 반면 그는 집에 부모가 있었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고 한다. “어마어마한 차이가 있어요. 가족과 가정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셨거든요. 친구들은 거의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어요. 집에 부모님이 계셨기 때문에 앞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어요. 메이저 레이블에서의 데뷔 앨범인 <Good kid, m.A.A.d city>에서는 자동응답기에 남긴 부모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들의 말은 거칠고 거침이 없다. 어머니는 켄드릭이 타고 나간 밴을 갖다 놓으라고 고함을 치더니 갑자기 부드러운 말투로 “사랑한다 켄드릭”이라고 한다. 음악에 대해 진지하게 여기고,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고 덧붙인다. 나중에 돌아와선 동네 사람들에게 너의 이야기를 들려달라고도 말한다. “엄마와 아빠가 춤을 출 수 있는 음악을 만드는 게 좋을 거야. 우린 시카고 출신이고, 거기선 다 그렇게 하거든”이라며 조언을 보탠다.

켄트릭의 부모는 젊은 나이에 달랑 5백달러를 들고 시카고를 떠나 컴튼으로 왔다. “어머니는 일자리를 구하러 맥도날드에 갔고, 아버지는 친구를 만들어야 했지만 온통 갱들밖에 없었어요. 부모님은 어떻게 살아남아야 할지 배워가는 중이었어요. 저를 보호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하지만 가끔 방탕한 생활에 빠지는 것을 즐기기도 하셨어요. 파티, 그리고 그와 관련된 여러 가지를 말이죠. 그러면서도 어머니는 꿈을 가지라고 독려해주셨어요. 제가 노력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셨고요. 한번은 3학년 때 학부모와 교사 간 미팅이 있었는데, 담임선생님이 저희 어머니께 다가와 ‘켄드릭이 사용한 단어를 듣고 놀랐어요. ‘대담함’이라는 말을 쓰더라고요’라고 한 적이 있었죠. 어릴 때부터 드러난 저의 능력은 삶에 유리하게 작용했어요. 정보를 듣고, 편견 없는 시각을 갖고, 궁금한 것은 혼자 탐구하는 그런 능력 말이에요. 반면에 아버지는 뭐랄까…. ‘그래. 잘했어. 이제 다시 해봐’라고 말씀하시는 편이었어요. 완전히 다 받아주시는 법이 없었어요. 덕분에 저는 비평을 받는 게 어떤 건지 이해하게 되었죠. 아버지는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네가 얼마나 대단한지 말해주지 않을 거야’라는 식이었어요. 아버지가 저를 조종했다고 볼 수도 있겠는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그 덕을 봤죠. 제가 낸 결과물이 비평의 대상이 되기 시작했을 때 평론가들은 저에게 딱히 할 말이 없었던 거예요. 어차피 그게 최선의 결과물이 아니라는 것을 저는 이미 알고 있었거든요.” 자라면서 책을 많이 읽었냐고 묻는 질문에는 “사전을 읽었어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켄드릭이 <Good kid, m.A.A.d city>에서 말한 폭력에 대해 말했다. “그게 우리의 세계였어요. <Good kid, m.A.A.d city> 앨범이 나왔을 때 저와 함께 자라난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주제를 음악으로 풀어낼 수 있었는지 의아해했어요. 그들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밀려나간 사람들이에요. 하지만 제 앨범을 들었을 때 말 그대로 기쁨의 눈물을 흘렸죠. 그들이 하나하나 멋진 사람들이란 걸 알아요. 그리고 저의 이야기를 노래하면 누군가는 우리에게 동정심을 느끼고, 단순히 살인자나 마약상 이상으로 본다는 것을 알아요. 저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들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라서 그래요. 우린 그저 어린아이들이었을 뿐이에요.”

켄드릭에게 가사 중 열여섯 살에 총으로 사람을 쏜 것을 암시하는 구절에 대해 물었는데, 그는 나를 쳐다보며 미소를 짓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할게요. 저는 피를 흘려본 적이 있고, 다른 사람들이 피를 흘리도록 원인을 제공한 적도 있어요. 당시 제 친구들과 똑같은 생각이 들었던 적이 있어요. 이젠 아무래도 좋다,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기분이 들었던 거죠. 아주 잠깐이지만요.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그때 깨달았어요.

그의 삶에 찾아온 ‘변화’는 두 차례의 세례다. 처음은 열여섯 살 때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확인을 위해” 20대가 되어 한 번 더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닥터 드레에게 켄드릭의 음악을 가장 먼저 들려준 사람은 에미넴의 매니저이자 데프 잼 레코딩스의 CEO인 폴 로젠버그였다. 닥터 드레는 TDE와 공동으로 켄드릭의 앨범 발매 계약을 체결했다. “켄드릭은 지극히 왕성하고 지적인 래퍼예요. 단어 하나하나가 잘 배치되어 있고, 고민의 흔적이 역력하며 깊은 의미가 담겨 있죠. ‘죽은 공간’이 없어요.” 켄드릭의 음악에 대해 로젠버그가 내린 평가다. 닥터 드레는 “제가 가장 흥분했던 건 켄드릭이 자신의 음악에 관해 말하는 영상을 봤을 때였어요. 음악을 향한 그의 열정이 목소리에서 드러났어요. 위대해질 수밖에 없다는 걸 단번에 알아차렸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켄드릭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뮤지션 중 한 명이에요. 도전적이고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내죠. 그는 아예 다른 차원에 있어요.” 프로듀서 릭 루빈이 한 말이다.

켄드릭의 재능은 작사, 랩, 프로듀싱에 그치지 않는다. 멜로디 감각이 탁월하고 다양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것도 가능한데, 어렸을 때부터 프린스를 비롯해 부모님이 하우스 파티에서 틀었던 음악을 들으며 익혔다고 한다. 또한 수많은 음절과 단어로 가득 채운 마디를 멈추지 않고 한숨에 부르기도 한다. 그는 음악을 통해 컴튼 외에도 많은 지역의 대변인 역할을 자처하기도 한다. 왜 하필 그 역할을 해야 하냐고 물었다. “스스로 짊어지기로 했어요. 제가 남들과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주변 사람들이 저를 존경하니까요. 만약 제가 스스로에 대한 기대를 저버린다면 저와 사람들의 기대도 함께 저버리는 것이라는 사실을 아주 옛날부터 알고 있었어요. 10년, 15년, 20년째 옥살이를 하는 친구들을 찾아가 감옥에서 나오면 제가 일자리를 주겠다는 말을 해줄 수 있는 거죠.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고요. 저는 약속을 꼭 지켜요.”

그가 살았던 컴튼의 파이루 구역의 총기 문제에 대해서도 물어봤다. “같이 자란 지역의 친구들에게 연민을 느끼고 절망보다는 오히려 이해하는 편이에요. 전부 다 그 친구들의 잘못은 아니거든요. 우리가 사는 동네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는 데 사회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들여다보면, 결국 우리 안에 가둬두고 서로 싸우도록 시킨 것이더라고요.” 이어서 그의 곡에 반복해서 등장하는 ‘생존자의 죄책감’에 대해서도 말했다. “3~4년간 성공과 유명세를 얻었지만 지난 20년간 친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알게 된 현실을 지울 수는 없어요. ‘엿이나 먹어. 난 이제 돈도 벌었으니 여기를 떠날 거야. 너희들이 어찌되든 내 알 바 아니야’라고 말하는 사람을 많이 알아요. 하지만 저는 그렇게 할 수 없었죠. 가만히 앉아 이 상황을 분석하고, 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야 했어요.”

 

존스 비치 공연 중.

지난 5월 앨라배마에서 열린 행아웃 페스티벌에서 솔로 공연 중 ‘m.A.A.d city’를 함께 부르기 위해 한 백인 여성을 무대 위로 불렀다. 백인들은 웬만하면 가사 중간에 흑인을 비하하는 단어가 나올 때는 알아서 마이크를 입에서 떼곤 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고, 켄드릭은 공연을 멈춘 뒤 그녀에게 따졌다. 랩에서 흑인 비하 단어 ‘Nigga’가 흔하게 쓰이는 것, 그리고 누가 그 단어를 사용해도 되는지 안 되는지에 대한 암묵적인 규칙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언젠가 오프라 윈프리는 제이지와의 인터뷰 중 그 단어를 들으면 흑인들에게 가해지던 린치가 떠오른다고 말한 적이 있다. 켄드릭은 몇 분간 생각에 잠긴 뒤 말을 꺼냈다. “단순하게 말해볼게요. 제가 이 지구 위에서 살아온 지난 30년간 백인들로부터 ‘넌 할 수 없어’라는 말을 수 없이 들었어요. 높은 신용 점수를 쌓거나, 도시에 집을 사거나 하는 것들 말이죠. 그러니 단어 하나 정도는 제가 가질 수 있게 해달라는 거죠. 제발 이 단어는 저의 단어로 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겁니다.”

가사는 어떻게 쓰느냐고 물었다. “가장 좋아하는 단어가 ‘실행’이에요. 어떻게 실행해야 할지 생각하는 데 80퍼센트의 시간을 쏟아요. 아이디어를 적어가며 어떻게 해야 사람들의 마음에 제가 쓴 단어가 의도대로 전달될 수 있을지 고민하는 게 될 수도 있죠. 이 의미를 가진 단어가 대체 무엇이며, 왜 여기에 놓이게 되었는지, 또 어째서 저기로 가게 되었는지 깊게 생각하는 거예요. 이런 과정을 거치면 가사를 완성하는 게 그다지 어렵진 않아요.”

할리 베리 할렐루야 Halle Berry Hallelujah 같은 단어의 배치, “데모크립스와 리블러드리컨”(Demo-crips and Re-blood-licans)이나 “내 DNA에는 힘, 독, 고통 그리고 기쁨이 있지”(I got power, poison, pain and joy inside my DNA)처럼 한 줄의 가사에 많은 음절과 단어를 빼곡히 채워 넣으면서도 낭비 없는 가사를 쓸 수 있는 비결을 물어봤다. “힙합을 좋아하니까요. 최고를 꼽자면 에미넴이에요. 할 말은 많지만, 단어를 갖고 논다고 해야 할까요. 앨범은 제 인생을 바꿔놨어요.

다음 날, 우리는 저녁 공연을 앞두고 매디슨 스퀘어 가든의 백스테이지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빨간색 TDE 모자를 쓴 탑도 자리를 함께했다. TDE 레이블 소속의 유일한 여성 아티스트인 SZA는 성대에 문제가 생겨 투어 일정 중 일부를 포기해야 했지만, 그날 밤 공연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며 말했다. “켄드릭은 열정이 엄청나요. 천부적인 소질이 있는 데다가 그걸 끝까지 발전시키죠. 타고난 재능이 많은데도 더 잘하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자극이 되고 아름다워요.”

넓고 어둑한 켄드릭의 분장실 옆에 붙은, 조금 더 작은 방에 앉아 켄드릭과 이야기를 더 하기로 했다. 속사포처럼 빠른 랩을 하는 그가 어렸을 때 말을 더듬었다는 사실을 상상하기 어렵다고 하자 켄드릭은 어머니에게 배운 방식으로 극복했다고 했다. 사람들에게 계속 말을 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수줍음이 많다기보단 내향적인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해요. 이중적인 거죠. 10만 명의 관객 앞에 서서 저를 표현하면서 공연이 끝난 뒤에는 다시 혼자로 돌아가 처음부터 생각을 정리하는 거예요.”

그가 쓴 가사 중에는 미국에서 부유한 흑인으로 살면서 “멍청한 짓거리”를 하지 않는 것에 대한 내용이 있다. “제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를 돌이켜보며 ‘1백만 달러가 생기면 뭘 하지? 이것도 사고 저것도 사고…’라는 생각을 해봤어요. 하지만 그건 제가 책임져야 할 사람들에겐 오히려 상처가 되는 것이었어요. 저는 우리 가족 중 처음으로 사회적 성공을 이룬 사람이에요. 제가 얻은 것들을 현명하게 활용해야 한다는 책임을 지기 시작한 거죠.”

“우리는 가난했지만, 그래도 망가지진 않았다”라는 척 디의 말을 켄드릭에게 들려줬다. “제가 정말 좋아하는 말이에요. 저도 분명히 그런 생각을 갖고 있었고요. 매달 푸드 스탬프(정부에서 지급하는 식료품 구매권)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먹을 게 다 떨어져 복지 기관에서 도와주기를 기다리거나 관청에 찾아가야 했을 때, 중요한 건 복지 기관이나 관청이 아니고 거기까지 걸어가는 것이었어요. 함께 걷는 시간이 없었다면 어머니나 아버지와 유대감을 쌓을 수 없었을 테고, 우리가 가족이라는 사실을 느끼기 어려웠을 거예요. 척 디가 한 말에 크게 공감할 수 있는 건 우리 가족 또한 가난했지만 함께 있었기 때문이에요.” 켄드릭에게 가족을 꾸리고 싶은지 물었다. “아직 답을 내리지 못했어요. 일에 완전히 빠져 있거든요. 제가 인생에서 추구하는 게 뭔지 알고 있어요. 그게 구체적으로 무엇이라고 말하긴 어려워도 매일 어떤 강력한 충동을 느껴요. 언어와 사람 사이의 궁극적인 연결점을 찾아야 한다는 충동. 아직은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것 같아요.”

켄드릭은 ‘TDE 챔피언십 투어’가 그의 오랜 꿈이었다고 한다. “우리의 아티스트들로 채워진 우리의 투어를 하는 것이에요. 모타운, 배드보이, 로카펠라, 데프잼, 애프터매스와 같은 레이블이 우리의 모델이었어요.” 이어 긴팔 티셔츠의 소매를 걷어 올리며 오른팔을 따라 팔뚝까지 올라가는 문신을 보였다. “돈이 하나도 없는 것처럼 열심히 살아라(Hustle Like You Broke $)”라고 새겨져 있는데, 탑이 했던 말이다. 탑은 켄드릭에게 이 말을 하면서 “항상 그런 정신 상태를 유지하고, 느슨해지지 말아라”라고 덧붙였다고 한다.

켄드릭은 이제 말리부에 살고, 가족도 이제 더 이상 컴튼에 살지 않는다. 엄청난 돈을 벌었지만 다른 래퍼들과는 달리 자랑하지 않는다. 그래도 켄드릭은 스스로를 “현존하는 최고의 래퍼”라고 칭한다. “솔직히 가사를 썼다가 너무 후져서 던져버린 게 수천 장이에요. 탑이 ‘아냐 그건. 넌 그것보다 더 잘할 수 있어’라고 하거나 제가 ‘에이 이건 아니다’라고 말한 적도 부지기수죠.” 하고 싶은 것을 다 하기에 하루 24시간이 충분한지 물었다. “제가 늘 하는 말이에요. 시간이 더 필요하다고. 작업에 빠지다 보면 이미 아침 5시, 6시예요. 아직 스튜디오에 있는데 말이죠. 저는 하루가 26시간…, 아니 27시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저녁 10시 15분이 되자 켄드릭은 75분간의 격렬한 공연을 위해 무대에 올랐다. 배경에는 “퓰리처 케니”라고 적혀 있었다. 수많은 조명과 영상, 레이저와 불꽃에도 불구하고 켄드릭은 공연장을 찾은 사람들의 넋을 잃게 하는 공연을 펼친다. 세 장의 메이저 레이블 발매 앨범 , , 그리고 퓰리처상을 받은 에 있는 곡들을 부르는 그는 숨 한번 쉬지 않고 많은 단어를 모두 소화해낸다.

2018년 5월 30일. 퓰리처상 시상식이 열린 컬럼비아 대학교의 도서관은 켄드릭의 친구들과 동료들이 앉은 자리를 제외하면 힙합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시상식장은 성당 같은 돔 형태의 천장으로 덮여 있고, 대리석 기둥이 세워져 학구적인 분위기가 흘렀다. 켄드릭은 반짝이는 금빛 무늬가 새겨진 파란색 셔츠에 연한 갈색 바지를 입고, 나이키 코르테즈 케니를 신었다. 그는 약혼자 휘트니 알포드를 비롯해 데이브 프리, 다나 케네디 등과 함께 1번 테이블에 앉았다. 시상식의 스타는 단연 켄드릭이었다. 모두가 그와 함께 사진을 찍으려 했다. 시상이 전부 끝난 후 켄드릭은 TDE팀과 함께 기자들을 피해 서둘러 자리를 떴지만, 함께 사진을 찍어달라는 아이들의 요청에는 기꺼이 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제 다시 밴에 올라타 롱아일랜드에 있는 존스 비치로 이동할 시간이었다. 챔피언십 투어 공연이 한 차례 더 열릴 예정이었다. 켄드릭은 백스테이지에 놓인 이동형 체육관에서 철봉과 웨이트를 한 뒤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겨 퓰리처상에 대한 얘기를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들어는 봤지만 저와는 전혀 관련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수상자로 선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했던 생각은 ‘내가 학계의 인정을 받다니… 이제 더 먼 곳까지 나아갈 수 있겠다’ 싶었어요. 힙합이라는 장르에서 진작 일어났어야 했을 일이죠. 우리의 공동체나 문화 바깥의 사람들이 우리를 받아들인 거예요. 가사는 단순한 노랫말이 아니라 진짜 고통과 아픔을 담고 있고, 우리 삶의 진짜 이야기가 음반에 담긴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주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그리고 힙합이 예술의 한 형태로서 인정을 받은 것은 저뿐만 아니라 힙합 전체에 의미 있는 일이에요. 오늘 단상 위의 시상자를 올려다봤을 때, 어머니가 제게 수트를 입히고 학교에 보내던 장면이 떠올랐어요. 어린 저를 위해 빈티지 숍이나 저렴한 할인 매장에서 사온 수트와 타이 말이에요.” 켄드릭은 그가 7학년일 때 영어 교사이면서 그를 ‘언어’의 세계로 이끌어준 잉에 선생님을 기억한다. “평범한 수업이 아니었어요. 예술적 훈련에 더 가까웠어요.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오로지 자신만 이해할 수 있는 글을 쓴 뒤 옆 사람에게 넘기라고 지시했죠.” 켄드릭은 이어서 부모님과 함께 백악관에 초청돼 오바마 대통령을 만난 이야기를 했다. “어머니는 검은색과 갈색이 들어간 드레스를 입으셨는데, 가장 좋은 옷을 입어야 한다고 했죠. 할머니가 살아 계셨을 때 나누던 이야기도 생각났어요. 흑인 대통령이 있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었거든요. 할머니는 약간의 희망을 품고 계셨던 것 같아요….”

‘XXX’나 ‘Black Lives Matter’ 행진의 주제가였던 ‘Alright’ 같은 정치적인 곡을 만들지 않은 건 아니지만, 너무 절망적이기 때문에 정치에 관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트럼프 대통령과 노예제에 대한 카니예 웨스트의 발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한참 침묵을 지키던 켄드릭은 “그들에겐 그들만의 관점이 있겠죠. 마음이 내킬 경우 직접 만나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어요”라고 했다. 에 실린 곡 ‘LOVE’에 대한 질문도 던졌다. “제가 처음 만든 개인적인 사랑 노래예요. 다른 사람들도 이 곡을 들으면 어떤 보편적인 감정을 느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켄드릭은 알포드와 그 사이의 연애사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고, “온전히 나만을 위한 것을 하나 갖고 싶어서”라는 이유만 남겼다.

켄드릭의 말에 따르면 어렸을 때도 자신감이 넘쳤다고 한다. 그럼 그 사이에 쓴 가사에 언급한 자기 회의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한 번도 그렇게는 생각을 안 해봤네요. 오늘 밤 집에 돌아가 생각해볼게요. 어쩌면 두려움이 아닐까 싶어요. 많은 아티스트가 성공에 대해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을 느끼거든요. 어떤 사람들은 두려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마약을 찾기도 하죠. 제 경우에는 마이크를 잡고 쏟아내고, 해소해요. 그리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해보기도 하고요. 제가 뭔가를 잘못하고 있다거나 남들보다 더 재능이 많다는 생각을 하면서요. 칭찬을 받아들이기 싫어하는 것과 같은 거예요. 그저 더 열심히 작업을 하고 싶은 것뿐이죠.” 다음 계획을 묻는 질문에는 “저도 모르겠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인생에서 가장 즐거운 것이자 가장 아름다운 것이죠.” 그가 ‘ELEMENT’에서 노래한 것처럼 이 짓을 위해 목숨도 바칠 것인지 물었다. 그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브롱스에서 촬영한 켄드릭 라마. 후디 레이닝 챔프, 티셔츠 모두 H&M, 목걸이, 크롬 하츠.

켄드릭 라마는 블루스, 재즈, 그리고 소울을 이해하고, 독창적인 스타일로 음악에 담아요. 정말 놀라울 정도로요. 그의 작업은 마법 같아요. ― 토니 모리슨

자기 세대의 생각과 사고방식을 짊어지는 데는 용기와 배짱, 그리고 실력이 필요하죠. 켄드릭 라마는 지금처럼 혼란으로 가득한 시대의 나침반이라고 할 수 있어요. GPS로 봐야겠죠. 그것만으로도 퓰리처상은 물론이고, 권위 있는 어떤 상도 받을 자격이 충분해요. ― 척 디

그가 만든 음악의 모든 점을 좋아해요. 켄드릭의 음악을 들을 때면 도심에서 수많은 어려움에 몸부림치며 자라던 꼬마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요. &l;tGood kid, m.A.A.d city>에 실린 ‘Black Boy Fly’ 트랙의 마지막 벌스가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정확히 알아요. 제가 바로 그런 꼬마였거든요. ― 르브론 제임스

뭔가 좋은 소식을 들으면 더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안주하고 싶지 않거든요. 아마 다른 사람들에게 “퓰리처상을 받으면 어떻게 할 건가요?”라고 물어본다면 열에 일곱은 “이제 좀 쉬어야죠”라고 대답하겠죠. 하지만 제 경우엔 서른 살에 인생의 정점을 찍어버렸다는 느낌이 들 것 같아요. 기분이 그다지 좋을 것 같진 않아요. ― 켄드릭 라마

그의 첫 정규 앨범 활동이 끝나갈 때쯤, 켄드릭에 대해 전부 알게 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뚜렷하고 분명한 그림을 그리는 가사로 자신의 세계로 인도해요. ― 에미넴

켄드릭처럼 온화한 줄만 알았던 친구가 내지르는 정의의 주먹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 세대의 문제는 어떤 한 명의 아티스트가 해결할 수 있는 게 아니지만, 일부를 밝혀내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죠. ― 보노

켄드릭 라마의 노래는 현대 음악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예요. 다른 천재 뮤지션들과 마찬가지로 ‘무대’라는 공간에 딱 들어맞는 사람이죠. ― 다나 케네디, 퓰리처상 운영자

랩은 현재 가장 중요한 음악 장르 중 하나예요. 진작에 받았어야 할 인정을 드디어 받아서 다행이에요. 켄드릭이 퓰리처상을 받은 것은 우리 모두에게 엄청난 일이에요. 아, 약간 질투가 나기도 해요. ― 에미넴

    에디터
    Lisa Robinson
    포토그래퍼
    Annie Leibovit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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