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음울한 자동차의 나라

2010.05.24이충걸

E.L.

눈 감고도 가던 길인데 속도 감시 카메라가 내 차를 찍었다. 그동안 700번은 더 달렸을 80킬로미터 속도 제한 구역에서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렸다…. 곧 잊지도 않고 ‘돈을 내라’ 는 청구서가 우편함에 와 있었다.
차에 치여 죽은 아이들과 부서진 차들이 뒤엉킨 교도행정적 사진이 안 와서 다행이라기엔, 허술한 운전 기술로 저지르는 허황한 실수들, 그 ‘범죄’ 의 하찮음이 주는 언짢음, 그동안의 벌금을 모으면 페라리 스무 대는 사겠단 저능한 산술이 좌충우돌하고 있었다. 도로에서 느끼는 삶의 복잡성은 왜 그렇게 민감하고 짜증스럽기만 한 걸까. 나만 그런 건 아니겠지요?

사람 몸은 치타처럼 빨리 움직일 수 있도록 진화되지 못했다. 속도가 아주 빨라지면 감각과 반응과 위험을 계산하는 안테나는 제때 작동하지 않는다. 크롬으로 된 갑각등딱지 안에서 호모사피엔스는 미치도록 어리석은 동시에 넘치도록 강력해진다. 너무나 기계를 사랑한 나머지 …. 차도에 그어진 두껍고 하얀 선은 자동차를 인도하지만 교통 흐름을 제어하려는 이런 장치들은 도리어 무모한 행동을 하라고 떠민다. 노란불이 켜졌다 하면 거칠게 속도를 높이고, 감시 카메라(전혀 가지 않는 것보다 너무 빨리 가는 것에 대한 어떤 구속)가 멀어지면 바로 제한 속도를 넘는 것이다.(국가의 GDP와, 도덕적 부패와, 도로의 안전성 사이엔 어떤 관계가 있을까?) 그러나 깊은 밤의 텅 빈 길, 빨간불 앞에서 묵묵하고도 기쁘게 신호가 바뀌길 기다릴 운전자가 얼마나 될까. 그럴 때 과속은 오히려 본성적이며, 신호 위반은 차라리 정상적인 것 같다.

자동차는 음악을 듣고, 먹고, 키스하고, 통화하는 전천후 공간이지만, 문화는 갈수록 투쟁적이고 개인화된다. 운전 중엔 자기중심적이다 못해 끝내주게 편협해진다. 차 밖에서 자기가 안 보일 거라고 믿고는 얼굴을 맞대곤 절대 못할 불손함을 저지른다. 상대를 으깨버릴 듯 욕을 할 땐 그걸 다 어디서 배웠는지 나 스스로도 신기해 죽을 것 같다.(위쪽이 열린 컨버터블에 탄 사람이 큰소리로 ‘지적질’ 하는 걸 본 적이 있나?) 확 달려 나가 목을 뽑아버리고 싶어도 신호가 바뀌자마자 완전 생까며 달아나는 치를 보면, 운전은, 인터넷의 제지되지 않는 자율성과 다를 게 없다. 분명 어떤 사회적 공간이긴 하지만 예의와 관련된 전통적 규약들이 종종 무너져 얼굴도 모르는 사람끼리 죽자고 덤벼드는 블로그나 웹 채팅방처럼.

사실 대부분의 교통 문제는 인류 종의 내적 유약함 때문에 일어난다. 위험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능력, 경쟁을 부추기는 사회적 요구, 스릴을 추구하는 욕구, 유아적 분개. 천천히 달리는 건 그래서 쉽지 않다. ‘속도 제한’ 이란, 무시해도 좋을 참견, 미숙하거나 느긋한 운전자나 지키는 가이드라인 같으니까. 그러나 당신이 10년 무사고를 자랑하는 운전자라면, 이제까진 운이 좋았을 뿐이고, 지금부터야말로 사고가 날 때라는 걸 알아야 한다.

자동차엔 부정적 환경의 결과, 운전을 둘러싼 가차없는 역동성 말고도, 세상에서 가장 넓은 세종로가 세상에서 가장 막히는 길이 된 미스터리가 존재한다. 물음표는 창궐한다. 왜 내가 접어든 도로만 막히는 걸까? 길을 늘리는 데는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들 텐데 신차 출시는 왜 그렇게 잦고, 또 왜 갈수록 커질까? 지구의 주인은 혹시 자동차가 아닐까? 제아무리 신차라도 세 달만 지나면 구식이 되는 판국에 꼭 땡빚을 내 사야 했을까? 왜 예쁘고 작은 차들만 골라서 수입되지 않을까? 허구한날 도로를 정비하는데 길은 왜 더 막힐까? 한 100차선쯤 되면 안 막히려나? 정치가들은 보행자 중심 도로를 만들자면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한다면서 자기들은 왜 기사 딸린 엄청 큰 차를 탈까? 도로는 특정한 이들을 위한 실험실이나 놀이터인 걸까? 교통 시설 개조와 도로 문화 개선은 다른 일일까? 시내로 들어가는 차에 혼잡통행료를 받는 거야 그렇다지만, 도심을 빠져나간다는데 돈은 왜 받을까? 자동차 라이트와 사이렌에 대한 법률은 어떤 과정으로 통과될까? 남자들은 다 나름 자동차 전문가인데, 왜 남자와 자동차라는 기계는 부조화하기만 할까? 교통 신호도 신호등도 분리대도 없고, 아예 보도와 도로의 구분이 모호해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개미는 교통 정체에 빠지는 법이 없는데 인간은 대체 왜 그럴까? 자전거 인구는 느는 데, 자전거가 외려 럭셔리 아이템이 된 것 같은 기분은 뭘까? 자전거 친화가 엘리티즘이나 실용적 사고라면 자전거 둘 데는 왜 통 안 보이고, 전용 도로는 왜 그렇게 좁을까? 그곳엔 눈 치울 제설차가 지나가면 안 되는 걸까?

장기적으로 교통 밀집 장소에 차로를 넓히는 게 완전한 해결책이 될까? 더 많은 차선은 더 많은 차를 유혹하는 게 아닐까? 자동차가 3초에 시속 100킬로미터를 주파한다 해도 달릴 데가 없다면 그 무슨 말짱 도루묵일까? 자동차의 숨 막히는 성능과 힘 딸리는 교통 시스템, 무모한 자동차 산업 때문에 오히려 숨이 막힌다. 사면초가 자동차의 나라엔 음울한 운전자만 존재할 뿐이다.

SIGNATURE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