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근대화는 침탈과 맞닿아 있으나, 당시 지은 건축물은 여전히 남아 있다. 한때는 치욕을 지우겠다며 부수기도 했지만, 암울한 역사도 결국 역사라는 인식 덕분에 보존될 수 있었다. 여기, 열한 곳의 근대 건물은 대부분 비어있다. 오래된 목조 건물엔 손 기름의 윤기가, 차디찬 석조 건물엔 따뜻한 온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건축사무소 여섯 팀은 이들 근대 건물에 생기를 불어넣었다. 상상이지만 구체적인 제안이 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쁘겠다. 보존해야 마땅한 근대의 미래로서.
구 동본원사 목포 별원
위치 전남 목포시 영산로 75번길 5
연혁 1930년대에 일본 불교 신사로 건축. 1957년부터 최근까지 교회였다가 현재 공연과 전시 공간으로 사용중.
일본의 신사였지만, 해방 후 최근까지 교회로 사용된 곳. 목포만큼 기구한 운명의 건축물이 동본원사 목표 별원이다. 일본 불교의 한 종파인 동본원사는 우리나라에 가장 일찍 전파된 일본 불교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해방 이후부턴 줄곧 교회로 사용되었다. 게다가 민주화 운동을 하던 목포 시민들의 안식처 역할을 해서 마당 앞에는 기념석이 자리 잡고 있다. 그동안 건물이 겪은 역사의 중압감 때문인지, 아찔하게 솟은 지붕 때문인지, 올려다보면 어떤 위압감마저 서려 있다. 가파르게 만든 지붕 때문인 듯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심하기 짝이 없다. 높은 지붕을 유지하기 위해 구리선으로 일일이 묶어 놓거나, 수직 창 양쪽에 도르래를 달아, 올리다 멈추면 받침대 없이도 고정시킬 수 있다. 건물이 뿜어내는 ‘왜색’과 요소의 아기자기함이 상충하는 참 이색적인 건물이다.
장영철(와이즈)의 제안 – 비밀의 정원
어떤 근대 건축물은 정치적 논리에 의해 부서지고, 경제적 이득에 의해 없어지고, 중요한 사회적 아젠다에 잊히기 마련이다. 동본원사 목포 별원은, 어쨌든 살아남았다. 시작이 어떻든 간에, 목포는 이 신사를 사용해왔다. 마치 로마에서 쓰던 공회당을 그리스교도가 자신들의 신전으로 고쳐 썼듯이. 골목길에서 잘 보이지 않는 이곳 앞마당에 쏙 들어가 천천히 거닐다 보면, 몇 년 동안 별 탈 없이 늙어가는 풍경 하나가 그려진다. 그때도 역시 골목길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 일본이 망언을 했으니 일본 신사를 부숴야 한다는 성질 급한 사람들도 없다. 다만, 문화재 보수공사로 입을 앙다물고 있던 화강석 바닥 사이로 풀들이 자라고, 부서진 담사이 개구멍으로 아이들이 들락날락하고, 할아버지와 마실 나온 바둑이가 애들을 보고 멍멍 짖어댄다. 지금 당장 무언가로 만들기보다는 이대로 두고 싶다.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오랫동안 살아남아서, 위압감을 내려놓길 바랄 뿐. 꼭 비밀의 정원처럼, 근심이 있을 때 찾아가고 싶은 곳이 되었으면 좋겠다. 정원은 치유의 공간이니, 신사를 만든 사람들이 이 땅에 남긴 상처를 대신 갚아주길.
중명전
위치 서울시 중구 정동 1-11
연혁 1897년 황실도서관 수옥헌으로 준공, 1904년 경운궁(덕수궁) 대화재로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중명전으로 이름이 바뀜. 1905년 을사늑약 강제 체결, 1907년 4월 헤이그 특사 파견을 결정한 장소. 1915년 외국인들의 사교 클럽으로 쓰이다가 1963년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기증. 1976년 민간에 매각되어 사무실로 활용. 2010년 문화재청에서 복원 완료 후 박물관과 문화유산국민신탁 사무실로 사용 중.
한때, 중명전엔 왕이 있었다. 처음엔 왕실의 도서관이었지만, 덕수궁 대화재 이후 고종이 기거했으니 그때 부터는 황궁의 역할도 했을 터다. 조선의 끝자락에 있던, 대한제국의 첫 번째 황제는 근대적 건물에서 지낸 최초의 왕이기도 했다. 우리의 근대와, 조선의 마지막을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건물이 바로 중명전이다. 하지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누군가는 허연 페인트를 칠하기도 했고, 개인의 사무실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다 복원이 결정되자 본래의 붉은색 모습을 되찾았다. 을사늑약이 이루어지고, 헤이그 특사를 결정한 장소이기에 그에 관한 자료와 복제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평일 오전 관람엔 상관없지만, 오후 관람을 하고 싶으면 회당 25명만 받기 때문에 예약이 필요하다. 규모도 상당하고 건물 앞에는 널따란 터가 있지만, 좁은 골목으로 깊숙이 들어가야 하기에 찾기는 쉽지가 않다. 재미있는 건 중명전 앞엔, 언제나 외국인이 북적인다는 점이다. 바로 앞, 정동극장에선 1년 내내 한국 전통문화를 담은 넌버벌(대사가 없는) 뮤지컬이 공연되고 있다. 공연을 보러 오는 관객 대부분이 일본인과 중국인이다. 고종이 마지막 임기를 다한 장소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히길 바랐는지 꼭꼭 숨어 있었지만, 그 존재와는 상관없이 시간은 이만치 흘러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명전 앞으로 1백 년 전, 동북아시아에 휘몰아 친 역사의 후손들이 모두 모인다는 점이다. 중명전에 서린 역사의 주인공은 우리와 그들, 모두는 아닐는지. 공연이 시작되기 전, 자투리 시간이라도 우리의 근대적인 첫 번째 궁궐을 보여주고 싶다.
임형남(가온건축)의 제안 – 여러 가지 시간의 박물관
1988년 3월, 졸업 작품이 될 만한 장소를 찾기 위해 정동을 어정거리던 중, 정동교회 맞은편 서울우유 보급소와 뜬금없는 테니스코트 사잇길로 올라가다 중명전을 발견했다. 막다른 길에 마당을 품고 후덕한 인상으로 서 있는 그 집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집 앞에 세워진 ‘스뎅’ 안내판에는 그간의 역사와 설명이 적혀 있었는데, 건물의 설계자는 러시아 사람 사바친이었다. 나중에 알고보니 구 제물포 구락부 등 우리나라에서 여러 건물을 설계했지만, 대금도 제때 못 받은 비운의 남자였다. 중명전 안에는 많은 임대 사무실이 들어차있었고 마당에는 자동차가 그득했다. 하지만 이곳을 아는 사람도, 더 이상의 정보도 없었다. 시간이 흘러, 뜻이 있는 사람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개인 소유의 임대용 건물에서 정부 소유의 문화유산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회랑을 되살리고 말끔한 벽돌을 이식했으며, 새로운 지붕재를 머리에 심어 회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푹 꺼진 눈이 어딘가 퀭해 보이고 핼쑥한 피부는 방부 처리한 것처럼 생명력이 증발되었다. 내용이 빠지고 껍데기만 남은 집에 생기가 있을 수 없다. 우리의 복원은 대부분 상상력은 빼고, 껍데기를 고치는데만 급급하니까. 그나마도 지켜줘서 고맙다고 생각하지만 어딘가 허전하다. 정동이 그렇고 경복궁이 그렇고 여기저기 빈 땅을 채우는 폐사지 복원이 그렇다. 시간을 복원하고 사람을 복원하고 프로그램을 복원할 방법은 없을까? 아니면 그냥 시간이 전시될 수는 없을는지. 이제부터라도 중명전이 품어주었던 시간과 인간을 담은 시간의 박물관으로 남으면 안 될까?
제물포 구락부
위치 인천시 중구 송학동 1가 11-1외 1필지
연혁 1901년 미국, 영국, 독일, 러시아인들의 사교장으로 건축. 1934년 일본 부인회로 사용. 광복 직후에는 미군 장교 클럽, 1947년부터는 대한 부인회 인천지회가 활용. 1952년 시의회, 교육청, 박물관이 함께 씀. 1953년 의회와 교육청이 이전. 1990년 인천시립박물관도 이전. 2007년 6월 리모델링 작업을 거쳐 예전 제물포 구락부의 모습을 복원해 스토리텔링 박물관으로 사용 중.
러시아 사람 사바친은 풍운의 꿈을 안고 한국에 온다. 그는 성공하고 싶었고, 한국은 기회의 땅이었다. 개항을 시작한 한국은 초가집과 기와집으로 가득한 신비의 땅이었겠지. 당시, 제물포 구락부가 서 있는 그림은 지금보다 더욱 독특했을지도 모른다. 서양 사람들이 당구와 테니스를 치고 술을 마시던 클럽이 20세기의 시작과 함께 조선 땅에 세워진 것이다. 그곳에서 벌어지는 연회는 그들에겐 이국적인 풍경 속에 펼쳐지는 낭만이었을 것이다. 평생을 살아왔던 고향보다 반나절이나 빨리 아침을 맞이하며, 발전된 기술로 산다는 어떤 우월감. 재밌게도, 서양 사람들이 웃고 왁자지껄 떠들던 장소는 복원되어 보존되었지만, 우리의 유희까지 허락하지는 않았다. 국가 간의 교류 활동으로 건네받은 물건을 나라별로 찬장에 모아 놓았지만, 과거 제물포 구락부를 이용하던 사람들의 것은 아니다. 복원된 연회장 탁자 뒤로 제물포 구락부가 만들어진 일화가 시간차를 두고 네 개의 TV에서 똑같이 상영되고 있다. 고요한 가운데 TV소리만 흘러나오니 왠지 더욱 공허하다. 정성것 복원된 바와 탁자를 사람들의 북적임으로 채울 수는 없을까? 1백 년 전, 이방인이 만든 건물 속에서 홍차를 마시며 1백 년 동안 가까워진 동서양의 생활양식을 느낄 수는 없을는지. 과거엔 제물포 구락부가 초가집 사이로 보여 낯설었을 테지만 모두가 서양식의 삶을 살게 된 지금은 오래된 기억으로서 낯설다.
다만 어떠한 차를 마셔도 향은 깊을 것이다.
전숙희(와이즈)의 제안 – 근대문화 기행의 시작점
야트막한 동네 야산 높이밖에 안 되는 곳인데, 개항 직후 4개 열강이 싸우지 않고 4등분해 나눠 쓰기로 했다. 왜 그랬을까? 이곳을 위성지도로 찾아보니, 답이 나온다. 인천부두와 월미도가 발밑에 있고, 동인천역에서 인천역으로 이어지는 철로에 애워싸인 조계지 시절 각국의 거주지역과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도시에서 이 야트막한 동네 야산은 가장 근사한 조망지이자 지리적 중심이었다. 공평하게 조계지를 나눈 미·영·로·청인들이 가장 전망 좋은 정상을 나누는 것이 쉽지 않았을 텐데, 사이좋게 각국공원(자유공원)을 만들고 구락부를 지어 사교장으로 같이 사용하기로 한 것은 흥미롭다. 어찌 보면 진정한 의미에서 공공의 공간(Public room)의 실현이었다. 그것도 내·외부 공간을 모두 갖춘. 공원과 구락부는 조계지 시절부터 한국전쟁 이후, 현대사를 아우르는 도시 풍경이 중첩되는 곳이다. 공원은 각국공원(혹은 만국공원, 개항 직후), 서공원(일제 시), 만국공원(광복 후), 자유공원(1957년 이후)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제물포 구락부는 구락부(조계지 시절), 정방각(일제 시 재향군인회), 미군장교클럽(광복 후 1953년까지), 시립박물관 (1990년까지), 문화원(2006년까지), 구 제물포 구락부(현재)로 명패를 바꾸었다. 그래서 오히려 그 쓰임새와 정체성이 모호해져버린 두 공공의 공간을 함께 재생시켜 인천을 찾는 관광객에게 근대문화기행의 시작지가 되게 하면 어떨까? 자유공원과 구 제물포 구락부 건물 앞길에 과거 열강들이 홀로 독차지 할 수 없었던 근사한 풍광을 담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1백10년 동안 도시의 건물들이야 바뀌었겠지만, 월미도와 인천 앞바다, 서해로 서서히 떨어지는 석양은 변함없을 테니. 같은 맥락에서 구 제물포 구락부를 찾는 이들에게 특별한 기억의 장소로 남을 수 있게 빌려줬으면 좋겠다. 바다 건너 멀리서 조선을 찾아온 이들에게 역사적으로 사교했던 장소에서 새로운 추억을 선물해보면 어떨까? 원래 일몰 후 더욱 북적거렸을 공간이기에, 앞으로도 창가로 스며든 석양을 맞으며, 따뜻한 홍차나 글루바인 한 잔 마실 수 있는 공간이 되길 기대해본다.
김제 죽산면 구 일본인 농장 사무소(하시모토 농장 사무소)
위치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570-6
연혁 1926년,건축. 광복 후 10년간 윤문호 박사의 개인 병원으로 사용되다 1968년 이후 농업기반공사 동진지부 죽산지소로 2003년까지(35년간) 쓰였다. 현재는 비어 있는 상태다.
“가장 젊은 어르신이 예순다섯이에요.” 파출소 경찰관이 말했다. 김제시 죽산면은 국도를 달리다 만날 수 있는 그런 시골이다. 조그마한 슈퍼마켓에선 어르신들의 술판이 벌어지고, 한쪽에선 삼삼오오 화투를 친다. 고요하고 차분한 동네, 이곳이 한때, 쌀이 넘치고 돈이 쌓였다는 곳이 맞나?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지평선이 보이는 김제평야. 일본인 지주 하시모토는 죽산면 농토의 반 이상을 수탈했다. 역설적이게도 광활하고 비옥한 땅 위에서 많은 이들이 굶주렸다. 노략질을 당하던 민초들에게 끝없는 평야는 한숨으로도 채울 수 없는 일터였겠지. 그런 수탈의 중심에 하시모토 농장 사무소가 있다. 1906년 군산을 건너 김제로 온 하시모토는 개간 작업을 마치고, 농장을 경영했다. 그가 주판을 튕기고 음악을 들을 때, 소작농들은 저 창문을 통해 그를 쳐다볼 수는 있었을까? 죽산면의 고통은 소설 <아리랑>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지금 하시모토 사무실 안엔 냉기가 살을 엔다.
나은중, 유소래(NAMELESS)의 제안 – 박제되었지만 이야기하는 오브제
이 작은 농장 사무소는 어떻게 보면 박제된 유물과도 같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한 번 더 박제하고 싶었다. 고정되고 영구화된 장소를 현재의 이야기로 탈취시키는 방법. 농장 사무소를 감싸는 공기막 구조를 만들어 즐거움과 가벼움으로 압축시키고 싶다. 방문객은 시각과 지각을 통해 소통하며 동시에 몸을 기대거나 앉을 수도 있다. 이러한 접촉은 공기 막 내부의 압력을 변화시켜 구조물 전체가 섬세한 팽창과 수축, 그리고 유기적인 흔들림으로 접촉에 반응한다. 사람과 구조물의 상호작용은 이내 놀이가 된다. 또한 공기 구조물은 바람에 의해 미세하게 수평방향으로 움직이며, 압력과 온도 차이에 따라 수축과 이완을 반복해 호흡하는 생명체와 같이 숨을 쉬게 된다. 공기 막을 진동시키는 희미한 노랫가락이 들려온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오~.” 김제는 침체 되었다. 가족 단위 관광객이 이곳을 찾아 활기로 메꿔줬으면 좋겠다. 서글픔은 가두고, 즐거움만 빵빵하게.
문경 가은역
위치 경북 문경시 가은읍 왕능리 536
연혁 1955년 건축. 2004년 가은선이 폐선되면서 폐역.
“새하얀 교복을 입고 가은읍에 가면 새까매져서 왔어요. 온 동네가 그렇게 까말 수가 없었지요.” 친구를 만나러 가은읍을 갔었던 여고생은 이제 사십 대가 되었다. 그 사이 점촌시는 문경시로 바뀌었고, 석탄을 실어 나르던 가은선은 폐선되었다. 마을을 뒤덮고 있던 까만 가루들은 누가 꽉 짠 행주로 닦은 듯이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가은역을 도리어 흰 눈이 흠뻑 덮여 있을 뿐이다. 산과 산이 도미노처럼 늘어져 있어 하나만 쓰러져도 모든 산이 차례대로 엎어질 것 같은 풍경. 예전엔 새둥지 같은 이곳에서 세상으로 나가기 위해선 꼭 가은역을 거쳐야만 했다. 그곳에서 점촌역으로 가는 기차를 타야 문경을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가은역으로는 귀향하지 못한다. 조용해진 역 앞엔 아직도 다방이 있다. 역전 다방은 조용했다. 도시의 분위기는 조금 더했다. 가끔씩 들리는 버스 소리가 정적을 깰 뿐, 무엇 하나 귀를 귀찮게 하는 법이 없었다. 철로로 기차가 다닐 땐, 레일의 마찰음이 시간에 맞춰 삐걱거렸겠지만 지금은 사람이 밟아 달리는 철로 바이크가 대신한다. 문경엔 레일 바이크 관광이 한창인데, 그 연장 종착역이 가은역이 될 예정이다. 사람들의 발길은 줄었지만 페달을 밟는 발길질로 가은역엔 갈 수 있을 것이다.
강예린(SOA)의 제안 – 흑백사진관과 영화관
광산 개발 붐을 이룬 1970~1980년대를 정점으로 1993년 채탄이 끊기면서, 인구는 밀려 나가고, 가은선과 가은역은 폐쇄되었다. 잇따라 역전도 조용해졌다. 북적이는 곳은 문경에 지은 드라마 세트장이다. 드라마 세트장이 일부러 지은 건축이라면, 가은역은 옛 영화榮華가 남기고 간 세트장이다. 사람보다 추억이 더 많이 살고 있는 곳이기에, 가은역은 칼라일 수 없는 흑백이다. 석탄에 대한 검은 기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래서 가은역에 제안하고 싶은 건 ‘흑백사진관(영화관)’이다. 컬러 시대에 태어나 디지털로 기록하는 세대에, ‘흑백’의 풍부함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공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변화의 경험은 사진과 영화에 고스란히 기록되었다. 가은역의 복구공사를 통해 흑백영화 상영과 철도와 관련된 문학을 읽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했으면 좋겠다. 대합실과 야외의 철도 플랫폼 부분은 철도에 관한 영화나 흑백영화를 보여주는 작은 상영시설로 갖춘다. 역무실로 쓰이던 3개의 동 중 하나는 철도문학을 보관하는 창고로, 나머지 2개동은 흑백사진을 찍고 인화할 수 있는 흑백사진관으로 바꾼다. 한쪽엔 이 일대 마을 사람들과 방문객을 기억할 수 있게 전시한다. 외관은 되도록 건드리지 않고, 기차 플랫폼 형식의 외부 구조물과 가구만 조금 손을 봄으로써 소백산맥으로 둘러싸인 가은역의 장점을 느낄 수 있게 한다.
번사창
위치 서울시 종로구 삼청동 28-1, 금융연수원 내
연혁 1884년 무기 연구소로 건축, 일제 때 세균실험실로 사용되다가 광복 후 미군정 때 중앙방역연구소로 활용되었다. 대한정부 수립 후 국립사회복지연수원으로 쓰이다, 1970년 한국은행에 불하되어 한국금융연수원의 소유가 되었다.
1884년, 강화도 조약 8년 후, 개화파에 의해 갑신정변이 벌어진 그해. 근대식 무기 공장인 번사창이 생긴 이유는 명확하다. 운요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엔 새로운 무기가 필요했다. 영선사인 김윤식과 유학생 38명은 중국 텐진의 무기 공장에서 기술을 배워 번사창에서 만들고자 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결국 신식 무기를 만들기보다는 수리와 보관 용도로 사용되었다. 현재도 제대로 사용하지는 못하고 있기는 마찬가지. 번사창 주변엔 금융연수원이 들어섰고, 삼청동의 기이한 번잡함과 겹겹으로 들어선 건물 사이로 자취를 감춰버렸다. 벽돌을 쌓아 벽을 만든 근대 최초의 조적조 건축물이자, 목조 트러스가 가미되고 지붕엔 기와를 얻은 이 희귀한 건물은 은닉되어 있기엔 지나치게 아깝다. “아무래도 연수원이라서 조용해야 하거든요.” 금융연수원의 번사창 담당자는 숨어버린 근대 건축물을 애써 찾아오는 관광객이 반갑지만은 않다고 했다. 그러나 과도기를 이처럼 잘 표현하는 건물이 또 있을까? 게다가 동서양의 양식이 혼합된 이런 방식은 현대 건축이 염두에 둘 만하다. 지키면서 취하는 것, 우리가 바라던 근대화의 모습이었을지도 모른다.
나은중, 유소래(NAMELESS)의 제안 – 런웨이
‘번사’는 금속용기에 화약을 넣어 폭발시킬 때 천하가 진동하고 빛은 대낮처럼 밝다는 뜻이다. 근대화를 위해 건축된 이 무기 공장을 지금의 빛과 진동으로 재현하고 싶다. 파괴적이고 강함을 대변하는 장소에선 새로운 행위를 만들어낸다. 텅 비어 있는 3층 높이의 건물 내부에 투명 공기막을 꽉 채워 건축물이 가지고 있는 고유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살린다. 유적화된 흔적들 위에 또 다른 시대의 삶을 살아가게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공기막으로 채워진 번사창 내부는 지난 역사에 비해 한껏 가벼워지고, 지금 시대의 가장 화려한 쇼인 패션 런웨이를 위한 무대로 사용한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낯설고 은밀했던 번사창이 얇고 투명한 막과 함께 패션과 예술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탈바꿈될 수 있지 않을까?
- 에디터
- 양승철
- 포토그래퍼
- 정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