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월 4일 이후, 서울에 큰 눈이 오면 비교하게 된다. 그때보다 더한지 그때만큼은 아닌지. 그때보다는 덜 한 눈이 내린 저녁에 광장동 악스홀에서 마이 블러디 발렌 타인의 내한공연이 열렸다. 그런데 공연을 몇 시간쯤 앞두고, 그러니까 눈이 내리기 전에,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은 홈페이지를 통해 새 앨범을 공개했다. 지구의 20세기를 기념하는 앨범 중 하나인 < Loveless > 이후 22년 만이었다. 그야말로 깜짝 뉴스. 직접 손으로 음반을 만져보기 전까지 는 믿을 수 없다는(음악은 이미 여러번 가짜가 나돌았으니) 이들도 이번엔 진짜라는 걸 알았다. 악스홀이 꽉 찼다.
여기 모인이들은 어떤사람들일까? 지난여름지산 록 페스티벌에 모였던 이들과는, 다가오는 5월 시규어 로스의 공연장에 모일 사람들과는 어떻게 같거나 다를까? 개인의 취향을 넘어, 도무지 모호할 망정, 이들의 숫자와 면면엔 분명의미나 상징성이있다. 그 인파중에는, 지난 12월 합정동 ‘무대륙’에서 함께 공연했던 속옷밴드의 조월과 불싸조의 한상철도 있었다. 두 사람의 이름에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을 겹쳐보는 것은 제법 흥미로운 일이다. 공연 하루 뒤, 한상철은 자신의 블로그에 ‘스마트한’ 리뷰를 올렸다. 조월은 자신의 생각이 그 글과 같다고 트위터에 썼다. 마침 조월의 새 앨범 < 깨끗하게, 맑게 >가 나온 참, 듣고 있으면 자꾸 공간을 묘사하듯 느낌을 표현하게 된다.
조월의 앨범이 신촌 향음악사 신보 코너에 놓일 즈음, 두 젊은 시인의 시집도 광화문 교보문고 신간 코너에 놓였다. 황인찬과 박준 혹은 박준과 황인찬. 아무래도 황인찬을 먼저 말하는 게 선명한 것은 시집을 읽는 순서로도 그게 맞다는 판단 때문이다. 첫 시집에 ‘김수영 문학상 수상작’이 라는 띠지를 두르게 된 황인찬은 시가 꼭 빈집같다. 방에 백자가 놓여있으되 그 색이나 질감이나 모양 따위가 아니라 무엇보다 그 백자 속이 비었다는 감상을 먼저 전한달까? 그는 자꾸 뭔가를 쓰는데, 그 뭔가는 자꾸 지워지거나 덜어내거나 제자리로 돌아가거나 한사코 그대로 있는 걸 택한다. 황인찬은 멋을 내어 몇 구절 옮겨적는 것이 불필요한 말을 고른다. 흔히 말하는 한 편의 완결성과도 상관없는 시를 쓴다. 그리고 숫제 한 권을 읽었다 말하기 뭣한 시집을 펴냈다. 박준은 다르다. 박준의 아름다운 시집 <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는 일단 펼쳐서는 붙들고 앉아있을 수밖에 없는 책이다. 그리고 어느새 차오르는 말로 가득해진다. 달밤에 오래도록 밀물을 쳐다보면 그럴지도 모르겠다.
2월 7일 샤이니가 컴백을 알렸다. 그 소식을 가장 먼저 접한 건 황인찬 시인의 트위터를 통해서였다. 2월 14일엔 그 프리뷰 행사 ‘샤이니 뮤직 스포일러’가 삼성동 올림푸스홀에서 열렸다. 18곡의 노래를 두장의 앨범으로 한달 터울로 발표하는데, 이날 행사에서 여러 곡을 한 번씩 들을 수 있었다. 데뷔곡 ‘누난 너무 예뻐’부터 작년 이맘때의 ‘셜록’까지한번도 후퇴한 음악을 한적 없다는게 강박적으로 다가왔다. 사진이나 스타일에도 비주류를 아우르며 분방한 선택을 해왔다는 것마저도. 하지만 1번 트랙 ‘스포일러’가 터지는 순간 모든 걸 잊었다.
올해 설은 양력 2월 일요일에 닿았다. 연휴는 짧았지만 여느설과 마찬가지로 객지로부터 고향으로 가족이 모였다. 설 전날 밤과 설날 밤 JTBC 주말드라마 < 무자식상팔자 >는 두 번 방송되었다. 종반부에 들어서면서 인물 간 갈등양상이 최고조에 이른 < 무자식상팔자 >는 종편 시청률 10퍼센트라는 상징성을 들락거리며 추이를 주목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 주말의 시청률은 전보다 하락한 결과로 나왔다. 10퍼센트를 넘겼던 것도 수도권 시청률 이었으니, 서울과 수도권이 사뭇 한산해진 설 연휴의 영향이 작용 한 것이겠다. 중년 부부의 갱년기, 장남의 독신주의, 혼전 동거, 미혼모, 고부갈등, 황혼 이혼, 남편의 외도… 김수현은 달리 대가가 아니라서 그 모두를 끌어안고도 어느 한가지 놓치는 법 없이 착착 매듭을 지어나간다. 매회 전 출연자가 참여해 대본을 미리 읽도록 하는 작가는 그렇게 혼자서라도 앞으로 나간다.
한편 ‘힐링’하면 떠오르는 혜민은 TVN < 스타특강 SHOW >에 나와서 강연했다. 패션쇼처럼 길게 뻗은 무대를 오가는 그가 무슨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카메라는 자동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청춘남녀를 잡았다. 그가 말한다. “우리 안에 상처 있죠. 그 상처 때문에 아파요, 안 아파요?” 끄덕끄덕 말을 받아 적다가 다같이 가슴을 문지르며 “나는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습니다” 소리를 낸다. 민망할 것도 없다. ‘내’가 지금 아프다는데. 그것이 그들에게 힐링일 수 있다면 그걸로 백 번 천 번, 됐다.
한바탕 힐링의 장이 펼쳐진 그곳에서 채널 하나만 까딱 돌리면 ‘힐링’과 ‘경악’이 한꺼번에 반짝거리는 세상이 펼쳐진다. ‘경악’하고 ‘충격’받고, ‘발칵’ 뒤집히며, ‘결국’ 어떻게 되는 세상이 또한 버젓이 있다. 최근 미디어들이 주류고 비주류고 1류고 ‘찌라시’고 할 것 없이 뭐에 씐 것처럼 제목에 쓰는 단어가 있다. 경악, 충격, 결국, 멘붕, 헉!, 폭소, 무슨 일, 이럴 수가, 알고 보니, 살아있네, 숨막히는…. 그런 단어가 들어간 기사만을 모아서 아예 링크를 걸어놓은 ‘충격 고로케’라는 블로그도 등장했다. 하루동안 얼마나 많은 충격과 경악과 발칵을 경험해야 하는지, 그것은 이미 기자가 선택한 말이 아니라 한낱 ‘클릭 매뉴얼’이 되었다.
북한이 핵실험을 했다. 한국은 박근혜 대통령과의 5년을 앞두고 있다. 지난해 뿅,하고 나타난 일본 아이돌 캬리 파뮤파뮤는 새로운 투어에 서울이 포함되었음을 알렸지만 왠일인지 티켓팅은 시작되지 않고 있다. ‘아워’라는 팀은 연희동 스튜디오에서 어여쁜 꽃병을 만들어 내놓았고, 황동규와 이성복의 새 시집이 베스트셀러에 올랐다. 류승완의 < 베를린 >은 여전히 ‘한국영화’라는 문제와 싸우고 있고, < 패티김쇼 >는 15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지만 그녀의 마지막 투어는 아직 남아있다. 송혜교와 조인성이 나오는 노희경 드라마가 시작했고, 은퇴 선언 후 1년 만에 복귀한 강호동은 예전같지 않다는 세간의 말들과 부딪히는 중이며…. 수많은 뉴스와 이슈와 이벤트가 동시에 여럿에게 순서라고는 없이 일어나고, 우리는 걸핏하면 시시콜콜 알게 된다. 스마트폰을 여는 것만으로 그렇게 된다. 그 세상의 주인은 누구일까? 체험하는 ‘나’는 점점 어떻게 될까?
소설가 정영문은 어느 새벽 트위터에 이런 말을 남겼다. “오늘 역시 아무 일도 어지간히 일어나지 않았다. 그날 일어나지 않은 일들을 적는, 일종의 일기를 쓸 수도 있겠지.” 앞으로 몇 번이나 눈이 더 내릴는지 알 수 없는 지금은, 마이 블러디 발렌타인의 새 앨범이 아직 배송되지 않은 2월 15일이고, 서울의 낮 수은주는 영상 2도를 가리키고 있다.
- 에디터
- 장우철
- 일러스트레이션
- 이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