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털’이라는 농담도 시효가 다했다. 디지털이 거울처럼 명백하고 가깝다. 종이 잡지의 역사를 밀쳐내는 디지털 저널리즘에 관해 연세대 커뮤니케이션 연구소 강정수 박사에게 물었다.
미래학자 로스 도슨은 나라별 디지털 저널리즘의 혁신 속도를 감안할 때 한국에서는 2026년 정도에 종이신문이 사라진다고 예측했다. 그러나 여전히 종이와 디지털을 모두 가진 매체의 경우, 종이 쪽이 우세하다. 그럼에도 당신의 지적대로 ‘디지털 우선 전략’을 지금 채택해야 할까? 그건 사실 노스트라다무스의 지구 종말 예측과 유사하다. 하지만 허황되게 들릴지언정 근거가 있다. 핵심은 사람들의 습관이 변하고 있다는 것. 종이로 보는 사람도 있고 디지털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스마트폰이 확산되면서 모바일로 보는 사람들의 증가폭이 가파르다. 이전의 디지털은 PC 중심이었다. 하지만 사무직으로 일하는 사람이나 일상적으로 쓸 수 있었고, 집에 있는 컴퓨터는 가족이 함께 사용했다. 스마트폰을 통해 진정한 의미의 ‘퍼스널 컴퓨터’가 생겼다. 몇 년 전만 해도 무가지 신문이 망할 거라고 예측한 사람은 없었다. 구독하는 신문이 있더라도 출퇴근하면서 누구나 심심풀이로 봤으니까. 지금은 한 개 매체만 남은 걸로 안다. 모든 콘텐츠가 모바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이건 시작에 불과하다. 외국에서는 이미 상당히 진행됐다. 한쪽에 과도한 몰입이 일어나면 나머지 부분은 빠르게 붕괴하는 경향이 있다. 차차 줄어드는 게 아니라 어느 순간 싹 사라진다.
하지만 기존의 매체에서 디지털 버전으로 성과를 낸 경우는 아주 적다. 웹사이트도 있고, 아이패드도 있고, 콘텐츠를 포털에도 내보내지만 수익이 나는 경우는 극히 적을 것이다. 디지털에서 수익을 낼 수 있는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해야 하는데, 그 고민을 “디지털 파트가 알아서 하겠지”하면서 넘어가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렇게 대충 넘어가기에는 디지털과 모바일의 파고가 너무 크다. ‘디지털 우선 전략’은 철학의 문제이고 방향성의 문제다. 보통 기업 철학을 읽어보면 따분하고 지루하고 말도 안 돼 보이지만, 그게 있어야 전체가 아주 조금 움직인다. 한두 명이 아니라 전체가 움직여야 한다. ‘디지털 퍼스트’, ‘모바일 퍼스트’ 같은 단어를 통한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 종이를 버리라는 게 아니다. 2026년이 됐건 2036년이 됐건 갈 수 있을 때까지 가야한다. 하지만 이제 막 시작된 디지털의 역사는 천 년 만 년 갈 것이다.
디지털을 우선한다면 그에 맞춰서 종이책을 바꾸는 혁신도 필요할까? 어려운 질문이다. 종이가 가진 매력이 많다. 시각적인 면이나 촉각적인 면뿐만 아니라 청각적인 면도 있다. 가장 좋은 건 표지만 봐도 아, 이달엔 어떤 내용들이 중요하구나, 하면서 정보를 연관시켜서 소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편집진이 고르고 고른 좋은 콘텐츠를 집중적으로 볼 수 있고 글자 크기에 따라 중요도도 표시된다. 디지털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런 ‘전체 보기’를 상실한 채 개별 콘텐츠에만 집중한다는 것이다. 디지털에서 개별 콘텐츠로만 소비된다면 브랜드 가치를 잃어버릴 위험도 존재한다. 하지만 어쩌면 이건 우리의 도덕적인 주장과 같다. 올바르게 살아야 한다,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 간음하지 말아야 한다, 뭐 이런 도덕률이 있고, 당연히 지켜야 한다. 하지만 실생활이 그렇지만은 않다. 종이가 좋다고 해서 지키고 싶다고 해서, 지킬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사람들이 모바일에 습관을 들이고 있다. 습관이 변하면 그 습관을 바꾸기가 참 어렵다. 지금은 양자택일의 문제가 아니지만 곧 양자택일의 문제로 다가올 것이다. 종이와 함께 몰락할 것이냐, 종이가 아니라 저널리즘을 고수할 것이냐. 후자라면 ‘종이를 버릴 수 있다’는 전제에서 출발해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는 게 맞다.
‘디지털 저널리즘’이 주로 종이 신문의 몰락을 기반으로 이야기되다 보니 꼭 잡지와 연결해서 생각할 수 없는 지점이 있다. 결정적으로 신문은 쉽고 간결한 전달이 목표라면, 잡지는 창의적인 글과 사진이 목표다. 잡지는 ‘우린 이게 중요하다고 생각해. 궁금하면 너희가 따라와’라는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그런데 디지털 저널리즘은 업종을 서비스업으로 바꾸라는 요구처럼 들린다. 소비자가 매체의 주도권을 지닌다면 잡지의 매력이 훼손되지 않을까? 잡지의 매력을 훼손한다. 잡지의 콘텐츠를 1대 1로 디지털에 집어넣고 모바일에 집어넣는다면 잡지가 훨씬 더 매력적이다. 예컨대 하나의 실험이었지만 <뉴욕 타임스>가 ‘스노우폴’을 만든 건 종이 잡지나 종이 신문에서 주지 못했던 디지털만의 매력적인 형식을 선보이려는 노력이었다. 과거엔 형식실험이 필요 없었다. 종이에 있던 걸 그대로 옮겨도 충분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많은 사람이 디지털만의 고유한 가치를 찾고 있다. 잡지와 다르지만 잡지만큼 매력적인, 어쩌면 잡지보다 매력적인 걸 만들 수 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많아졌다. 미국의 <엘르> 디지털 팀처럼 벌써 실천에 옮기고 성과를 본 예도 있다.
디지털 측면에서 잡지의 방향성은 따로 있는 것 같다. 소위 ‘리스티클’은 아닌 것 같고. 나도 안 맞는다고 생각한다. ‘리스티클’은 <버즈피드>가 <버즈피드>를 위해서 개발한 형식이다. 각자의 형식을 개발해야 한다. 모방해서는 절대 안 된다. < GQ 코리아 >에 ‘남자의 가슴을 부풀리는 다섯 가지 방법’ 이런 걸 실을 순 없다. 매체만의 형식을 개발하기 위해선 그 매체의 독자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워싱턴 포스트>에서 선보인, 터치를 통해서 빌딩의 높이와 비행기의 길이를 체감할 수 있게 한 기사는 처음부터 모바일을 고려하면서 콘텐츠를 만든 것이다. 기획 단계부터 논의했기에 더 세련되고 강력한 비주얼 요소를 넣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이런 식의 기획은 단발성 보도에 맞지 않다. 지금 서구의 여러 신문사에서 시도하고 있는 모바일 콘텐츠는 잡지에 더 맞다. 지금의 형식 실험은 옛날부터 잡지에서 해오던 ‘리치 콘텐츠’를 어떻게 모바일에서 구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다. 어쩌면 ‘잡지적인 사고’는 디지털에서 더 요긴하지 않을까 싶다.
잡지 콘텐츠의 디지털화에서 참 괜찮은 방향성으로 보이는 건 <바이스>나 <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UK>의 사례다. TV에서 다룰 수 없는 범위로 넘어가, 아주 훌륭한 영상으로 완성한다. <바이스>가 참 재밌는 잡지다. 힙스터를 글로벌 네트워크로 묶었다. 프랑스 힙스터, 일본 힙스터, 아일랜드 힙스터의 모습을 교차 소비할 수 있도록 했다. <바이스>의 다큐멘터리는 굉장히 정치 사회적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도 많다. 이를테면 클럽에서 조명을 만지는 사람들은 어떤 고민을 하고 어떤 방식으로 일할까를 보여준 작품도 있었다. 이런 건 그야말로 잡지 콘텐츠를 영상화한 시도였다.
디지털은 글의 무덤처럼 통용된다. 온라인에서 읽을거리는 잘 소비되지 않는다는 관념이 있다. 있지 않다, 있었다. 요즘은 ‘모바일 르포르타주 르네상스’라고 한다. 이야기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다. 한 청년이 500달러를 주고 디트로이트의 폐가 같은 집을 사서 고쳐서 사는 이야기가 2주 만에 약 1백만 명에게 읽혔다. 이야기가 재밌으면 읽는다. 한국에서는 정치적인 쟁점이 걸린 기사가 가장 소비될 것 같은데, 막상 더 많이 읽히는 건 미담이다. 한 청년이 지갑을 찾아준 이야기 같은 것. 소비자는 인물이 들어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일종의 ‘드라마’인가? 그렇다. 장문이더라도 이야기라면 읽힌다. 유럽에서 잡지 시장이 가장 활발한 시기가 휴가철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주말이나 저녁때는 긴 글이 소비된다. 대신 이제는 휴가지에 잡지를 들고 가지 않는다. 스마트폰이 있으니까. 사람들은 드라마를 보면서 편안해한다. 드라마를 써낼 수 있다면, 잡지에는 더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잡지 글을 읽는 사람이 흔치 않다. 이미지만 보고 끝내는 사람들이, 내가 보기엔 90퍼센트다. 하지만 모바일에서는 그보다 퍼센티지를 높일 수 있다. 어쩌면 더 좋은 기회라고, 더 긍정적으로 생각 할 필요가 있다.
지금 디지털 시대를 맞은 한국의 잡지사는 분열을 겪고 있는 듯하다. 책에서는 격을 이야기하고, 질을 이야기하면서, SNS로 넘어가면 ‘여러분의 친구’로 돌변한다. 어떤 건 거의 구걸에 가깝다. 디지털은 으레 친화력이 있어야 좋아요 수를 높이고 방문자 수를 높인다고 생각해서 그렇겠지. 이와 대비되는 지표가 매체 충성도일텐데, 일단 둘은 상충하는 것처럼 보인다. 초기라서 그렇다. 메시지 전파력을 높이기 위해 ‘좋아요’를 끌어 올리려는 건데, 계속 끌어만 올리는 경우다. 페이지 뷰만 높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속에서 어떻게 소통할 것인가에 대한 전략이 별로 없다. 섞어야 한다. 물론 페이스북이 망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바일 커뮤니케이션은 아주 오랫동안 망하지 않을 것이다. ‘좋아요’ 구걸을 ‘클릭 베이트 저널리즘’이라고 한다. 대중으로 연결되는 다리를 밝혀냈다는 의미가 있다. “발견되지 않은 것은 존재하지 않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디지털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게 존재해서, 아무리 소리쳐도 소리없는 아우성이 될 수 있다. 희소성의 가치는 완전히 사라졌다. 옛날엔 남성지는 남성지끼리 경쟁했다면, 지금은 웹툰과 경쟁해야 한다. 아주 불편한 경쟁 관계가 형성되다 보니 구걸을 해서라도 독자에게 도달하고 싶어 한다. 어느 정도 지나면 이 문화는 바뀔 것이다.
페이스북이 뉴스 유통 플랫폼으로 출사표를 던진 페이퍼는, 평가는 좋았지만 성적은 그리 좋지 않았다. 페이퍼의 실패 요인은 뭘까? 처음 써보곤 너무 잘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페이퍼를 많이 썼다. 페이퍼의 특징은 저널리즘 콘텐츠를 많이 보여준다는 점인데, 이게 페이스북이 최근에 한 알고리즘 개편과 맞물려 있다. 원래는 엣지랭크라는 알고리즘을 썼다. ‘세상에서 가장 웃긴 동영상’, ‘남자들의 동영상’이 타임라인에 나타나는 빈도가 요즘 많이 줄었다고 느끼지 않나? 그 페이지에 대한 ‘좋아요’가 줄어든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런 콘텐츠에 짜증을 내기 시작했고, 그것이 ‘클릭 베이트’라고 페이스북 측에서 인지한 거다. 그쪽을 아예 싹 죽일 수 있는 새로운 알고리즘으로 바꿨다. 기업 광고는 돈을 내야만 노출시켜주고. 대신에 페이스북이 약속한 게 ‘퀄리티 저널리즘’이다. 페이퍼에 저널리즘 콘텐츠가 많은 배경이다. 저널리즘 기업 입장에서는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지금의 페이퍼를 보면 좀 과잉이다. 마치 저널리즘 사이트처럼 무겁다. 페이스북의 가벼운 콘텐츠에 벌써 익숙해진 젊은이들의 습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페이퍼의 슬라이딩 방식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페이퍼는 좌우 슬라이딩을 택했다. 페이퍼의 고전을 통해, 사람들이 위아래 슬라이딩에 익숙해졌다는 게 드러났다.
한국의 디지털 뉴스 유통 플랫폼은 네이버가 굳건하다. 이 힘은 당분간 지속될 거라고 보나? 그렇지만은 않다. 지금 미국은 물론 페이스북이 주도하지만, 구글 그리고 유튜브도 있다. 우리나라는 너무 지상파 방송 중심으로 살아왔다. 거꾸로 말하면 TV 외에는 재미있는 한국 콘텐츠가 없었다. 왜 미국 사람들은 디지털로 이동했을까? 강력한 엔터테인먼트 요소와 높은 품질을 갖춘 콘텐츠가 다른 유통 채널에도 나타났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패기로 만드는 UCC 같은 것 말고 질 높은 상업 영상을 만드는 공급자가 엄청나게 많아졌다. 한국도 예전에는 포털뿐이었다면 지금은 페이스북, 카카오톡, 유튜브, 아프리카티브이가 생겼다. 다변화의 가능성이 존재한다. 네이버가 결코 뒤지지 않는 영상 서비스를 만들어낼 수도 있지만, 변화의 핵심은 압도적인 매력의 콘텐츠다. 비뇨기과, 성형외과 광고 없이 잘 정리되어 있어서 지금까지 포털에서 뉴스를 봐왔다. 자녀에게 네이버나 다음 아닌 저널리즘 사이트를 보라고 할 수 없었다. 19금 사이트나 마찬가지였다. 전 세계에 유래가 없는 저널리즘 사이트가 한국에는 존재한다. 이것이 포털에 대한 종속성을 더욱더 강화시켰다. 사람들이 포털을 떠나서 갈 데가 없었다. 좀 더 많은 채널과 그 안의 콘텐츠가 생겨나야 한다. 네이버하고 정치적으로 싸워서 포털에 대한 종속성을 해결할 수는 없다. 콘텐츠의 유통이나 여러 가지를 종합적으로 판단해야겠지만, 적어도 새로운 걸 만들어내는 생산자가 시작이다.
디지털 저널리즘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꼭 기존 매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을까? 아예 디지털에 특화된 서비스를 새로 만드는 게 낫지 않을까? 나도 동의한다. 한국의 언론사와 방송사의 90퍼센트는 디지털 전환에 실패할 거라고 본다. 내부의 장벽이 너무 높다. 젊은 사람들이 바꿔보려고 해도 부장급 이상의 저항이 상상을 초월한다. 생존권 투쟁이다. 매체가 디지털로 바뀌면 자신이 할 게 없어진다고 생각한다. 이 갈등을 회사에서 풀어주지 못하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전통 매체가 아닌 혁신 저널리즘 세력이 성장 가능성은 훨씬 큰데, 문제는 투자가 활발하지 않다. 미국에서는 빌게이츠, 디즈니랜드, 이베이 창업자까지 혁신 저널리즘에 투자 혹은 기부를 하고 있다. 한쪽은 자본은 있으나 조직이 문제고, 혁신이 가능한 쪽은 자금이 없다. 새로 조그마한 온라인 뉴스 사이트를 만들면 처음엔 다 기업 협박하고 돌아다닌다. 협박당할 기업이 너무 많은 것도 우리나라의 문제다. 잡지 쪽에서 새로 만든 웹사이트도 가만 보면 매체인지 쇼핑몰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온라인에서 잡지 콘텐츠만 가지고는 돈벌이가 안 돼서 붙였을 것이다. 그래서 비즈니스 모델을 좀 더 고민하고 연구해야 한다. 돈벌이에 대한 고민이 너무 없다. 좋은 기사 만들면 어떻게 되겠지, 하지만 안 된다. 미국에서는 ‘엔터프레너십 저널리즘’ 이라고 해서, 저널리스트들도 기업가 정신을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매체에서 다양한 답을 찾아내야 한다. 뉴스 사이트처럼 디지털 잡지에서도 비아그라 광고, 비뇨기과 광고 나오는 순간 망하는 거다. 비뇨기과 광고 안 하려면 디지털 혁신이 필요하다.
서구와 다른, 한국의 저널리즘에 대한 근본적인 우려가 있다. 양질의 기사가 실린 종이 잡지가 외면 받는 외국의 상황과 양질의 기사가 없어서 블로그에 실린 글이 더 주목받는 상황은 다르다. 저널리즘이 온전히 뿌리내리지 못한 한국에서, 자칫 디지털이 저널리즘의 뿌리를 흔들지는 않을까? 사실은 벌써 흔들리고 있다. 이건 저널리즘도 아니라고 한국 사람들이 말하는데, 사실 저널리즘이지만 뿌리가 없는 저널리즘이다. 예를 들어 실시간 검색어 장사, ‘충격, 헉, 어쩜 이럴 수가, 아찔’ 이거 다 저널리스트가 한다. 인턴이건 누구건 언론사 이름으로 나오는 것 아닌가. 전부 망치고 있다. 망치고 있는데, 고민해봐야 할 게 아까 얘기했던, 종이잡지에서도 글은 잘 읽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좋은 비주얼과 함께, 어떻게 글이 읽히게 할 것인가를 고민해봐야 한다. 그 고민과 비즈니스 모델을 찾으려는 노력이 병행되어야 한다.
- 에디터
- 정우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