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촛불 같기도, 풀린 매듭 같기도 하다. 누구보다 화려하지만 마른 풀보다 지쳐 보인다. 흠뻑 적신 목소리, 무슨 대수냐는 듯한 몸짓, 나이트 가운, 수천 번의 밤과 낮, 갑자기 꺼버리는 음악, 어디선가 온 여인, 한고은.
눈이 왔어요. 지금도 와요. 저도 봤어요.
메이크업 때 술을 권했는데 거절했죠. 네.
저는 마셨어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왜요?
이 여자가 한고은이라서. 하하. 저는 일할 땐 술을 마시지 않아요. 예전에 <사랑과 야망> 할 때도 술을 정말 마시면서 하지 않았냐고들 하는데, 아니에요. 선배님들 보면, 추운 날 촬영할 땐 소주 한잔씩 하시기도 하던데, 저는 그렇게 하면 일이 안 돼요.
공연히 빼는 건 아닐 테고요. 눈이 풀려요. 혀가 돌아요. 정말 눈이 풀려요.
<사랑과 야망>은 2006년이었죠. 혹시 미자(극중 이름)가 남아 있나요? 아, 미자요. 없어요. 이젠 오래 됐으니까요. 씻어내기 참 힘들긴 했어요.
역할이 배우였죠. 배우가 배우를 연기했으니 어떻게든 흔적을 남겼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만큼 저를 쏟아 부은 작품은 없었어요. 그건 요만큼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어요.
실은, 요즘 내내 <사랑과 야망>을 봤어요. 질문을 만들기보다 그냥 당신의 연기를 봤어요. 아, 감사합니다. 아쉬움이 있어요. 더 잘했어야 한다는.
글쎄요, 아예 다 타버렸잖아요. 그토록 불완전한 여자를 연기하는 동안 매 순간 절벽에 선 것처럼 보였어요. 그런데 혹시 <사랑과 야망> 이후, 한고은은 더 나가지 못했다는 말은 어떤가요? 그 말이 맞죠. 정확한 지적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카타르시스를 느낄 만큼, 뭔가를 해소하면서, 감정이 널뛰면서, 미치게 동화할 만큼 나를 사로잡는 역할은 없었어요.
그럼 배우는 그 갈증을 어떻게 견디죠? 기다림이죠. 사랑을 기다리는 것처럼. 언젠가 오겠지.
막연히 기다리는 게 아니잖아요. 지독하게 겪었잖아요. 넘어서는 뭔가를 원하잖아요. 그건 너무 힘들지 않을까요. 약속도 없고, 기약도 없어요.
간이 큰가요? 모르겠어요. 대범해 보인다는 뜻으로 한 말이라면, 제게 그러 면이 있는 거겠죠. 당신의 질문이 재미있네요. <사랑과 야망> 후에 한고은이 한 게 뭐가 있냐는 질문을 준비하셨을 땐, 제가 그걸 수긍할 거라고 생각하신 거겠죠. 맞아요. 고민이고 딜레마죠. 그렇다고 머리를 쥐어뜯고 약을 먹을 순 없잖아요? 내가 아직 그릇이 안 되었으니 뭔가 안 들어 오는 게 아닐까, 시간을 견뎌보는 거죠. 여기가 끝은 아니잖아요. 자기 자신을 더 다져야죠.
아주 이기적인 이유입니다. 내겐 더 멋진 한고은이 필요해요. 연극은 어때요? 달려들고 싶진 않아요.
역시 기다리는 건가요? 글쎄요. 하고 싶은 건 많아요. 라디오 디제이도 하고 싶고, 이름을 건 토크쇼도 하고 싶어요. 하지만 그런 걸 다 하고 있지도, 하려 들지도 않아요. 제가 수동적이기 때문일까요? 아니에요. 나를 원하고, 내가 원하는 게 맞는 어떤 시점이 분명히 있어요. 뭔가를 내 입맛에, 내 욕심에 맞추려 들면 더 힘들어져요.
기다릴까요? 그래보죠. 인생은 긴 호흡이에요.
지금 제일 중요한 건 뭔가요? 음, 사람들이 나를 보면 대부분 비슷하게 얘기해요. “한고은 씨 예뻐요. 언니 잘해요. 멋있어요.” 인사치레, 배려, 그런 얘기. 근데 당신은 지금 다른 각도에서 나를 평가하고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요. 물론 감미로운 칭찬도 있었고요. 그 칭찬이 만날 듣던 소리가 아니라서 기분이 좋고요. 근데 제 대답은 너무 진부한데, 저한텐 지금 일밖에 없어요.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일이에요. 그래요, <사랑과 야망> 이후에 한고은이 한 게 뭐가 있느냐? 배우로서의 허기짐, 굉장히 커요. 도태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요. 가슴을 뜨겁게 갖고 싶고 욕망, 욕심. 크죠. 중요하고요. 근데, < GQ >하고 저하고 생일이 같은 달이네요.
인연이 있죠. 음, 좋아해요. 남성들의 잡지니까, 범접할 수 없는, 터부시하는 면도 좀 있는 것 같고요.
한고은 싫다는 남자는 못 봤지만, 그렇다고 자신있게 떠벌이듯 얘기하는 것도 못 봤어요. 어떤 식으로든 겁을 낸다고 느껴요. 왜 그럴까요. 제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죠. 하지만 아무리 평범해 보이는 사람도 어떤 면에서는 전혀 평범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영화 <노팅힐>에서 배우를 연기하는 줄리아 로버츠가 그러잖아요. “난 그저 평범한 여자예요. 한 남자에게 사랑해달라고 얘기하는.” 저 또한 그래요. 남자들이 제 그런 부분을 못 보나 봐요.
연예인이라서. 연예인이 외계인인가요? 당신의 직업이 기자듯이, 누군가는 미화원이고, 누군가는 선생님이고, 저는 직업이 배우일 뿐이잖아요. 여느 다른 삶처럼 저 역시 치열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냥 평범하게 대해요. 물론 타인이 저를 평범하게 대하지 못한다는 걸 느끼지만요. 하지만 스스로 특별하다 생각하진 않아요. 저 그런 말 많이 들어요. “생각보다 털털하네요.” “한고은 씨 쿨하네요.” 근데 저 쿨하지 않아요. 엄청 소심해요. 하지만 뭐 털털해요. 은수저 물고 태어나지 않았고, 비단길 걸으며 살지 않았기 때문에, 털털하고 편한 게 좋아요. 아무리 그래도 치열하게 열심히 살아왔기 때문인지, 모든 걸 편안하게 대하질 못하는 면도 있나 봐요. 차가워 보인다고들 해요. 그건 제 단점이자 약점일 거예요.
눈앞에 있는 누군가가 아니라 ‘사람들’이라는 알 수 없는 집합을 대해야 하잖아요. 사람들이라는 게 과연 어떤가요? 나는 지긋지긋하다고도 느껴요. 저는 사람들의 사랑을 받아야 하는 직업을 가졌어요. 사람들은 제게 굉장히 크죠. 하지만 이걸 알아요. 사람들을 사랑할수록 내가 더 상처를 받는다는걸요. 다행히도, 적당히 애착을 갖는 법을 배웠어요. 사람들을 지긋지긋해하지 말아요. 이 사람 저 사람 많이 대하는 직업이라 그런가 봐요. 저는 사람들을 대할 기회가 적어서 그런지, 집에서 <생생정보통> 같은 거 잘 봐요. 재미있어요.
아까 스스로 치열하다는 표현을 썼죠. 아주 어렸을 때부터 치열하게 살았던 것 같아요. 세상에서 살아남고자. 웬만한 아이들처럼 부모가 주는 혜택을 받지 못했고요. 그때그때마다 열심히 열심히, 내게 주어진 고민과 고비를 넘기면서, 최선을 다하면서, 내 능력에 넘치는 재주를 부리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하면서, 열심히 살았던 것 같아요. 해이해지진 않았다고 생각해요. 물론 저의 치열함이 다른 사람의 치열함과 같을 수는 없겠죠. 누군가는 저에게 웃기시네, 할 수도 있겠죠.
웃기시네, 같은 말도 써요? 음, 가끔은요.
75년생이죠? 동갑이에요. 그래요? 반가워라.
과거는 뭘까요?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이죠.
저는 연연해요. 너무 중요해서. 저는 그렇진 않아요. 지나간 시간들로부터 배우길 바라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를. 다행히 저는 기억력이 그렇게 좋지 않아요. 하느님이 주신 선물 같아요. 94년? 95년? 그때까진 기억이 많아요. 하지만 그 이후로는 시간이 온통 한 덩어리 같아요.
덩어리 같은 시간을 배우로 살고 있죠. 처음엔 힘들었죠. 근데 지금은 너무 적성에 잘 맞아요. 일을 시작하면 미친 듯이 달리지만, 쉴 때는 발가락도 꼼지락거리기 싫을 만큼 가만히 있어요. 그러니 제게 배우가 얼마나 잘 맞는 직업이겠어요. 굉장히 정열적이다가 갑자기 쉬고 싶어 하고.
아까 이태원에서 촬영용 의자를 고르다가 문득 한고은에겐 어떤 것도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동시에 모든 게 상관없다고도요. 의자든, 보석이든, 이념이든, 남자든, 한고은에겐 어쩐지 시원찮아 보인달까요? 흥미로워요. 그 말이 기분이 좋네요. 그런데, 저 지금 좀 지쳤어요.
- 에디터
- 장우철
- 포토그래퍼
- 김형식
- 스타일리스트
- 오선희
- 헤어
- 이소영(제니하우스)
- 메이크업
- 박태윤
- 어시스턴트
- 최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