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했다. 기괴했다. 우습고 슬펐다. 윤곽이 보였다. 숫제 뿌리가 드러났다. 그런가 하면 꽁꽁 숨었다. 기쁘기도, 웃기도, 잊히기도 했다. 새로운가? 넘쳐났나? 2015년은 우리에게 과연 어떤 시간이었나?
오찬호 사회학자
노키즈존? 이런 차별은 없었다. ‘흡연 금지’처럼 사람의 어떤 행동을 금지할 수는 있다. 하지만 공공장소에서 남자가 담배를 많이 피운다고 해서 ‘남자 출입금지’라고 하면 누구도 정당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수영장에서 사람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어린이 이용 금지’는 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가 카페에서 편안하게 쉬고 싶다는 이유로 특정 집단을 이렇게 포괄적으로 금지할 순 없다. 그런데 이 ‘노키즈존’을 환영하는 사람이 많다. 이들은 ‘맘충’이란 단어를 계속 등장시킨다. 아이를 제대로 통제하지 않는 ‘진상’ 엄마가 문제니, 아이를 데리고 오는 엄마들 전체가 그런 제한을 받을 수 있을까? 모든 차별은 이렇게 시작된다. 홀로코스트도 유대인들은 ‘이러하니’ 이들 전체가 특정 시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는 차별에서 출발했다. 흑인 차별도 마찬가지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아파트 단지에서 ‘임대아파트 사람들’을 분리시키고자 하는 ‘분양동 아파트’ 사람들의 노력은 늘 뉴스에 등장한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고 할지 모르지만 이런 식으로 심플하게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차별이 일상화되면 특정 집단 전체의 혐오가 사회적으로 면죄부를 받는다. 혐오를 혐오라고 생각하지 않는 괴물은 그렇게 탄생한다.
‘청년희망펀드’를 만들자는 말 한마디에 은행들은 상품을 출시했고 비정규직 청원경찰까지 강제 가입시키면서 실적 경쟁을 한다. 정부는 청년펀드를 바탕으로 취업아카데미를 만들려고 한다. 그러면 일자리가 늘어날까? 좁아진 취업문을 통과할 ‘어떤 개인’을 돕는 건 정부의 임무가 아니다. 이런 방식으로는 통과하지 못해 눈물을 흘릴 사람을 줄일 수 없다. 즉, 청년펀드는 구조적인 해결책이 아니다. 겨우겨우 취업에 성공한 이들은 이제 직장 선배에 대한 엄청난 부채의식을 직접 느껴야 한다. 상사의 잘못을 지적하는 건 원래 큰일인데 이제 원천 봉쇄된다. 벌써 “내가 너를 위해 이렇게 돈까지 부어 넣었는데, 어떻게 그럴 수 있냐!”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이와 비례해 청년들은 더 을의 자세로 모든 것을 수긍해야 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이 정부가 ‘도대체 하는 것이 없다’면서 화를 내는데 내 생각은 다르다. 무엇을 해보겠다면서 고민한 그것! 그것을 제발 하지 말았으면 한다.
박시영 디자인 회사 ‘빛나는’ 대표, 이태원 이맥집 사장
메르스 즈음에 받은 편지함. 디자이너로서, 가장 많이 쓰는 앱은 이메일 클라이언트다. 평상시에도 그곳은 아수라장이다. 마감을 재촉하는 읍소, 수정을 요구하는 협박이 하루에 1백여 통씩 쌓인다. 하지만 2015년 초여름에는 유달리 ‘!!급!!’ 이라는 머리말을 단 메일이 많았다. 메르스 때문에 극장에 사람이 없다는 게 급한 전갈의 이유였다. 연이은 국가적 재난 앞에 엔터테인먼트 업계는 눈치를 보고 있었다. 일정이 연기됐다는 통보, 죽음을 언급하는 민감한 문구를 빼달라는 요청 등. 사실상 엔터테인먼트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그들이 보내는 급한 메일은 어떤 무기력의 다른 말 같았다.
서울 시청 앞에서 퀴어 퍼레이드가 제법 크게 열렸다. 그 풍경이 새삼 세상 좋아졌다는 말은 아니다. 눈길이 간 곳은 그 앞에 진을 치고 있던 어떤 기독교 단체의 통성기도 소리였다. 그들은 과연 무엇에 내몰려 저 뙤약볕 아래서 울며 기도를 해야 했을까? 물론 거기에 어떤 정치적 이해와 계산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느낀 건 가장 순진한 공포였다. 종교가 개인에게 더 이상 위안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그들에게 진짜 필요한 건 뭐라도 붙잡을 수 있는 어떤 실체였을 것이다. 그들이 그토록 찾았던 진짜 구원과 위안이 채워지길 바란다. 종교가 매번 어떤 사건을 통해서만 존재한다면 정말 보잘것없을 테니까.
지금 이태원 골목의 풍경. 뉴스에선 20대 창업이 최고점을 찍었네, 자영업자 폐업률이 최고점을 갱신했네 하는 소식이 들린다. 이태원 근방의 제법 임대료가 싼 곳에 작은 술집을 차리고 나니, 안 보이던 것들이 보인다. 봄 즈음 다세대 주택 반지하를 개조해 들어선 식당과 술집, 카페에 찬바람이 불기 시작해 요즘은 임대 플랜카드만 걸려 있다. 어제는 비가 왔고 날은 더 추워졌다. 또 하나의 가게가 용달차에 주방 기구들을 싣고 있었다. 이태원은 여전히 낭인을 쉬이 볼 수 있는 곳. 또 한 명의 낭인이 폐업한 가게 앞에서 버려질 집기들을 기다리며 서 있었다. 그때의 감정이 아직도 정리되지 않았다.
오태경 번역가
싸이월드 미니홈피의 방명록, 쪽지, 일촌평 삭제 소식이 들렸다. 해당 게시물의 댓글란에는 방명록 등에 이어 다음 삭제 대상은 사진이 될지도 모른다는 우려와 게시물을 제대로 읽지 않고 소중한 사진을 왜 지우냐는 항의가 어우러졌다. 일부 삭제 공지 이후 개시된 새로운 서비스는 예상했던 대로 어설펐고, 그 어설픔에 대한 역시 새삼스러운 불만 폭주는 확실한 사망선고였다. 한 시대에 종지부가 찍힌 것이다.
4월에 고객사의 일을 돕느라 서산에서 7주간 머물렀다. 아침 해장국을 먹으며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던 텔레비전에서 성완종 씨의 자살 소식을 보도했다. 가는 곳마다 추모 현수막이 가득했고 다른 곳에서라면 절대로 느끼지 못했을 억울과 분노의 감정 속을 헤엄치는 기분이었다. 뜨내기인 내가 이럴진대 이곳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이 품었던 감정은 과연 어느 곳을 향하게 될까? 7주는 짧은 기간이었고 아무 일 없이 서울로 돌아오자 어느새 다시 강 건너 불을 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게 이치일지도 모르지만, 그때 느낀 감정은 그저 ‘이치구나’라고 흘려보내는 식이 아니라 이를 악물고 이치라는 단어를 씹어 삼키게 만드는 것이었다.
10월 6일, 재즈 전문 음반점 애프터아워즈가 매장을 폐쇄했다. 재즈라는 장르에 대한 수요 자체가 의문스러운 상황에서 재즈 전문 음반점이라는 존재는 10년이 넘는 세월 내내 이상하면서도 고마웠다. 하지만 소비자들이 음반을 ‘산지 직송’으로 구매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디지털 음원이 대세인 시대가 도래하니 ‘재즈’ ‘전문’ 음반점은 장사를 포기할 이유가 일단 두 가지나 되는 것이다. ‘산지 직송’으로 매개체의 먹거리를 도외시하는 데 일조했던 사람으로서 감히 할 말은 없지만, 근래의 기이한 LP(또는 바이닐) 열풍에 편승해 활로를 개척하는 교활함 같은 것은 애초에 기대하지도 않았다. 애초에 ‘재즈’ ‘전문’ 음반점이면 말 다 했던 것이다.
김성윤 <조선일보> 기자
밀라노 세계박람회(엑스포)가 지난 5월 1일 개막됐다. 밀라노 엑스포의 주제는 음식, 그러니까 ‘인류의 미래 먹거리 대안을 찾자’였다. 1851년 영국 런던 하이드파크 안 수정궁에서 ‘만국박람회’란 이름으로 출발한 세계박람회는 국가마다 자국의 문화와 과학과 기술이 얼마나 수준이 높고 진보했는지 뽐내는 일종의 문화 올림픽이다. 엑스포 역사상 음식이 주제가 된 건 이번이 처음. 음식이 세계 문화와 트렌드의 중심과 정점에 올라섰음을 확실하게 뽐내는 순간이었다. 한국관은 일본처럼 친절하게 자국의 음식을 소개하지 못했으며 독일이나 스위스처럼 창의적인 먹거리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했다. 유럽이 한국을 얼마나 모르는지 자각하지 못한 채 겉멋이 잔뜩 든, 좋게 말해 ‘미니멀’한 외관과 내용이 민망했다.
외식사업가 백종원 씨가 <집밥 백선생>에서 된장찌개에 설탕을 넣었다. 대중이 원하는, 결국 쉽고 편안하고 비싸지 않은 음식이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설탕을 된장찌개에 넣다니. 외식이라면 허용될 수도 있지만 집밥이라면 안 될 말이다, 그가 ‘식당밥 백선생’일 순 있어도 ‘집밥 백선생’일 수 없는 이유다’라고 칼럼에 썼더니, “너네 엄마는 설탕과 MSG 안 쓰는 줄 아느냐”는 둥 비난이 폭주해 한동안 곤욕을 치렀다. 어쨌건 지금 이 나라에서 요리는 예능의 가장 핫한 코드이며 요리사가 연예인을 능가하는 스타임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순간이었다.
독일 폭스바겐사가 지난 9월 배출가스 배출량을 조작해왔음을 시인했다. 폭스바겐, 아우디, 포르셰 등 폭스바겐그룹에서 생산한 차량들이 실제보다 더 적은 양의 유해물질이 배출된다고 의도적으로 속여왔단 거다. 부모의 사랑도 종종 나의 착각으로 밝혀지는 요즘, 무조건 신뢰할 만한 대상은 많지 않다. 폭스바겐으로 대표되는 독일 자동차, 나아가 독일제 물건은 매우 드문 무한신뢰의 대상이었다. 그 신화가 이번 사건으로 깨져버렸다. 믿을 것이 정말 없구나, 씁쓸하고 슬퍼지는 순간이었다.
황인찬 시인
여러 매체를 통해 누차 말해왔지만, 신경숙 작가의 표절 자체는 그다지 관심 가는 사안이 아니다.(너무 분명한 일이니까!) 애당초 신경숙이란 작가도, 그의 작품도 관심 대상이 아니었던 까닭이다. 오히려 내가 관심을 둔 것은 신경숙과 그의 표절을 중심으로 펼쳐진 반응의 스펙트럼이었다. 나는 독자와 언론의 강렬한 반응보다, 문단 내부에서 세대에 따라 갈린 극명한 온도차에 놀랐다. 이 건에 대해 목소리를 높이고, 분노를 표하는 것은 ‘윗세대’에 한정되어 있었는데, 아마 그것은 그들이 느낀 모종의 배신감 때문이었으리라 생각한다. 그들은 신경숙에게도, 창비에게도 나름의 기대와 애정을 품고 있었을 테니까. 그러나 나를 비롯한 젊은 세대는 그와는 다른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는데, 그들과는 달리 젊은 세대는 신경숙에게도 창비에게도 기대하는 바가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아마 문학동네에 기대하는 바는 세대를 막론하고 같지 않았을까?) 이러한 온도차까지 포함해서 이 사안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줄곧 하고 있다. 아무튼 이 사건 덕분에 쉽사리 꺼내기 어려웠던 문학 제도의 여러가지 문제 혹은 불만들이 호출될 수 있었던 것은 바람직한 일이기도 하다는 생각이다. 몇몇 출판사와 문예지들이 소위 ‘신경숙 이후’를 준비하고 있다고 하니, 일단은 조금만 더 지켜볼 생각이다.
페미니즘이 중요한 화두가 아니었던 적은 없지만, 올해 그 목소리는 더욱 개방적이며 거침없는 성격을 갖게 되었다. 올봄부터 메르스갤러리(메갤)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던져진 ‘여혐’ 문제에 대한 발언들은 일부 우려에도 불구하고, 페미니즘의 문제를 더욱 적극적으로 발언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올해를 기점으로 여성 혐오를 경계하는 목소리가 이전보다 더욱 강력해졌음을 피부로 느낀다. 그리고 그러한 목소리들은 실제로 의미 있는 변화를 여럿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 변화는 나에게도 찾아왔는데, 메갤이 만들어낸 자유로운 발언의 장 덕분에 나 또한 나의 자기검열(남성인 내가 페미니즘에 대해 섣불리 말할 수 없다는)과 그를 핑계로 한 침묵을 깨뜨릴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페미니즘의 문제를 더 적극적으로 발언하고, 더 적극적으로 사유할 수 있도록 이끌어준 이들에게 깊은 감사를전한다.
2015년 1월 1일부터 카페의 흡연 좌석 운영이 금지되었고, 그 덕분에 나의 작업 능률은 어마어마하게 떨어져버렸다. 작업을 하다 담배를 피우기 위해 카페의 안팎을 드나들다 보면, 머릿속에 있던 것이 죄다 휘발되어버린다. 덕분에 놓쳐버린 문장과 구절들을 모으면 이미 마감을 몇 번은 해결했을 것이다. 내 돈 내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한반도 위에는 없다는 사실을 문득 떠올려보면 비할 데 없이 깊은 슬픔이 차오른다.
김기훈 <헤럴드경제> 정치부 기자
정치적 진풍경의 데칼코마니. 역사의 시계를 쉽게 거꾸로 되돌릴 순 없을 것이란 내 믿음은 참 순진했다. 그 믿음은 사회부 기자로서 세월호 참사를 목격한 지난해, 이미 보기 좋게 산산조각 났다. 2015년에는 정치부 기자로서 ‘겨울 공화국’의 도래를 목도하고 있다. 2015년의 한국은 ‘잃어버린 10년’ 이전으로 뒷걸음질 치고 있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정부 기조에 의문을 달았다. 그래도 대통령이 여당 원내대표를 끌어내린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렇게 됐다. 자칭 ‘민주 정당’이란 곳에서 펼쳐진 진풍경, 아니 살풍경이었다. 그 무렵 북한에서도 현영철 인민무력부장이 불경죄로 고사포 처형을 당했다. 참으로 그로테스크한 데칼코마니였다.
국정감사의 몰상식. 방송통신위원회 종합감사에서는 눈 뜨고 보기 어려운 ‘복고 드라마’가 펼쳐졌다. 고영주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은 “문재인 대표가 공산주의자라고 확신한다”는 등의 말을 거리낌 없이 했다. 고 이사장은 영화 <변호인>의 배경이 된 부림사건 당시 수사 검사였다. 그런 그가 무려 문화방송 사장 임명권을 지닌 방문진의 이사장이란 사실에 차라리 안도했다. 그가 검찰이란 권력기관에 계속 남아 있었더라면…. 21세기에도 무지와 몰상식이 위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은 다분히 충격이다. 호세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진단은 옳았다. “바보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금연. 담배를 끊었다. 건강에 대한 염려가 금연의 첫 번째 원인이었지만, 1월 1일부터 담뱃값이 곱절로 뛰어올랐다는 경제적 부담도 만만치 않았다. 정치적 원인도 있었다. 정부는 ‘결코 증세는 없다’면서도 만만한 서민들의 지갑을 터는 데는 주저함이 없었다. 더 이상 담뱃값에 포함된 간접세를 이 정부에 보태선 안 되겠단 일종의 불복종 정신. 금연을 결심하고 실천하는 데 가장 훌륭한 외부 동력이 돼주었다. 나의 금연을 지탱하는 한 축은 정치적 반감이다. 대통령에게 감사드린다. 나의 금연은 당신 덕분이다.
김현아 아메리칸 어패럴 마케터
6월 26일, 미국 연방 대법원이 미 전역에서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6월 28일, 서울 시청 앞에서 퀴어문화축제 퍼레이드가 열렸다. 운 좋게도 다니는 회사가 오랫동안 LGBT 인권 운동을 해왔기 때문에 회사를 대표해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더운 날이었다. 광장 밖 사방에 전경들이 줄지어 있었다. 전경들을 지나니 퍼레이드를 반대하기 위해 모인 한복 차림의 여자들이 길가에 앉아 땀을 닦고 있었다. 내 또래가 많았다. 저 삶은 도대체 어떤 삶일까 하는 생각도 잠시, 30도를 웃도는 날 한복을 입고 있어야 한다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광장 안의 사람들은 그날, 그곳에 있는 것만으로도 들떠 보였다. 바리케이트 밖에서 북을 치고 부채춤을 추며 시위하는 반대 세력을 오히려 인스타그램 사진 거리처럼 여기는 듯했다. 해가 저물 즈음, 수백 명이 아름답고 당당한 표정으로 시청을 중심으로 을지로와 명동 일대를 돌았다. 5시간 넘게 대치했던 작년의 퍼레이드보다 훨씬 순조로웠다. 아직 갈 길이 멀다지만, 사랑하고 저항하며 앞으로 나가고 있다. 그 순간을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그날만큼은.
경리단길 320 리브레의 쿠바 샌드위치를 먹은 순간. 경리단길에 새로 연 320리브레에서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쿠바 샌드위치를 사 먹었다. 빵과 머스터드가 약간 아쉽긴 했지만, 확실히 내가 기억하고 있는 맛이었다. 서울에서 괜찮은 쿠바 샌드위치를 먹을 수 있게 되다니! 특히 쿠바 샌드위치처럼 간단한 레시피의 외국 음식은 한국으로 넘어와 재료의 기본은 지켜지지 않은 채 이것저것 부재료가 추가된 가짜가 되는 경우가 많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을 가지고 와 돈을 벌려고 한다면 그 음식에 대한 이해와 존중이 있어야 한다. 이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늘고 있는 것 같아 기쁘다. 내년에는 또 뭘 먹을 수 있을까.
한 남성지의 표지가 성 범죄를 미화하고 여성을 비하했다는 비난을 받으며 큰 화제가 됐다. SNS에서 갑론을박이 이어졌다. 꼭 필요한 논의도 있었지만 실명을 걸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저급한 댓글도 많았다. 사실 말조심은 쉬운 문제다. 말을 안 하면 된다. 혹은 똑똑하게 생각해서 부드럽게 표현하거나. 하지만 말조심보다 중요한 건 내면의 언어를 점검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의식적으로 말조심을 안 해도 될 정도로 내면을 성숙하게 만들고자 했던 한 해였다. 내 안에도 나도 모르는 편견과 폭력이 내면화돼 있을 테니까. 그것에 대해 오래 생각했다. 그 폭력적인 표지를 계기로.
김민철 TBWA 카피라이터, <모든 요일의 기록> 저자
2015년 4월 16일 하루의 모든 순간. 왜 일 년이 지나도록 바뀐 게 아무것도 없었을까. 왜 사람들은 다시 광장에 모여야만 했을까. 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그 광장에 와야만 했을까. 왜 그들은 자식을 잃고도 온당한 위로를 받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추위에 떨며 다 같이 울어야만 했을까. 왜 우리는 더 추운 곳에 있는 아이들이 떠올라 춥다는 말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을까. 왜 우리는 꽃 한 송이 헌화하는 것까지 저지 당해야만 했을까. 왜 꽃 한 송이를 무서워하며 그들은 버스로, 방패로 벽을 만들었을까. 어쩌다가 우리는 꽃을 무서워하는 경찰을 가지게 되었을까. 어떻게 일 년이 지났을까. 어떻게 일 년이 지나도록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을까. 왜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내년에도 또 같은 글을 쓰게 될 것이라는 공포에 휩싸일까?
‘빽’ 사달라는 여자를 광고물에서 또 목도하는 순간. 아직도 이런 여자를 아이디어로 내는 사람이 있다니. 아직도 이런 아이디어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있다니. 아직도 이런 아이디어를 좋다며 사는 사람이 있다니. 그 모든 것이 ‘나’라는 여자의 미개한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직도 버지니아 울프의 말처럼 남자들에겐 “인류의 절반이 본질적으로 자기보다 열등하다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점”인걸까. ‘그것이 실상 그가 가진 권력의 주요 근원 중 하나’이기에 기어이 여자를 폄하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걸까. 자신은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남녀가 평등하다고 믿는다는 몇몇 남자의 그 당연한 선언에 2015년에도 박수를 보내야만 하다니. 어릴 적에 생각한 2015년은 자동차가 날아다니는 미래였는데, 실제 겪은 2015년은 전근대였다.
이승환이 6시간 21분의 공연을 끝내던 순간. 이승환에겐 그의 노래 제목을 살짝만 바꿔서 말해주고 싶다. “어떻게 사람이 그래요.” 쉰한 살이나 된 사람의 얼굴이, 목소리가, 에너지가, 노래가, 공연이, 체력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6시간 21분을 꽉 채우고도 남을 만큼 히트곡이 있는 사람이, 끝없이 새로운 곡을 발표할 열정을 가질 수 있을까. 심지어 한 곡도 빠짐없이 좋기만 한 대단한 앨범을 발표할 수 있을까. 그리고 놀랍게도, 홍대 작은 공연장에서 인디 밴드들과 함께 공연을 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공연할 기회를 주려고 노력할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사람이 계속 업그레이드될 수 있을까. 6시간 21분이나 공연을 하고, 이틀 후 또 공연을 했다는 이승환에게 그의 이 곡을 다시 들려주고 싶다. ‘나의 영웅’.
- 에디터
- 장우철, 정우성, 손기은, 유지성, 양승철
- 일러스트
- 김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