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본드 역엔 관심이 없고, 브렉시트에 분노하는 남자. 누구보다 경쟁을 즐기면서, 촬영 중에 덜컥 사랑에 빠지는 배우. <파도가 지나간 자리>엔 이 모든 마이클 패스벤더가 있다.
그는 날카롭게 웃으며 걸어 들어왔다. 조지 클루니나 캐리 그랜트처럼 지적이고 ‘쿨’한 미소는 아니었다. 제임스 우즈처럼 끈적하지도 않았다. 마이클 패스벤더의 미소에는 거품이 없다. 캐스팅 담당자의 눈에 들려 애쓰는 신인 배우 혹은 싸구려 치과 광고를 연상케 하는 웃음이 아닌, (동물로 말하자면) 늑대 같은 얼굴. 눈썹을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만 빼면, 잭 니콜슨에 빗대보면 어떨까.
우리는 립아이 스테이크(미디엄 레어, 한 덩어리의 잉글리시 머스터드와 치미추리 소스를 더한)와 시라즈 와인을 시켰다. 벽에 유화가 잔뜩 걸려 있는, 고풍스러운 식당이었다. 9월 중순이지만 여전히 더운 날씨. 패스벤더는 메탈 밴드의 기타리스트 같은 옷차림이었다. 검은색 티셔츠와 반바지, 청록색 뉴발란스 운동화에 흰 양말을 신었다. 턱수염은 뒤엉킨 구리선처럼 제멋대로 자라 있었다. 날씬하지만 강인해 보였고, 그가 말을 할 때마다 팔뚝의 근육이 씰룩거렸다. 그의 옷차림에 그의 유년 시절이 녹아 있는 건지 궁금했지만(친구들과 투 마이크스라는 밴드를 조직했던), 그는 그저 피트니스 센터에 다녀온 직후였을 뿐이다.
사실 우리는 방금 전, 영화 편집실에서 <어쌔신 크리드>의 일부를 함께 봤다. 나오는 길에 저스틴 커젤 감독과 마주쳤는데, 그는 패스벤더를 “깐깐한 사람”이라 표현했다. 마냥 밝다고만 말하긴 어려웠던 감독의 얼굴. 패스밴더는 주연 배우이자 공동 제작자로 이름을 올리고 있고, 그에게 <어쌔신 크리드>는 무척 중요한 영화다.
<툼 레이더>, <레지던트 이블>, <워크래프트: 전쟁의 서막>. 컴퓨터 게임을 제대로 재구성한 영화가 있었나? “저도 알아요. <어쌔신 크리드>는 달라요. 유비소프트 사람들을 만났을 때, 그들은 가장 먼저 DNA 메모리에 관한 명제를 설명하기 시작했죠. 이를테면 ‘새들은 어떻게, 왜 겨울에 남쪽으로 이동하는 걸까?’에 담긴 원리. 달리 말하면 생존 본능. 영화의 근간이 되는 과학이자 이론이죠. 여러모로 영화화시켰을 때, 흥미로운 요소가 많다고 생각했죠.”
그 말이 맞든 틀리든, 이제 패스벤더를 단지 평론가들이 가장 사랑한 젊은 배우라 말하긴 어렵다. 그보다 제작사를 이끌고 투자할 힘이 있는, 감독이 될 준비를 마친 대중적 스타에 가깝다. <어쌔신 크리드>가 성공한다면. 실패한다면? 진퇴양난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이번이 패스벤더와의 첫 인터뷰는 아니다. 우리는 4년 전에도 같이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 스티브 맥퀸의 영화(<헝거>, <셰임>, <노예 12년>)를 통해 그가 불가능에 가까운 장벽을 뚫고 브래드 피트, 톰 하디, 맷 데이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같은 반열에 합류했을 때다. 그는 복잡하고 갈등을 겪는, 때로 사악한 인물을 연기하는데 강점이 있다. 금속과 전선으로 만든 로봇역을 맡았을 때도(<프로메테우스>의 데이비드 역) 남달랐다. 단순한 동작에도 악의를 투영하는 능력을 선보였달까. 패스벤더가 <엑스맨> 시리즈의 매그니토로 캐스팅되는데는 다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의 아일랜드 억양이나 흰 피부 때문이 아니다.
“직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만, 너무 심각하게 생각진 않으려고 해요. 전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지, 암을 치료하는 사람은 아니잖아요.”
하지만 실생활에서의 패스벤더는 꽤 융통성 있고 자유롭다. 그는 식단을 조절하고 운동을 즐기지만, 체중에 연연하지는 않는다. 술을 자주 마실 순 없지만 “그래도 나가서 춤추고 노는게 좋아요. 그걸 싫어할 수 있나요?”라고 말하는 남자다. 자신감 넘치지만 자신을 지나치게 과장하지 않는다. 재미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와 어울리는 하룻밤은 아주 즐거울 테고, 어쩌면 꽤 일탈에 가까운 ‘불법’을 같이 저지를 수도 있다.
단, 그의 그런 면모와 밝고 푸른 눈 뒤엔 또 다른 모습(어쩌면 우리에 게 익숙한)이 있다. 교활한 냉정함. 그리고 약간의 연약함. 패스벤더의 가장 큰 강점은 자기 검열이다. 그는 자신이 절대적으로 옳지는 않다는 것을, 실수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실패의 위험을 없애는 것. 이것이 그가 배역을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이유다. 그리고 언제나 자신이 과대평가되는 것을 경계한다. 모두가 꿈꾸는 경력을 쌓고 있지만, 그는 아직 자신이 최정상에 오르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저도 곧 마흔이 되죠. 아마 사생활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언젠가 최고의 연기를 하게 될 때가 올 거예요. 그때까지의 여정이 있을 것이고. 그러고 나면 내리막이 오겠죠.” 확실히 지금은 내리막이 아니란 얘기인가? “아니길 바라야죠.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 이렇게 미친듯이 일 하는 거예요.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서. 할 수 있는 한.”
그는 배우라는 직업이 수많은 이야기를 투영하는, 투명한 프리즘이 되는 일이란 걸 알고 있다. 그의 삶에 엄격한 규칙은 없지만, 확실히 자기만의 특별한 방식은 있다. “2012년쯤, <셰임>이 성공한 직후를 돌이켜보면, 베니스 영화제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기자들이 엄청 몰려와 있었죠.” 그때, 그는 가장 친한 친구들과 모터바이크를 타고 남아메리카로 훌쩍 여행을 떠났다. “저는 사람들이 ‘지금을 즐겨요, 마이클’이라고 말해주는 게 좋아요. 더 즐기며 살아야 하나 봐요. 요즘은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진 않아요. 속 끓이기보다 실용적으로 생각하죠. 나이가 들면서 제 스스로 에게 이로운게 뭔지,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는지 물어요. 난 누구지?”
패스벤더는 아일랜드 남서부에서 자랐다. 부모님은 킬라니에서 웨스트엔드 하우스라는 식당을 운영했고, 그는 10대 때 그곳의 주방에서 일했다. 그는 처음에 자신의 창의성을 음악에 쏟았다. “록스타가 되고 싶었죠. 성공하진 못했지만.” 그리고 연기에 도전했다. 야심차게도, 그는 자신의 회사부터 세웠다. 이름은 피넛 프로덕션. 패스벤더가 만든 첫 연극은 <저수지의 개들>이었다. “타란티노는 제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어요. 전 그가 던지는 논쟁들을 예나 지금이나 좋아해요.”
2008년 초여름, 서른한 살의 패스벤더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의 한스 란다 역 오디션을 봤다. 하지만 그 역은 이미 크리스토프 왈츠에게 돌아간 뒤였고, 그는 히틀러 친위대 장교 역으로 오스카상을 수상했다. “쿠엔틴이 제게 란다 역은 이미 결정됐다고 얘기했을 때, 꽤 실망했죠. 하지만 오디션을 끝까지 봤어요. 잃을 게 없었으니까. 그리고 호텔 방으로 돌아가서 진 토닉을 잔뜩 마셨죠. 타란티노 감독에게서 다신 연락이 오지 않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전화가 왔어요.”
패스벤더가 오디션에서 경험한 것은 두려움이 아니었다. 그는 20대 초반 이후 계속 굶주려왔다. 2001년 스티븐 스필버그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 작은 배역으로 출연했지만, 이후 계속 LA에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며 20대를 보냈다. 타란티노의 전화를 받았을 때, 그는 이것이 다시는 오지 않을 기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당연히 긴장했지만, 좋은 의미의 긴장이었어요. 그 역(아치 히콕스 역)을 맡고 싶었거든요. 기술적으로 준비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도약 할 준비는 돼 있었어요. 스티브 맥퀸 감독과 <헝거>를 찍었을 때, 그는 제게 이렇게 말했죠. ‘엎어져서 코가 깨지는 걸 두려워하지 마!’라고.”
마이클 패스벤더가 경쟁을 즐긴다는 말은 테일러 스위프트가 대중적이라는 말과 같다. 한편으로 무난한 사람이지만, 동시에 그를 트랙 위 슈퍼카에 태운다면, 그는 기록을 깨기 위해 하루 종일 차에서 나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패스벤더에게 승리는 꼭 기록을 단축하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는다. “직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지만, 제 자신에 대해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진 않으려 해요. 전 이야기를 전달하는 사람이지, 암을 치료하는 사람이 아니잖아요. 단지 위험을 감수하고 여태까지 해보지 않은 일에 도전하는 거죠.” 과연 오스카상에 대한 의지라면 어떨까? 누군가는 그가 <노예 12년>과 <스티브 잡스>로 두 번 후보에 올랐을 때 이미 수상했어야 한다고 말한다. “레오는 진작에 그 상을 받았어야 해요. 만약 2016년, 제가 상을 받았다면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화났을 거예요. 오히려 경력에 해가 됐을걸요. 오스카에서 수상하기 위해 작품을 고르냐고요? 아니요.”
어떻게 마이클 패스벤더가 차원이 다른 배우가 됐는지 궁금한가? 그에겐 분명히 타고난 재능이 있고, 아쉽게도 그 재능은 아무도 베껴갈 수 없다. “지금 마이클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과거에도 말론 브란도 이후론 전혀.” 스티브 맥퀸 감독이 말했다. 물론 패스벤더에게 훔칠 수 있는 부분도 있다. 그가 연기를 준비하는 방식. “시스템이에요. 단순한 반복. 대본을 받으면 처음엔 한번 쭉 읽어봐요. 그러고 다시 읽어요. 하루에 290쪽짜리 대본을 세번 보는데 8시간 정도 걸려요. 이 시점에는 연기를 하려 하거나, 허공에 대고 대사를 연습하면 안 돼요. 그냥 읽어야 해요. 연기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겠지만 꾹 참아야 해요. 그렇게 자고 일어나면 다시 대본을 읽어요. 아침을 먹고 나서 또 읽죠. 할 수만 있다면 자면서도 생각해요. 다음날요? 똑같이 하는 거죠.”
“내 신발에 오줌을 갈기는 것 같았죠.” 관용적 표현이 아니라, 패스벤더가 실제로 쓰는 말이다. 물론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적은 없다. 이것은 그가 결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생동감 넘치는 배우를 상대로 연기 했을 때 받은 느낌을 묘사한 말이다. “신을 장악한다고 하죠.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촬영할 때, 한 장면을 상대 남자 배우와 찍고 나서 엄마한테 곧장 전화를 걸었어요. ‘난 망했어. 이 사람 너무 잘해!’ 하지만 분명히 제 연기도 같이 흥미로워졌죠. 소매를 걷어붙이고 대결에 임하게 만들어준 달까. 그럴 때 정말 놀라운 일이 일어나요. <파도가 지나간 자리>의 알리 시아 비칸데르와도 그런 순간이 있었어요. 그녀는 모든 걸 불태웠죠. 엄청난 기회에 굶주려온 만큼, 그걸 잡을 줄 아는 사람이에요.” 곧 개봉하는 <파도가 지나간 자리>를 촬영하는 동안 비칸데르와 패스벤더는 연인이 됐다. <플레이스 비욘드 더 파인즈>를 통해 라이언 고슬링과 에바 멘 데스가 커플이 되는 등, 업계의 중매인으로 유명한 데릭 시엔프랜스 감독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는 걸까? “고전적인 사랑 얘기잖아요. 저는 두 사람 사이에 불꽃이 튈 것을 예상하고 캐스팅했어요.”
패스벤더는 더 이상은 얘기해주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둘이 실제로 연인이 된 것이 몰입에 도움을 줬고, 섹스 신은 지나치게 사실적이었다고 말했다. “글쎄요. 좋은 현상이네요. 어쨌든 영화에 도움이 된다면 좋은 거죠.” 동료 배우에 대한 진짜 감정이 연기에 방해가 되진 않았을까? “데릭은 배우들이 최대한 현실처럼 느끼는 환경을 조성하려 해요. 현실의 요소와 상상력을 조합하게 하는거죠.”
“사람들은 화가 나 있어요. 그래서 트럼프를 지지하죠. 그들은 자신의 권리가 박탈됐다고 느껴요. 과연 트럼프가 그들이 찾는 답일까요?”
베팅 업체 패디 파워의 배당률에 따르면, 패스벤더가 다니엘 크레이 그 다음 제임스 본드가 될 확률은 16분의 1로 나타났다. 톰 히들스턴와 에이단 터너와 이드리스 엘바가 유력한 후보로 떠오르는 상황. 패스벤더는 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싶어했다. “본드요? 아직도 그 루머가 떠돌고 있나요? 제임스 본드 시리즈에는 저보다 더 젊은 남자가 어울려요. 20대 초반. 예를들어, 요트 대신 영국 육군사관학교 군사 훈련부터 영화를 시작해보면 어떨까요? 그가 어떻게 007이 되었는지 궁금하잖아요. 예전엔 본드가 항상 영국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미국인도 상관 없는 것 같아요. 아, 제인 본드는 어때요? 여자 007요.”
패스벤더는 열아홉살이 되던 해부터 런던에 살기 시작했다. “런던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도시죠. 종교를 비롯한 여러 갈등이 상대적으로 적어요.” 하지만 6월 24일, 런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산산조각 났다. “저는 완전히 절망했어요. 많은 사람이 장애물과 장벽을 더 세우는 것에 찬성했다는 사실이 슬펐죠. 장래 유럽 내 갈등을 막기 위해 EU에 잔류하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다고 봐요. 우리는 두 번의 세계 대전을 겪었고, 아직도 난민을 비롯한 전쟁의 여파로부터 자유롭지 않아요. EU 탈퇴에 투표한 사람들에게 아무 계획이 없다는 것도 당황스럽고요.”
도널드 트럼프에 대한 의견도 명확하다. “사람들은 화가 나 있어요. 그래서 트럼프를 지지하죠. 그들은 자신의 권리가 박탈됐다고 느껴요. 그리고 이런 식으로 반격하죠. 과연 트럼프가 그들이 찾는 답일까요? 그야말로 자본가들과 함께 바로 우리를 아수라장으로 내몬 사람인데요.” 이렇듯 패스벤더는 항상 미래를 비관하는 사람인가? “우리는 멸종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중인 것 같아요. 아이를 갖고 싶지만, 가끔 그들이 마주하게 될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걱정돼요.”
- 에디터
- 글 / 조나단 히프 (Jonathan Heaf)
- 포토그래퍼
- MATTHEW BROOKES
- 스타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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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 폴 솔로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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