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한국 ‘한남’ 영화

2017.03.02이예지

한국 영화는 곧 ‘한남’ 영화다. ‘선 굵은 남자 영화’로 수식되는 이 세계가 풍자와 조롱의 대상으로 이동하는 중이다.

찾으려 들면 한국 영화의 거의 전부를 말해야 할 것이다. 그만큼 한국 영화계는 ‘한남’ 서사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친구>(2001)로 역사적 한 획을 그은 뒤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2011)로 일대 부흥기를 맞고, <신세계>(2012), <군도: 민란의 시대>(2014), <베테랑>(2015), <내부자들>(2016), <아수라>(2016), <마스터>(2016), <더 킹>(2016)에 이르기까지 남자들이 떼로 나오는 영화들은 ‘한남’의 직선적 세계관을 그대로 보여준다. 형사나 검사의 세계든 조폭의 세계든, 마초들의 힘겨루기에 따른 상승과 몰락이 이 영화들의 주된 골격이다. 이 세계의 주인공들은 대개 신분 상승의 욕망에 사로잡혀 나락까지 떨어진 후 재기와 복수를 위해 일말의 정의를 회복하려 시도한다. 이른바 ‘고영태’적 서사다. (그는 국가대표 펜싱 선수에서 호스트바를 거쳐 대통령 비선 실세 최순실의 오른팔 역할을 하다 최순실 게이트 증인으로 출석했다.) <내부자들>의 안상구(이병헌), <더 킹>의 김태수(조인성)의 서사와 궤를 같이 하는 그의 출현은 지극히 한국적인, 한국 영화적인 모먼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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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위 ‘알탕 영화(남자만 우글거리는 영화)’는 수직적 질서를 가장 노골적으로 내보일 수 있는 조폭의 세계를 출발점으로 삼아 <두사부 일체>(2001) 등으로 2000년대 초반을 풍미 했으나, 곧 <베테랑>, <내부자들> 등 조폭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정치와 재벌의 세계로 판을 확장한다. 이 구조 안에서 비극적 파국의 장렬함 혹은 통쾌한 복수의 카타르시스라는 두 가지 선택지가 주어지지만, 질서와 작동 원리는 근본적으로 같다. 상급자와 하급자 내지는 보스와 부하라는 수직적 질서, 내 편 아니면 곧 적이라는 패권주의, 강자가 약자 위에 군림하는게 당연하다고 믿는 ‘강약약강’(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논리 말이다. 이런 ‘한남’ 영화들엔 우스꽝스러울 정도로 비장한 무드와 과장된 폭력의 전시가 가득하다. 의미나 정보라곤 찾을 수 없는 욕지기들로 대사들을 채우고, 괜히 멀쩡한 벽에 대고 주먹질을 하거나, 상대를 협박한답시고 애먼 자기 부하를 냅다 갈기거나, 공연히 유리잔을 씹어 먹는 슬랩 스틱에 가까운 이상한 기행들이 남성성의 증표인 양 행해지기 일쑤다. 심지어 그게 멋지다고 믿는 듯하다. 이런 진정한 ‘수컷’됨을 증명하는 제스처들은 비단 조폭이나 형사뿐 아니라 소위 화이트칼라라는 검사 캐릭터들도 빈번히 사용하는 것이니, ‘한남’ 영화에서 폭력은 그저 당연한 문법인 것이다.

“우리가 남이가”(<친구>) 식의 남자들의 진한 의리도 빠질 수 없다. 여성들은 아내, 딸 등 지켜야 할 소유물이거나 유혹해 파멸시키는 ‘마담’ 등 팜므파탈로서만 기능하는 이 세계에서 깊은 감정과 진정한 유대감을 나눌 수 있는 동등한 주체들은 마치 남성들만인 것처럼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유대 관계 역시도 수직적 질서가 개입된 ‘호형호제’의 브로맨스라는 것이다. 한국 영화 관객들은 <신세계>의 정청(황정민)과 이자성(이정재), <밀정>의 이정출 (송강호)과 김우진(공유), <아수라>의 한도경 (정우성)과 문선모(주지훈), <공조>의 림철령 (현빈)과 강진태(유해진)에 이르기까지 수없이 많은 ‘형님’과 ‘아우’들의 멜로드라마를 접해왔다. <신세계>의 정청은 이자성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 브라더는 그냥 딱, 이 형님만 믿으면 돼야.” 한국사회의 선후배간 ‘밀어주고 끌어 주는’ 문화와 내 편을 만들면서 나머지를 배제 하는 일종의 ‘카르텔’의 문화가 멜로드라마틱한 낭만의 정조로 극화된 것이다. 소위 말하는 ‘개저비엘’(‘개저씨’와 비엘(보이즈 러브)의 합성어로, ‘개 같은 아저씨’들의 브로맨스로 이해하면 된다) 이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안정적인 흥행 성적을 보증 해온 ‘한남’ 장르에서 탈피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톱 배우들의 멀티 캐스팅, 높은 예산, 주요 투자·배급사들의 투자가 패키징된 ‘한남’ 영화들은 지금도 여전히 극장가를 선도하고 있다. ‘한남’들이 소위 ‘무슨 자들’ 같은 이름으로 힘을 겨루는 서사가 지나치게 반복되고 있다는 지적은 영화계 내에서도 팽배하다. 같은 세계의 계급도에서 체스 말만 바꾸듯 돌아가는 ‘그 나물에 그 밥’ 캐스팅도 ‘한남’ 영화의 지리함을 더해주는 요인이다. 배우 황정민과 하정우는 이미 한국 남자의 표상 그 자체이자 ‘한남’의 영혼을 담아내는 페르소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남형은 아닌 이 중견 배우들은 거나하게 취한 듯한 ‘술 톤’의 얼굴과 센 제스처, 여유롭게 건들대는 듯한 애티튜드의 연기로 숱한 ‘한남’들로 분해왔다.

그렇다면 이른바 상업영화, 선 굵은 남자 영화라는 틀에서 벗어나 예술영화와 멜로영화는 ‘한남’들의 습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 쪽도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다. 여기엔 수컷의 마초적 경쟁 세계에서 탈락된 후 자기 연민에 빠진 ‘한남’들이 가득하다. 여자를 정복하고 착취하는 것을 신파의 정조로 삼는 김기덕의 정말 ‘나쁜 남자’들과 작품과 현실 사이 메타가 붕괴된 홍상수의 ‘찌질하고 무력한 지식인 중년 남자’들이 양극에 포진해 있고, 멜로 장르에서는 ‘가진 것 하나 없는 거친 양아치지만 알고 보면 순애보’인 남자들이 유서 깊은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파이란>(2001)의 “세상은 나를 삼류라 하고, 이 여자는 나를 사랑이라 한다” 라는 카피는 이런 멜로영화들에서 정확히 ‘한남’의 정의를 내려주는 말이다. 삼류 양아치 강재(최민식)는 얼굴 한번 본 적 없으나 그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하는 중국 여성 파이란(장백지) 때문에, <똥파리>(2008)의 용역 깡패 상훈(양익준)은 여고생 연희(김꽃비) 때문에, <남자가 사랑할 때>(2013)의 사채업자 태일(황정민)은 채무자로 만난 호정(한혜진) 때문에 삶의 의미를 찾고 갱생하기 시작한다.

앞서 언급한 ‘알탕 영화’들과 ‘개저비엘’ 영화들 속 인물들이 남성들의 수직적 세계에서 낙오하거나 진입에 실패해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되면, 그때서야 비로소 여성들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 관계 맺음도 착취적이며 판타지에 불과하다. 이런 유형의 ‘한남’들은 가진 것 하나 없지만 자신을 위해주는 지고지순하고 순수한 여성들에게 위안을 얻고, 자신에 대한 자기 연민과 나르시시즘에 도취된다. 수컷들의 경쟁 세계에서 탈락한 ‘못난 자신’마저도 애틋해하는, 김건모의 노래 ‘미안해요’형 인물들이다. “그대의 생일날 따뜻한 밥 한번 못 사주고… 이 못난 날 만나 얼마나 맘 고생 많았는지….” 차라리 이쯤이 다행일까. 여기서 자기 연민이 아니라 자격지심에 빠지게 되면, <추격자>(2009)의 지영민(하정우) 같은 범죄자가 등장하니 말이다. (성 기능 장애를 가진 지영민은 여성들을 머리에 징을 박는 방식으로 살해해 억눌린 성욕을 해소하고 자존감을 회복하는 인물이다.)

다행스러운 건, 최근 영화들에서 ‘한남’들의 우스꽝스러움을 멋지게 혹은 연민하며 표현하기보다는, 속어를 빌려오자면 “좆이나 뱅뱅”이라며 풍자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시각이 생겨나고 있다는 점이다. 캐릭터부터 캐스팅, 세계관까지 앞서 나열한 ‘알탕 영화’의 끝판왕일 것 같았던 <아수라>는 그 모든 어리석은 남성성, 즉 ‘한남됨’을 조롱한다. <아수라>는 영화 속 ‘한남’들의 세계관, 행동, 제스처를 기존 ‘알탕 영화’가 그래왔던 것처럼 반복해 재현하되, 다섯 남자 중 어느 한 명에게도 이입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대신 그들 모두를 악하고 멍청한 인물들로 묘사하고 그에 알맞은 파멸을 선사한다. 영화는 영화 밖에서 그들의 모든 행위가 우스꽝스러운 것임을 알고 있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풍자와 위악의 스탠스를 취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평론가 김영진의 “많은 사람이 이 영화가 신물나게 보아온 마초 아저씨들의 숙명적인 비극을 극단적으로 과장하고 있다고 여긴다. (…) 이 영화는 기시감을 반복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시감을 주는 상황을 전개하는 척하면서 우리가 보고 싶지 않거나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을 경계 끝까지 밀어붙인 배짱의 산물”이라는 평은 이를 적절히 설명해주는 대목이다.(<씨네21> 1076호) <아수라>의 제목을 원래 <반성>으로 생각했다는 김성수 감독은 <씨네21> 1075호의 기사에서 “나는 지금 이 사회가 가진 문제들에 있어서, 특히 남자들이 문제라고 본다. 남자들이 말하는 의리, 충성 같은건 새빨간 거짓말이다. 그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남자들을 가지고 이야기해야 했다”고 연출의 변을 밝힌다. 그의 동료이자 <무뢰한>을 연출한 오승욱 감독은 “<아수라>는 결국 남성주접열전 혹은 지질열전”이라고 평한 바 있다.

그렇다면, 결국 태도의 문제다. 남근 숭상이냐, “좆이나 뱅뱅”이냐. 이 우스꽝스러운 ‘한남’들의 세계를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간 비장한 낭만과 카타르시스의 정조로 표현하느냐, 풍자와 위악의 정조로 표현하느냐의 문제란 뜻이다. 전자는 기성 ‘한남’들을 재생산하기만 할 뿐이고, 후자는 그를 비판적으로 가지고 놀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할 것이다. 남성 창작자의 자의식이 영화 속 ‘한남’ 캐릭터와 거리를 둔 케이스가 <아수라>만은 아니다. <아가씨>의 백작(하정우)과 고우즈키(조진웅) 캐릭터의 몰락은 ‘한남’의 마초적 질서를 조롱하고 전복한 대표적 예다. 아가씨고 하녀고 모두 제 손아귀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은 백작은 그녀들에게 철저히 희롱당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래도 자지는 지키고 죽어서 다행이다”라고 읊조리면서. 한재림 감독의 <더 킹>에서도 변화의 징조가 읽힌다. 궁지에 몰린 박태수(조인성)는 여성인 안희연 검사(김소진)에게 성기를 들이밀며 제압하려 하지만 그녀는 눈 하나 깜짝 않고 엄지를 치켜들 뿐이다. 이후 태수는 섬기던 제왕이 자기를 죽이려는 것을 알고는 정의의 편인 안희연 검사 쪽으로 태세 변환하고, ‘한남’적 세계관의 지배자였던 한강식(정우성)은 우스운 꼴로 전락한다. 기성 ‘한남’들이 추앙하던 왕좌와 남근에 대한 숭배가 이토록 보잘것없는 것임을, 그 방식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밝히는 것이다. 영화는 현실의 재현이지만, 같은 모습을 재현한 대도 태도는 그것을 다르게 구성한다. 더 이상 한국 영화 속 특징적인 남자들의 수직적 세계와 힘에 대한 선망, 의리, 호형호제의 우애는 멋있지 않고 올드하며, 조롱할 만한 것이 됐다. 더디지만 변화하고 있는 이 속도에 현실의 남성들도 발맞출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아직 ‘한남’이 한남동을 가리키는 줄 아는 사람이 적지 않을 줄로 안다. 한국 남자를 ‘한남’이라고 부를 때 감지되는 특별히 우스운 뉘앙스는 불과 얼마 전에 생겨났다. 하지만 여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들을수록, 남자들의 말과 행태를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어째서 ‘한남’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제야 시작됐는지 오히려 의아했다. 20173월, 당대의 한국 남자에 대한 다각도의 비판적인 질문을 던진다. 한국 남자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아니다. 페미니즘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한국 남자도 답변해야 할 때다.

    에디터
    글 / 이예지 ( < 씨네21 > 기자)
    포토그래퍼
    이승연, 황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