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트페테르부르크는 그대로 얼어버린 역사의 도시다. 화려함과 장엄함이 끝도 없이 엮어 초현실적인 광경을 만든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일리지비 푸드홀은 웅장하다. 스테인드글라스로 이루어진 건물의 거대한 정면을 포함하여 외관만으로도 혁명 전 아르 누보의 획기적인 작품이지만, 정말 더 초현실적인 광경은 건물 내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곳엔 늘 아몬드 페이스트의 일종인 마지팬부터 러시아인이 사랑하는 시럽에 절인 호두까지, 다양한 과자가 넘쳐난다. 화이트 초콜릿이 3킬로그램이나 들어간 레닌 모양 먹거리와 속에 과자가 가득 채워진 마트료시카 인형뿐만 아니라 차이코프스키의 춤추는 요정 사탕도 구매할 수 있다. 유리로 된 케이크 진열장은 새해 인사 글귀가 적힌 에클레어로 가득 차 있다. 또 다른 곳에서는 바위만 한 호밀빵, 허브로 강한 맛을 낸 치즈, 두툼한 연어를 팔고 있다. 자동 피아노는 혼자 래그타임 선율을 연주하고, 화려한 창문을 통해 번지는 무지갯빛이 내부 전체를 비춘다. 어둑해질 무렵 방문해 찻잔을 들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절대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된다.
어떤 이들은 해가 겨우 지는 백야 기간인 한여름 중 몇 주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가장 좋아한다. 하지만 나는 한겨울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훨씬 선호한다. 모든 수분까지 얼려버릴 태세로 덤벼드는 추위로 오히려 공기는 다진 딜 허브같이 신선하고 생강 쿠키같이 산뜻하다. 그보다 더 추운 날, 영하 15도까지 내려가면 광대한 네바강까지 꽁꽁 얼어붙는다. 며칠에 걸쳐 강이 천천히 얼어가는 그 과정을 보는 일도 흥미진진하다. 처음에는 둑 주변으로 얼음꽃이 피기 시작하다 서서히 종잇장 같은 얼음 조각들이 물의 흐름을 따라 넘실거린다. 서로 부딪치면서 그 몸집을 키우다 결국 하얀 북방족제비의 털처럼 강을 모두 감싸 안는다. 간혹 핀란드만에서 불어오는 엷은 안개가 오로라와 뒤섞여 성당과 궁전을 희미하게 비출 때가 있다. 그러면 건축물들이 반투명해 보여 화려한 궁전이 풍선 속에 들어간 것처럼 가벼워 보인다.
한겨울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건축가의 환상 속 작품 같다. 1917년 혁명 이후 1세기 가까이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모스크바에 가리워진 신데렐라 도시였다. 하지만 한때는 혼란 속에 페트로그라드, 레닌그라드라고 불리기도 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지난 십여 년 동안은 밝고 진보적인 스칸디나비아 마을 같은 모습으로 이미지를 알렸다. 이것이 표트르 1세가 이 도시를 세웠을 때 상상했던 모습이었을까.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어떤 곳인지 가장 알기 좋은 방법은 성 이사악 성당의 황금 돔 아래 있는 난간에 오르는 것이다. 화창한 날 가길 추천하는데, 바람이 매서워 잘 싸매고 가더라도 꽤나 한파에 시달리게 된다. 루프톱에 자리한 성인과 천사들의 어깨 넘어 북쪽으로는 해군 본부의 환하게 빛나는 뾰족한 첨탑과 음울한 페트로파블로프스크의 요새가, 북동쪽으로는 마치 빙하로 만들어진 듯한 겨울 궁전이, 남쪽으로는 구불구불한 모이카강과 화려한 아스토리아 호텔, 남서쪽으로는 마린스키 극장, 그리고 서쪽으로는 쾌활해 보이는 뉴홀랜드섬의 일부가 눈에 들어온다. 어느 방향으로나 보석함에서 값비싼 장식품들이 쏟아져 나온 것마냥 금칠을 한 돔이 조금씩 빛나고, 난간 위에서 내려다 보이는 도시의 모습은 하나의 웅장한 예술 작품 같다.
표트르 1세의 걸작인 이 도시는 예술품으로 가득하다. 에르미타주 박물관은 끝이 보이지 않는 복도와 수천 점의 작품으로 채워져 아마 한 달 동안 매일 방문해도 다 보기 어려울 것이다. 금과 다이아몬드 룸, 레오나르도와 라파엘에 집중하고 나머지는 지나쳐도 좋다. 아니면 규모는 조금 더 작으나 광대하고 복잡한 이 나라의 문화를 바로 이해할 수 있는 국립 러시아 박물관으로 발걸음을 돌려본다. 카자크와 배를 끄는 인부들의 모습을 담은 일리아 레핀의 명작들은 톨스토이의 복잡한 소설들과도 같다. 사실 톨스토이는 자신의 러시아성을 보여주고자 맨발에 농민들이 입던 기다란 셔츠를 걸치고 레핀 앞에서 포즈를 취한 위대한 작가, 음악가들 중 한 명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철 노선을 따라가보면 구소련의 예술 작품들로 가득 채워진 1950년대의 지하철 역들을 만나볼 수 있다.
나르브스카야 역에 가면 공산주의의 업적을 기대하는 우울한 얼굴의 선원들과 해맑은 학생들의 조각품이 있고, 푸시킨스카야 역에는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자세를 취한 현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조각상이 있다. 지하철 노선 중 가장 지하 깊이 자리 잡은 애드미럴티스카야 역에는 표트르 1세의 인상적인 벽화가 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는 어지러울 정도로 가파르다. 인생을 돌아볼 마음이 생길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땅으로 꺼지는 여정이다.
해가 떠 있는 낮 시간이 짧지만 강가를 따라 거닐며 다리나 맨션들도 곱씹듯 봐야 한다. 이곳에서 가장 좋은 광경은 운하를 따라 있다. 라스푸틴이 청산가리가 든 케이크를 먹은 유수포프 궁전, 해방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자의 폭탄으로 심하게 부상 한 자리에 세워진 피의 구원 사원, 폰탄카강에 위치한 파베르제 박물관은 추위가 뼛속을 파고들 때 피신하기 좋은 곳이다.
물론 눈이 돌아가게 휘황찬란한 ‘파베르제의 달걀’ 공예로 가득 차 있으며 손바닥보다 작지만 어마어마한 돈이 겹겹이 붙은 달걀과 함께 다른 러시아 보석 디자이너들의 작품들도 소장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니코틴 중독인 사람들을 위한 공간도 있다. 옥과 금으로 만든 담배 케이스, 러시아 주전자인 사모바르 모양의 라이터, 재떨이, 코담뱃갑, 시가 커터 등이 진열된 곳도 있다. 게다가 엄청난 부와 흉측함을 동시에 담고 있는 은으로 만든 테리어 머리 모양의 성냥갑도 있다. 이 모든 진열품은 너무나 당연한 한 가지 질문으로 연결된다. 도대체 모든 걸 가진 통치자에게 무엇을 선사할 수 있는가? 이렇게 화려한 담배 케이스가 불필요한 물건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심지어 공작석으로 만든 탁상용 기압계, 나침반, 시계, 벨, 사탕 상자를 포함한 데스크 세트까지 있으니 말이다.
폰탄카 건너에는 1917년 혁명 전까지 러시아에서 가장 오래되고 부유한 한 가문의 저택이었던 셰레메테프 궁전이 있다. 그 뒤에는 폭동 후 사용된 공용 주택이 있다. 대부분의 영어권 국가에서는 잘 알지 못하나, 바로 그곳에 혼란의 20세기 러시아 최고의 시인인 안나 아흐마토바가 거주했었다. 그의 남편은 반혁명 운동가로 총살되었다. 아들은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또한 온갖 비난을 받아내야 했다. 하지만 끝까지 당당하게 버텼고, 파괴할 수 없는 인간의 정신에 대한 당대의 손꼽히는 훌륭한 작품들을 남겼다. 아흐마토바가 거주하던 곳은 현재 박물관으로 바뀌었다. 박물관을 방문하기 전 반드시 그의 작품들을 알고 가야 하는 건 아니다. 작품을 모르더라도 자신을 겸손하게 만드는 매우 감동적인 경험이 될 것이다. 한 서정시에서 그는 ‘랜턴과 열쇠 뭉치를 들고’ 안뜰을 순찰하던 어두운 밤들을 묘사했는데, 실제로 그곳에 가면 문 옆에 랜턴이 놓여 있다. 방 벽에는 렌닌그라드 날씨에는 어울리지 않는 그의 베레모와 우비가 걸려 있다.
이곳에서 그는 두 번째 남편, 남편의 전처,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임시 거주자들과 오랜 기간 함께했다. 이 공동 주택은 비좁고 개인 공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구소련 시대의 공동체 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아흐마토바는 계속해서 감시를 당하고 있었다. 매일 아침 창문으로 자신의 모습을 감시하고 있는 비밀 요원에게 얼굴을 확인시켜주어야 했다. 밤새 그가 자살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상부에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아흐마토바의 가장 큰 두려움은 원고가 압수되어 자신의 작품들이 역사에서 영영 사라져버리는 것이었다. 때문에 그는 시를 종이 쪼가리에 적고 믿을 수 있는 친구에게 외우게 했다. 방문하는 친구들이 완벽하게 시를 외우면 즉시 그녀의 책상에 항상 놓여 있던 재떨이에 시를 적은 종이를 태워버렸다. 그 재떨이는 아직도 그곳에 놓여 있다. 아마 문학 역사상 가장 슬픈 재떨이가 아닐까. 파베르제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금과 은으로 만든 진열품들보다 말이다.
상트페테르부르크는 미술 작품과 시의 도시뿐만 아니라 음악의 도시이기도 하다. 차이코프스키는 숨을 거둘 때까지 이곳에 거주했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수도원에 위치한 그의 묘는 슬퍼하는 천사들이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기념물은 ‘백조의 호수’가 아닐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선 항상 ‘백조의 호수’ 발레극이 공연되고 있다. 마치 어느 극장에서라도 무대 위에 백조가 우아하게 날갯짓을 하고 있지 않으면 상트페테르부르크가 아닌 것처럼.
표를 구하는 가장 빠르고 확실한 방법은 매표소에 직접 방문하는 것이다. 예카테리나 2세가 설립했던 러시아의 가장 오래된 극장, 알렉산드린스키 극장의 가장 뒷좌석 표의 가격은 한 장에 10유로도 안 한다. 유독 추웠던 날, 이 극장 뒷자리에 앉아 공연을 관람했다, 소농민 역으로 서막을 연 발레단은 상트페테르부르크 건축물의 대체적인 색감인 버터에 가까운 노란색, 케이크의 아이싱 같은 분홍색과 페퍼민트색 의상을 입고 등장했다. 성대한 연출은 아니었지만 무대와 객석의 분위기는 굉장했다. 러시아 관객들은 이 작품뿐만 아니라 발레극이라는 장르를 매우 애정한다.
러시아의 또 다른 면을 만끽할 수 있는 건 바로 저녁 시간 예배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손꼽히는 최고의 합창단은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이다. 프레오브라젠스키 성당을 향해 얼음으로 뒤덮인 ‘여름 정원’을 지나다 보면 맑고 청량한 성당 종소리를 들을 수 있다. 정교회는 항상 어두우면서 따뜻하고, 예배의 구성은 기대보다 더 감동적이다. 촛불부터 찬송하는 성직자들, 자극적인 향의 향로, 가슴 벅찬 슬라브 예배식을 채우는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까지. 마음 가는 대로, 오래 있고 싶다면 오래, 잠깐 있고 싶다면 잠깐 있어도 문제되지 않는다. 발이 너무 아프거나 가슴이 너무 벅차 중간에 나가는 걸 막는 규칙 따위는 없다. 하지만 숙소로 향하는 밤길은 최대한 여유롭게 만끽하자. 이보다 더 러시아다운 러시아는 없으니까.
- 에디터
- Jonathan Bastable
- 포토그래퍼
- Alistair Taylor-You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