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를 켜도 청춘은 없다. 중장년 남자의 청춘 코스프레만 있을 뿐.
15년 전쯤 <일요일이 좋다> ‘X맨’에서는 연예인들을 커플처럼 만들곤 했다. 유명한 커플로는 김종국과 윤은혜가 있었다. 이 광경은 싸이월드가 유행하던 시절의 추억만은 아니다. 김종국은 요즘도 <일요일이 좋다> ‘런닝맨’에서 종종 여자 출연자와 커플이 되곤 한다. 여자 게스트가 나오면 고정 출연자들은 당연하다는 듯 김종국과 그를 연결시켜주려 한다. 이런 게스트 중에는 신인 배우 서은수도 있었다. 서은수와 김종국은 열여덟 살 차이다. 서은수가 출연한 날은 여성 연예인만 초대한 날이었는데, 그중 손담비는 ‘런닝맨’의 남자 출연자들로부터 나이가 많아지더니 ‘드세졌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손담비는 김종국보다 일곱 살 적다. 그리고 이 날 여자 출연자들은 자신의 유연성을 보여주거나 섹시한 춤을 추었다.
‘X맨’은 오래전에 끝났지만, 풍경은 변하지 않는다. 정확히는 그 자리를 지키는 남자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지금 김종국이 <미운 우리 새끼>에 출연 중인 것은 우연처럼 보이지 않는다. 김종국을 비롯한 <미운 우리 새끼>의 출연자들은 30대 후반~40대 남자로, 패널로 출연한 어머니들이 지켜보는 VCR 속에서 철없는 아들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즐기는 취미가 있고, 미혼이며 경제적 능력이 좋은 그들은 자신의 인생을 즐긴다. 그것은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사이 김종국과 함께 출연했던 그 시절의 젊은 여자 연예인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리고 ‘런닝맨’에서 여전히 유재석, 김종국, 하하가 20대 초반의 여자 연예인을 보며 즐거워하는 동안 젊은 남자 연예인은 어디 있는 걸까. 20대 시절부터 ‘X세대’로 사회적 주목을 받았던 지금의 30대 후반~40대 이상 남자들은 여전히 TV의 한가운데서 자신들이 여전히 젊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있다. 반면 최근 이병헌은 <미스터 선샤인>에서 스무 살 어린 김태리와 연기한다. 같은 제작진이 만든 <도깨비>의 공유와 김고은은 열두 살 차이다. 하지만 제목에서 그들의 나이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도깨비>의 공유는 아예 불멸의 존재처럼 묘사되곤 했다. <나의 아저씨>처럼 ‘아저씨’라는 것을 내세울 땐 이 아저씨들이 얼마나 착하고, 어리숙하며, 젊은 여자에게 선의를 베푸는지 강조한다.
20~49세 여성의 독신자율은 2016년 49퍼센트에 달했다. 비혼자 수는 늘어가고 있고, 배우자나 자식이 없는 만큼 자신을 위해 돈을 쓸 수 있다. 이들 중 남성은 익히 알려진 것처럼 여성에 비해 도서, 공연 등에 돈을 쓰지 않는다. 반면 평균 임금은 높다. TV는 중장년, 특히 남성 시청자를 신경쓸 수밖에 없다. 남성이 즐겨 보는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의 음반을 살 가능성은 낮지만, CF로 광고하는 제품을 소비할 가능성은 높다. 여기에 경제적 여력이 있는 장년층까지 끌어들이면 수익 구조는 명확하다. <미운 우리 새끼>가 대표적인 예다. <미운 우리 새끼>의 평균 시청률은 20퍼센트를 넘는다. 시청률이 10퍼센트만 넘어도 성공인 시대에, <미운 우리 새끼>처럼 열심히 TV를 보는, 심지어 경제력도 높은 시청자층을 방송사가 마다할 리 없다. 그것을 문제라고 할 수만도 없다.
그러나 <미운 우리 새끼>, ‘런닝맨’ 등 X세대의 남자들이 주축이 되는 프로그램은 하나같이 20년 전에 머물러 있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X세대, 또는 이후의 여성 세대가 출연해 지금의 기혼 여성이 가족과 사회에서 겪는 다양한 문제를 보여준다.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 역시 멜로 드라마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데이트 폭력, 결혼, 직장 내 성희롱, 직장인으로서의 성취 등을 다뤘다. 반면 남자가 주인공이 될 때는 판타지 로맨스의 절대적인 존재가 되거나, ‘런닝맨’처럼 ‘X맨’ 시절에 했던 행동을 나이 먹어서 그대로 반복하고 있다.
<무한도전>이 사라져 간 과정은 업데이트되지 않은 중년 남자의 공포와 비극을 보여준다. 전성기 시절 이 프로그램은 한국에서 가장 앞선 무엇이었다. 하지만 <무한도전>이 시즌 1 종료라 쓰고 사실상 종영이라는 결정을 내릴 때쯤 됐을 때는 오히려 <무한도전> 이전의 시절로 돌아가 버렸다. 그들은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하며 PC방, 유튜브 등 20대 문화를 배워보려 하며 장난을 치고, 결국 자신들의 친구를 불러 노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남자 출연자들만의 프로그램이다 보니 친구들도 대부분 남자였다. 한때 사회적 이슈도 제시할 수 있었던 프로그램이 20대부터 만나던 친구들과 함께 그때 듣던 노래를 같이 듣고, 요즘 20대가 좋아하는 게 뭔지 이야기한다. 20대가 궁금하면 20대를 출연시키면 될 일이다. 하지만 <무한도전>에서는 1982년생 조세호가 아직도 자리를 잡지 못한 동생 취급을 받는다. 이 중년 남자들끼리 수능을 보고 점수가 낮다며 놀리는 장면은 <무한도전>에서 정말 보고 싶지 않았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중년 남자들은 거대하게 고인 물처럼 자리를 잡고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다. 종영한 <슈가맨>, 방영 중인 <히든싱어>, <불후의 명곡> 등은 모두 1980~1990년대에 전성기를 보낸 뮤지션들에게 리스펙트를 보낸다. 젊은 가수가 리메이크 곡을 부르면, 40대 이상 남성 MC나 뮤지션이 그들을 평가한다. <일밤>의 ‘복면가왕’에서 패널석 한가운데 팔짱 끼고 앉아 출연 가수에 대해 평가하는 김구라는 이 풍경이 의미하는 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그들이 지식을 뽐내며 음악 ‘부심’을 부리는 사이 여성 패널들은 그 시절 그 가수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표현한다. 무대 위 젊은 가수들은 공손히 ‘레전드’ 뮤지션과 패널의 평가를 받는다. 그것이 아니면 그들에겐 좀처럼 기회가 없다. <아는 형님>의 고정 출연자들은 모두 중년 남자들이다. 그들은 교복을 입은 채 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논다. 최근에는 게스트로 걸그룹 모모랜드의 주이, 헬로 비너스의 나나, 씨스타 출신 보라 등이 출연했다. 40대 남자들이 스무 살 가까이, 또는 그 이상 차이 나는 여자 연예인과 함께 남녀의 연애 심리에 대해 이야기한다. 지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예능 프로그램 중 하나의 풍경이다.
요즘 20대 출연자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은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그들은 공손한 자세로 심사위원, 또는 트레이너의 평을 경청한다. <믹스나인>에선 YG엔터테인먼트의 오너 양현석이 20대 걸그룹 멤버에게 나이가 많지 않냐고도 말했다. 20대 출연자가 절대 다수인 프로그램이지만 주인공은 40대 남자고, 그는 데뷔를 미끼로 마음껏 권력을 행사한다. 그 약속마저 지키지 않았지만. 이 과정에서 20대의 삶과 고민은 TV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비긴 어게인>은 이 프로그램의 좋은 점과 별개로 지금 예능 프로그램의 헤게모니를 보여준다. 시즌 1의 출연자는 유희열, 윤도현, 이소라, 노홍철이었다. 20대 출연자는 없다. 누구나 인정할 만한 중년 여성 뮤지션이 출연하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전달자는 마흔 살의 남자 예능인이다. 시즌 2는 이수현, 헨리, 로이킴 등 젊은 뮤지션들이 참여했지만 여전히 중심은 자우림의 멤버 두 명, 윤건, 박정현 등 <불후의 명곡>에서 ‘전설’로 출연할 수 있을 연령대의 뮤지션들이다. 그들은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어 해외에서 버스킹을 하며 다시 삶의 이유를 찾아 나간다. 그들에게 필요한 일일 것이다. 다만 지금 그런 고민을 하고, TV에서 보여줄 기회가 더 절실할 세대는 따로 있다.
<불타는 청춘>의 제목은 상징적이다. 청춘이 지난 지 한참 된 사람들이 옛 시절의 추억을 되살리지만 정작 청춘이 놀고, 고민하는 모습은 TV에서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중장년이 스스로를 청춘이라고 할 뿐이다.
한 세대의 시청자가 단체로 이상해졌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이 세대가 최근 한국 사회의 정치 사회적 이슈에 대해 어떤 입장이었는지 생각해도 그렇다. MBC <나혼자 산다>는 최근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이지만, 중장년 남자가 주인공은 아니다. 이 프로그램도 처음에는 비혼 남자들 위주의 프로그램이었지만, 어느새 여러 세대의 남녀가 사는 방식을 보여주기 시작했고, 인기는 더 높아졌다. 올해 음악 산업에 가장 영향을 끼친 리얼리티 쇼 중 하나는 힙합을 통해 10대의 학교 바깥의 삶을 보여준 <고등래퍼>였다. 지금 TV에서 청춘을 삭제한 것은 시청자 때문일까, 아니면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들이 ‘X맨’ 시절에 멈춰있기 때문인 걸까? 아마도 이 두 가지가 어느 정도 겹칠 것이다. 그 사이 유튜브는 대박이 났다. 글 / 강명석(<IZE> 편집장)
- 에디터
- 손기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