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희애는 지금 [부부의 세계]에서 머리카락 한올까지도 연기한다. 섬세한 연기란 무엇인지 모두 보여줄 기세로.
검은색 머리카락이 얼굴에 달라붙다시피 할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아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한다. 이 차분한 분위기는 자신을 배신한 남편과 주변 사람들을 보며 복수를 곱씹을 때마다 섬뜩함으로 변한다. 단정했던 머리가 마음껏 흐트러지는 순간은 남편의 외도를 몰랐을 때 그와 사랑이 듬뿍 담긴 섹스를 하던 순간이거나, 복수를 위해 남편의 친구를 협박하는 수단으로 비뚤어진 욕망에 부응해주는 척 광적인 섹스를 할 때뿐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에 의존하던 순간과 반대로 혐오를 느끼게 된 순간의 흐트러짐은 언뜻 보이는 모양새만 비슷할 뿐, 차분함과 섬뜩함 사이의 간극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수단이다.
절대 흐트러지지 않을 것 같았던 지선우의 일상에 생긴 변화를 대변하는 듯 보이는 검은 머리카락의 움직임. 이 움직임은 지선우를 맡은 김희애가 극적인 서사의 굴곡을 끌어가는 수단이나 다름없다. 김희애가 지선우의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리며 완벽한 가정과 영원한 사랑이라는 멋들어진 명분을 섹스에 취한 몸짓으로 표현할 때 그는 사랑과 결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개념을 “배설”과 동일시하게 된 뒤에 그가 섹스를 하는 장면은 반대로 사랑과 결혼의 부조리한 면을 낱낱이 까발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신감에 아슬아슬하게 삶을 지탱하고 선 여성의 두려움과 분노를 “여자도 욕망이 있다”는 한 마디로 설명한 뒤 침대로 뛰어든 지선우의 눈빛에는 흔한 불륜, 치정 등의 키워드를 다루는 드라마에서 볼 수 없는 쾌감이 어려있다. 단정한 머리, 그에 어울리는 우아한 태도를 늘 견지하는 지선우를 통해 김희애는 광기를 담은 눈빛으로 말한다. 자신의 삶이 망가지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상류층 여성들의 이야기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정상 가족이라고 불리는 가족의 모양새가 얼마나 허황된 개념인지 보라고. 남편의 옷을 정리하다가 나온 체리향 립밤을 보고서도 “그래도 체리향은 너무했다”며 웃으며 넘어가는 게 여유가 아니라 두려움에서 기인한 감정이라는 걸 회차가 거듭될수록 한 꺼풀씩 벗겨내는 김희애의 섬세함은 드라마를 넘어선 현실로 다가온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돕는 기업가가 되었던 <허스토리>, 퀴어 여성의 고뇌를 말했던 <윤희에게>로 그가 보여준 현실과 긴히 맞닿아있기도 한, 김희애가 만드는 세계는 현실 그 자체라 더 무겁다. 제도권에 뒤통수를 맞거나 제도권에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여성들 앞에 산재해있다는 현실 말이다. 김희애가 연기하는 지선우를 보며 동정심이 아닌 쾌감이 드는 것도 그래서다. 그가 묘사하는 지선우는 신의성실한 아내, 며느리, 엄마라는 단어가 여성을 어떻게 옥죄어왔고 그 결과 어떤 세계를 마주하게 되는지 경고한다. <부부의 세계>를 통해 김희애가 그려내는 세계의 그림은 이토록 적나라하다.
- 에디터
- 글 / 박희아(대중문화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