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남극이 얼음 속에 숨긴 본색

2020.05.20GQ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는 유일한 땅 남극은 개척자에게만 얼음 속에 숨긴 본색을 내보인다.

남극 바다에 생성된 얼음 터널.

남극 위치어웨이 캠프 근해의 전경.

얼음이 된 파도의 높이는 15미터를 훌쩍 넘는다.

빙벽 등반을 하는 사람들.

눈으로 덮여 끝없이 펼쳐진 설원.

파도 물결 그대로 얼어버린 바다.

돔 형태의 위치어웨이 캠프.

빙하 속에 형성된 얼음 동굴.

얼어붙은 호수 위를 걷는 일행.

이런 집착을 이상하거나 특별하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남극에서 돌아온 후에도 환영에 사로잡히듯 이따금 하얀 기억에 잠식되곤 했다. 반짝이는 얼음 강과 푸른 그림자를 드리운 거대한 눈의 절벽, 하얗게 뒤덮여 추상적인 형태를 그려내는 지형이 생동하게 펼쳐졌다. 남극은 지구 어디에서도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대륙이다. 가장 춥고 건조한 동시에 살결을 얼리는 칼바람이 몰아치는 곳. 하지만 정작 떠난 이에겐 절실한 그리움을 남기는 땅이 남극이다.

지구의 끝자락을 찾기 위해 케이프타운발 비행기에 오른 우리는 망망한 바다를 건너 5시간 반 동안 남쪽으로 향했다. 두껍게 쌓인 구름 때문에 한참 동안 밖이 보이진 않았지만, 이륙하고 3시간이 지나자 시야가 점차 맑아졌다. 푸른 바다를 부유하는 빙하가 시야에 들어왔다. 현재 고도가 1만 미터라는 비행 정보를 보고 나서야 얼음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얼음덩이의 크기가 웬만한 국가만 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차가운 공기를 뚫은 비행기가 드디어 활주로에 착륙했다. 기온은 영하 10도. 옷을 네 겹 정도 껴입으면 적당한 날씨였다. 기내에서 미리 복장을 갖춘 우리는 싸늘한 바람과 손에 잡힐 듯한 빛 속으로 걷기 시작했다. 활주로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보관한 텐트와 반구형 막사 몇 개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는 광대한 땅이었다. 오른편 먼 발치엔 청록빛 하늘 아래 끝없이 쌓인 눈과 얼음 사이로 뾰족하게 솟은 산들이 보였다. 누군가 ‘높은 산’이라고 뭉뚱그려 말해줬지만, 해발 고도가 몇 미터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마땅한 비교 대상 없이 벌판이 펼쳐지는 남극에서 지형의 규모를 짐작하기란 불가능했다. 거대한 봉우리일지, 1시간 정도면 후다닥 올라갈 수 있는 능선일지 알 길이 없었다.

현재 남극 대륙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도착 시 여권을 내보이거나 입국 심사를 거칠 필요가 없다. 국경 검문소도 없다. 총 7개 국가가 영토를 주장하지만, 아무런 법적 효력이 없다. 어떠한 나라에도 속하지 않는 땅은 지구상에서 남극이 유일하다. 별다른 역사도 없다. 수천 년 동안 미지의 땅으로 머물렀을 뿐이다. 다만 실제로 발견되기 전부터 사람들은 그 존재를 짐작해왔고, 고대 그리스의 학자들이 남쪽의 신비로운 대륙에 대해 언급한 기록도 전해진다. 일부는 온화한 날씨와 비옥한 토양을 바탕으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곳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1820년 1월, 남극이 처음으로 발견된 시점부터 전설처럼 내려온 믿음은 산산조각 났다.

수염이 얼어붙는 추위를 뚫고 깃대를 꽂으려는 탐험가와 미치광이들의 정신 나간 도전기가 남극의 역사를 채워나갔다. 공허로 채워진 설원에서 그들은 나침반에 의지하며 목표점을 찾아 조금씩 전진했다. 1백 년 전만 해도 남극 대륙은 세계지도의 마지막 공란이었다. 누구도 도달하지 못한 지구의 사각지대라는 사실은 뎅기열을 무릅쓰고 보르네오의 음습한 정글을 탐험하거나 창칼을 뚫고 아프리카 쟁탈전에 참여할 기회를 놓쳐 낙심한 이들을 끌어들였다. 1909년에 남위 88도 23분에 도달한 어니스트 섀클턴은 남극 탐험이 인류에게 남겨진 마지막 위대한 여정이라고 했다. 남극 탐사는 결코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험난한 지형과 극한의 추위를 극복한다는 의미 이상이 기다리고 있다. 남극을 거쳐간 탐험가들은 추억에 사로잡혀 여생을 보냈는데, 대부분 살아 있다는 감각을 느끼게 해준 유일한 곳이라고 회상했다. 테라 노바 원정대의 앱슬리 체리-가라드는 영국으로 돌아온 후 남극에서 사용했던 노트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가 그 시절을 잊을 수 있을까?”

원래대로라면 남극에서의 여정은 생존을 위한 사투가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과정이다. 눈보라는 텐트를 사정없이 두들기고, 보온병에 담아둔 뜨거운 물은 순식간에 얼어버린다. 바람이 잦아들 때까지 침낭을 몇 겹이나 두른 채 텐트 안에 숨어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더 이상 목숨을 걸면서까지 찾을 필요는 없다. 현대의 극지방 탐험가들이 모여 설립한 여행사 ‘화이트 데저트’가 추위와 장애물을 피할 수 있도록 일정을 짠 덕분에 목숨을 건 고행을 피할 수 있다.

화이트 데저트의 도움을 받는 남극 탐험은 위치어웨이 캠프 Whichaway Camp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퀸 모드 랜드 Queen Maud Land의 동쪽에 자리 잡은 숙소로, 7개의 돔형 조립식 건물로 구성된다. 암반이 노출된 몇 안 되는 길을 따라 땅에 단단히 고정되어 갑작스러운 폭풍을 대비한다. 장엄한 여로를 앞둔 탐사객을 위해 이곳까지 물자를 나르는 일은 우주 탐사에 견줄 만한 수준이다. 외계 행성에 착륙한 개척민이 등장하는 SF 영화의 촬영 세트와 흡사하다. 그 외에 더 큰 돔이 6개 있는데, 그중 3개는 모피를 덮은 소파와 다양한 책을 구비한 공용 공간으로 사용된다. 남극에 들어선 사치스러운 시설을 체리-가라드가 봤다면 경멸을 담은 콧방귀를 뀌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화이트 데저트가 남극에 베이스캠프를 지을 때 자연환경 훼손을 걱정하는 여론도 있었다. 일리 있는 주장이다. 남극은 기후 변화의 영향이 가장 먼저 시작돼 지구 오염의 현 상황을 가늠할 수 있는 땅이다. 지구상 얼음의 90퍼센트가 남극에 있지만 기온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빠르게 상승하는 중이다.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 12도나 올랐다. 현 상황을 인식한 화이트 데저트는 캠프 건립 전부터 환경 보존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남극에서의 활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탄소를 공인된 프로그램으로 상쇄한다. 태양열 발전을 이용한 난방과 수도를 도입했고,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도 완전히 없앨 예정이다. 쓰레기와 폐기물은 전부 남아프리카로 보내 재활용을 유도한다. 마지막으로, 캠프의 수명이 다하면 흔적도 없이 철거할 예정이다. 건립 초반 제기되었던 우려는 화이트 데저트 구성원들의 명쾌한 해결책으로 점차 잦아들었다.

위치어웨이 캠프가 제공하는 경험은 독특하고도 특별하다. 남극 대륙으로 가는 가장 흔한 방법은 크루즈를 이용한 뱃길이다.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로 상륙한 뒤 그룹별로 펭귄, 물개 등 바다 동물을 구경하고 돌아가는 구성이다. 매년 5만 명 이상이 그렇게 남극을 둘러본다. 남극 대륙 위에서 직접 묵고 가는 방문객은 1백60여 명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5명씩 소그룹을 구성해 때로는 두 발로, 때로는 캠프에 있는 6륜 구동 트럭을 타고 남극 깊숙한 곳으로 향했다. 먼 거리를 갈 때면 화이트 데저트가 소유한 바슬러 BT-67 프로펠러기를 에어 택시처럼 이용했다. 귀하고도 드문 특권이었다.

남극에선 백야 현상이 길게는 반년 동안이나 지속된다. 희부연 파란색이 감도는 아침, 한낮의 선명한 백색과 오후의 붉은빛, 그리고 진줏빛이 내려앉은 저녁. 지평선과의 각도를 달리하며 흩뿌리는 빛으로 하루의 색이 시시각각 변했다. 강 표면은 바람이 불어닥친 방향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주름이 서 있었다. 아이젠을 덧댄 신발을 신고 강을 건널 때면 이빨을 가는 괴수처럼 으드득거렸다. 얼음강과 절벽,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공활한 배경은 미니멀리즘의 극치처럼 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선이 하늘과 땅을 명료하게 구분 지었고, 눈으로 덮인 여백은 광활했다.

시선의 폭을 좁히자 원경으론 보이지 않던 세세한 지리적 특성이 눈에 들어왔다. 얼음강을 디딘 발 아래로 갈라진 금이 거미줄처럼 펼쳐졌다. 얼음에 갇힌 먼지나 암석 파편에 의해 생겨난 크라이요코나이트 Cryoconite 구멍은 크리스털과 기포를 정교하게 엮은 작품처럼 보였다. 호수 건너편에서는 이따금씩 절벽의 일부가 쪼개져 벽력같은 소리를 내며 적막을 깨뜨리기도 했다. 눈으로 덮인 가파른 고개를 넘자 절벽 꼭대기로 향하는 비탈진 지대가 나타났다. 함께 로프에 묶인 채 경사면을 오르는 우리가 장엄한 자연에 달라붙은 티끌처럼 보였을 것이다. 능선에 이르러서는 아이젠을 벗어 바위틈에 잘 숨겨두고 빙하로 둘러싸인 암봉을 뜻하는 ‘누나탁 Nunatak’으로 기어 올랐다. 이윽고 정상에 도달하자 우리가 남긴 발자국을 제외하곤 어떤 생명체의 방해도 받지 않은 설원과 빙원이 한없이 이어졌다.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무한한 지평에 덩그러니 선 나의 존재는 너무 미미했다.

남극을 평생의 터전으로 삼고 사는 사람은 없다. 각국에서 세운 연구 기지의 과학자와 근로자도 결국 고향으로 돌아갈 방문객이다. 인간만 부재하는 땅은 아니다. 대륙의 규모에 비해 생명의 기척 자체를 감지하기 어렵다. 나무나 관목이 자라지 않고, 조류나 이끼만 드문드문 눈에 띈다. 곤충은 성충으로 성장해도 2.5센티미터 정도밖에 안 되는 날개 없는 각다귀 정도다. 하늘을 나는 조류의 종류도 그다지 다양하지 않다. 물고기를 주식으로 삼는 흰바다제비가 그나마 개체수가 풍부한 편이고, 어미 없는 흰바다제비의 둥지를 털어 새끼를 낚아채는 도둑갈매기가 생태 순환 고리에 균형을 잡는다. 남극의 혹독한 환경은 이들 생명체의 번식 방법에도 영향을 끼쳤다. 가장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도둑 갈매기는 알을 두 개씩 낳도록 진화했다. 먹을 것이 부족한 땅에서 나약한 새끼를 다른 새끼에게 먹이기 위해서다.

반면 바다는 크릴새우 덕에 생명이 넘쳐난다. 남극해의 먹이사슬 밑바닥에 위치한 크릴새우의 총량은 5억 톤으로 추정된다. 지구에 존재하는 어떠한 동물종보다도 큰 생물량이다. 흰수염고래를 비롯한 다양한 종의 고래가 남극해를 찾아 냉장고를 비우듯 크릴로 배를 채운다. 남방코끼리물범과 남극물개, 레오퍼드바다표범 등도 남극에서 살아가지만, 가장 유명한 종은 역시 펭귄이다. 암컷이 먹이를 구하러 떠난 동안 알을 품고 무자비한 눈보라를 이겨내는 수컷 황제펭귄의 희생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우리는 노이마이어 III 기지 근처에 있는 펭귄 군락을 찾았다. 무리에 다가가자 닭장에서 날 법한 소리가 들려왔다. 꽥꽥거리고 끽끽거리는 합창이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괴기스럽게 들릴 수도 있지만, 펭귄 한 마리 한 마리에겐 신분증과 같은 역할을 한다. 펭귄은 목청소리로 서로를 식별한다. 한겨울의 극심한 강풍 속에서도 찬 바다에 첨벙첨벙 뛰어드는 펭귄의 기개는 꺾일 줄 모른다. 하지만 여름이 한창인 펭귄 서식지에는 느슨한 기류가 흘렀다. 검은 벨벳으로 만든 이브닝 재킷을 걸치고 샴페인을 든 채 담소를 나누는 사람들처럼 유유자적하게 시간을 보냈다. 얼음 위에 털썩 엎드린 채 날개를 저어 미끄러져 내려가는 펭귄들도 보였다. 얼음 서핑이 끝나면 미끄럼틀에서 내려온 아이처럼 일어나 다시 뒤뚱뒤뚱 걷곤 했다.

영국의 동물학자 데이비드 애튼버러는 황제펭귄의 삶을 두고 가장 위대한 생존 행위이자 가장 로맨틱한 러브스토리라고 했다. 사려 깊고 친절하며, 무엇보다 행복한 가정을 중시한다. 코끼리물범 수컷들이 가능한 한 많은 암컷과 짝짓기를 하기 위해 탐욕의 혈투를 벌이는 반면, 수컷 황제펭귄은 반려자를 섬세하게 대한다. 육아에도 기꺼이 참여한다. 배우자 서로가 달콤하게 속삭임을 주고받고, 하나밖에 두지 않는 자식에게도 다정한 육성을 들려준다. 때때로 부모 중 하나가 고개를 숙이고는 켁켁거리며 새끼 펭귄의 주린 입에 물고기를 게워내는데, 이마저도 사랑의 연장선에 있어 우아하게만 보인다.

이튿날 방문한 남극해는 꽁꽁 얼어 있었다. 해안가에서 개빙 구역까지 약 1백 킬로미터에 걸쳐 빙판이 펼쳐졌다. 울렁거리던 파도가 그대로 얼어버려 거대한 얼음 요철이 패턴처럼 반복됐다. 파도 사이에 난 골에 서서 차갑게 몰아치는 바람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장엄한 지형과 불순물이 조금도 없는 공기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는 동안 삶을 채우는 불안과 고민, 사소한 성공과 사소하지 않은 실패 모두 희미해져 갔다. 묘한 해방감이었다. 시리도록 찬 공기에 자신을 던지고 나서야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감정이라면, 언제고 다시 남극을 찾을 것이다. 지구 끝으로 파고드는 고생을 감내해야 한다 해도.

Getting Here
화이트 데저트는 11월에서 2월 사이 다양한 일정의 상품을 제공한다. 8일 동안 여행하는 패키지 상품의 경우 숙식 및 케이프타운-남극 이동을 포함해 1인당 약 1억원에 판매한다. white-desert.com

    Stanley Stewart
    포토그래퍼
    Tom Park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