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봐도 봐도 안 질리는 내 인생 영화 6

2022.03.28김은희

난 그거 좋아해. 내겐 너무 사랑스러운 영화.

<당나귀 공주> 자크 드미, 1970년 
당나귀 가죽을 뒤집어쓴 공주가 있다. 왕의 욕망에 쫓겨, 그녀는 도망친다. 이 도피를 라일락 요정이 돕는다. 단언컨대 자크 드미 감독의 <당나 귀 공주 Donkey Skin>만큼 노골적인 ‘공주 영화’는 없다. 화려한 마술과 기적, 환상의 장치가 차례대로 등장한다. 어느 것도 현실적이지 않지만, 모두가 진지하게 행동한다. 이 영화는 어떻게 해피엔딩에 이르는가? 생각해보면 보물을 낳는 당나귀를 곁에 둔 것은 운명이었고, 부모에게 칭얼대는 왕자와 만난 것은 숙명이었다. 오직 하나 ‘사랑의 케이크’를 만드는 레시피만은 공주가 스스로 찾아낸다. 아주 진지한 태도로, 그녀는 누룩과 설탕의 양을 측정한다. 이 장면 때문에 나는 <당나귀 공주>를 좋아한다. 극단적으로 비현실적이지만, 미묘하게 실제와 맞닿아 있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꿈꾼다. 환상은 불행으로부터 그 누구도 구해내지 못하지만, 환상의 아름다움은 현실을 믿게 만든다. 동화 같은 사랑은 없다. 그럼에도 우린 케이크를 빚는다. 꿈꾸지 않는 것보다, 재 묻은 신데렐라가 더 낫다고 믿으면서. 이 우스꽝스런 동화의 향연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결국 모든 영화가 추구하는 ‘대안적인 삶’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지현(다큐멘터리 감독, 영화 평론가)

<컷스로트 아일랜드> 레니 할린, 1995년 
망해도 너무 망하면 기네스북에도 오를 수 있다. 총 제작비 9천8백만 달러가 투입됐으나 북미에서 고작 1천만 달러의 매출을 올려 역대 가장 큰 ‘박스오피스 폭탄’으로 세계 기네스북에 올랐다. “역대 최악의 망작” 리스트에도 늘 상단에 언급된다. 그런데 할리우드에 “해적이 나오는 영화는 절대 흥행할 수 없다”는 저주를 내린 이 작품을 나는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제일 낫다고들 하는 1편 포함)보다 재미있게 봤다. <컷스로트 아일랜드>는 <클리프행어>, <롱 키스 굿 나잇>, <딥 블루 씨>의 레니 할린 감독이 연출하고, 당시 그의 부인이었던 지나 데이비스가 주연을 맡은 액션 영화다. 보물지도와 보물섬, 지질해서 웃긴 빌런의 음모, 예쁘고 잘생긴 사람들의 러브라인(강조)과 같은 클리셰에 규모와 양으로 승부하는 액션 물량 공세는 ‘역시 아는 맛이 제일 맛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당시엔 더더욱 남성 중심으로 흘러갔던 액션 블록버스터 시장에서 멋진 여성이 주도권을 잡아 호쾌한 액션을 선도했으니 시대도 앞서갔다. 심지어 그 여자 선장이 지나 데이비스인데 재미없을 수가 있나? 여러분, 조니 뎁 때문에 다시 보기 껄끄러워진 <캐리비안의 해적> 시리즈보다야 킬링타임용으로는 이 영화가 여러모로 낫습니다. 꺼진 불도 다시 보고, 희대의 망작은 종종 세간의 편견보다 훨씬 재미있기도 하답니다. 임수연(<씨네 21> 기자)

이미지 제공ㅣ영화사청어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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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과> 강이관, 2005년
그다지 유명한 영화가 아니라서 누군가 이 영화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반가워 손뼉이라도 치고 싶은 영화, 묻히기엔 안타까운 보석 같은 영화라며 소문내고 다니는 영화가 내게도 있다. 강이관 감독의 <사과>다. <사과>는 2005년에 제작되었으나 3년간 개봉하지 못하고 (불운하게도 ‘창고영화’라는 용어의 시초가 되었다) 2008년에 개봉했다. 주인공 현정이 7년간 사귀었던 남자친구 민석과 헤어지고 마침 다가온 남자 상훈과 결혼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카메라는 낭만적이지만은 않은 연애와 결혼 생활을 세심하게, 거의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포착한다. 그러나 그 시선은 건조하지 않고 따뜻하며 간간히 유머도 있다. 안 그래도 팍팍한 세상에 너무 현실적인 연애 이야기였을까? 당시에도 작품이 좋은데 왜 이렇게 늦게 개봉했느냐는 평을 받았지만 많은 관객과 만나지는 못했다. 그 시대에 여성 원톱 주연인 로맨스 영화라니, 여성 서사가 주목받는 요즘 공개되었다면 더 많은 사랑과 주목을 받았을 것이다. 알랭 드 보통의 연애 소설들, 낭만이 걷힌 현실적인 연애 영화(미셸 윌리엄스표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 있게 추천한다. 문소리, 이선균, 김태우의 풋풋한 시절을 보는 즐거움은 덤이다. 정대건(영화감독, 소설가)

<듄> 데이비드 린치, 1984년
모두가 드니 빌뇌브의 <듄>(2021)을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을 마침내 제대로 영화화한 작품이 나왔다고 비명을 지르는 영화광들을 나는 수없이 마주했다. 정말? 사실 나에게 빌뇌브의 버전은 원작과는 좀 거리가 먼 영화다. 단아하고 섬세하고 참하다. 허버트의 원작은 살짝 정신을 놓은 듯 키치하고 캠피한 스페이스 오페라다. 출간된 해가 1965년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시라. 히피와 약물 문화가 주류로 번져나가고 있었다. 반전 운동과 인권 운동이 불타오르고 인류 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지적, 문화적, 정치적 진화가 이루어지던 해였다. LSD를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는 향정신성 약물 ‘스파이스’가 묻힌 사막 행성을 두고 전쟁을 벌이는 이야기라니, 그런 건 1960년대가 아니면 나올 수가 없었을 것이다. 나는 빌뇌브의 버전보다는 1984년 데이비드 린치가 연출한 <듄>이 더욱 프랭크 허버트적이라고 생각한다. 린치의 <듄>은 영화 역사상 가장 큰 실패작으로 여겨져 왔다. 린치는 “내 인생에서 유일하게 지우고 싶은 기억”이라고 말한 바도 있다. 하지만 나는 조악한 특수 효과로 범벅한 데다 지나치게 많은 이야기를 쑤셔 넣은 린치의 <듄>을 볼 때마다 ‘스파이스’를 잔뜩 들이마신 기분이 들곤 한다. 거대한 야심과 기술적 한계가 초보 감독의 뒤틀린 상상력과 부딪히면서 내는 파열음으로부터 기묘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당신은 이 글을 읽고 굳이 린치의 영화를 찾아볼 것이다. 그리고 나를 미워하게 될 것이다. 나는 당신의 미움을 1984년의 데이비드 린치 대신 받아낼 준비가 되어있다. 김도훈(영화 저널리스트)

<퍼시픽 림> 기예르모 델 토로, 2013년 
“거대 외계 괴수 카이주로부터 지구를 지키기 위해, 지구연합군은 초대형 로봇 예거를 양산해 반격을 시작한다.” 아이들을 대상으로 만든 어느 특촬물의 줄거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이 문장은 할리우드 영화 <퍼시픽 림>의 줄거리다. 우아하고 심도 깊은 이야기들로 가득 채워진 영화들이 주는 감동과는 또 다른 감동이 이 영화에 가득하다. 스크린을 메운 거대 괴수와 로봇은 그 등장만으로 시각적인 감동을 주고, 육중한 육탄전은 “이게 영화지!”라는 탄성이 절로 나오게 한다. 블록버스터 영화라기에는 그 흔한 유명 배우 하나 등장하지 않는데, 이 영화의 진짜 주인공은 인간이 아닌 거대 로봇과 괴수이기 때문일 것이다. <미믹>, <헬보이>, <판의 미로> 등의 전작을 통해 판타지물과 괴수에 대한 자신의 컬트적 취향을 만천하에 드러낸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퍼시릭 림>에서도 자신의 진가를 어김없이 보여준다. 거대 로봇 ‘예거’들의 디자인들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태평양에서 솟아오르는 거대 괴수 ‘카이주’들의 흥미로운 디자인과 웅장함이 이 영화가 가진 매력의 정점이다.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영화인지, 사람들이 좋다고 하니까 좋아하려고 한 영화인지를 가르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집에서 혼자 밥 먹을 때 밥상 앞에 틀어놓고 싶은 영화인지 생각해보는 것이다. <퍼시픽 림>은 내게 그런 영화다.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거대 로봇과 괴수물에 대한 내 오타쿠적 취향을 뒤흔들며 오로지 즐기기만 할 수 있는, 밥맛 좋게 해주는 영화 말이다. 백승화(영화감독)

<친구> 곽경택, 2001년
뇌가 아니라 오감이 자동으로 반응하는 영화가 있다. <친구>는 누군가에겐 “니가 가라 하와이”로 기억되는 800만 흥행 영화일 것이고, 어떤 이들에게는 마초들의 비루한 생태를 우정과 낭만이라는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으로 포장한 영화일 것이다. 나에게 <친구>는 유년의 4D 버추얼 체험관이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대학 입학과 함께 마침내 그곳을 탈출했다. 어느덧 사투리의 흔적이 사라진 이십 대 도시 여성, 영화 잡지 기자를 새로운 정체성으로 삼았던 2001년, 이 영화를 처음 보며 느꼈던 당혹감이 지금도 생생하다. 남자도 아니고 교복 세대도 아니었으며, 목숨을 내걸고 싸우던 친구도 없었다. 하지만 “느그 아버지 뭐 하시노”라는 한 선생의 질문은 영도다리 아래 묻고 떠나온 기억들을 즉각 호출했다. 내 부모님은 자갈치 시장 입구에서 약국을 했다. 근처 여관 골목에는 매일 밤 스스로를 망치는 ‘뽕쟁이’ 아저씨들로 가득했다. 새벽이면 청소부 아저씨가 포대자루에 그들이 쓴 일회용 주사기들을 쓸어 담았다. “칭구 아이가” 하며 챙기던 한 친구의 아버지가 사실 거대 조폭 조직원이었다는 걸 9시 뉴스를 통해 듣게 되었다. 그들 모두는 우리 반 누군가의 ‘아부지’였다. 그리고 나와 내 친구들을 그들의 자식이었다. 마틴 스코세이지에게 <좋은 친구들>, 파올로 소렌티노에게 <신의 손>, 곽경택 감독에게 <친구>처럼 한 번은 만들 수밖에 없는 영화가 있다. <친구>는 유년의 나 혹은 그 부둣가의 비린내가 그리워질 때 플레이 버튼을 누르게 되는 영화다. 어쩔 수가 없다. 백은하(백은하 배우연구소 소장)

    피처 에디터
    김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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