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너선 베일리'가 안토니 브리저튼이 된다는 건 | 지큐 코리아 (GQ Korea)

‘조너선 베일리’가 안토니 브리저튼이 된다는 건

2022-04-05T16:35:35+00:00 |interview|

<브리저튼>의 조너선 베일리가 연기를 내뿜는다.

재킷, 셔츠, 터틀넥, 팬츠, 모두 던힐. 부츠, 그렌슨. 링, 스티븐 웹스터.

조너선 베일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는 잠시 길을 잃은 것만 같았다. 때는 2020년 3월이었고, 1년 가까이 화려하면서도 음탕한 19세기 런던 배경의 시대극이자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브리저튼>의 세트장에서 작품에만 몰두하고 있을 시기였다. 작품이 공개되기까지는 아직 몇 달 남아 있었지만 베일리의 삶 속 거의 모든 의식은 오직 촬영에만 향해 있었다. 베일리는 자신이 어떤 실험에 동원된 것 같았다. 그리고 길 잃은 우주비행사가 인간사에 없던 행성과 충돌한 일에 비할 만큼, 그의 삶은 완전히 다른 궤도에 올랐다.
여기 브리저튼 행성에서는 벨 드레스를 입은 여성들이 현악 4중주단이 연주하는 빌리 아일리시의 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도시의 매력적인 구혼자들이 서로 시시덕거리거나 하룻밤을 보내며, 익명의 작가들은 런던의 귀족들을 위한 사건을 일으키고 모든 이의 비밀을 기록한다. 이곳에서 베일리는 평소 매끄럽게 뒤로 빗어 넘기던 헤어스타일 대신 구불구불 파마를 하고 구레나룻부터 이어지는 수염을 길렀다. 조너선 베일리에서 안토니 브리저튼으로 변하는 첫 단계다.

재킷, 루이 비통. 스웨터, 디스퀘어드2.

<브리저튼>에 출연하기 전에도 베일리는 30여 년 간 영국 연극계와 TV 시리즈를 종횡무진했다. 프라임타임에 방영돼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탐정물 <브로드처치 Broadchurch>부터 미카엘라 코엘 Michaela Coel의 코미디 쇼 <추잉 검 Chewing Gum>, 피비 월러-브리지 Phoebe Waller-Bridge의 코미디 드라마 <크래싱 Crashing>, 그해 가장 뛰어난 연극과 오페라 배우에게 상을 수여하는 올리비에 어워드 Olivier Awards에서 최우수 조연상을 안겨준 작품 <컴퍼니 Company>까지, 그가 채운 무대는 셀 수 없다. “연극을 하면 매일 밤 관객들과 교감할 수 있어요.” 베일리에게 무대란 교감의 장이었다.
거대한 축포는 2020년 12월 25일에 터졌다. 크리스마스 아침, 넷플릭스에 <브리저튼>이 공개됐을 때 베일리는 별안간 자신의 침실에서 <E! News>를 비롯해 영국 아침 방송 프로그램들과 화상 통화를 하게 됐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됐다”는 말은 이럴 때 쓸 수밖에 없다. <브리저튼>의 첫 시즌은 실로 엄청났다. 2021년 새해 연휴에 8천2백만 가구가 시청했고, 이 수치는 최근 <오징어 게임>이 추월하기 전까지 쉬이 깨지지 않던 기록이다. 2022년 3월에 공개될 <브리저튼> 시즌 2에 더 강하게 느끼는 압박과 긴장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게다가 안토니 브리저튼은 새 시즌에서 더욱 주요한 인물로 그려질 예정이다. “<브리저튼> 시즌 2가 제작된다는 건 러그풀(Rug Pull, 양탄자를 잡아당겨 그 위에 있는 사람을 쓰러뜨리는 행위에 빗댄 용어)에 비유해야 할까요. 관심이 높은 만큼 그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까 봐 좀 두렵긴 해요.”

재킷, 팬츠, 모두 루이 비통. 스웨터, 디스퀘어드2. 벨트, 에르메스.

우리는 크리스마스와 새해 사이 림보하듯 끼어있는 평일의 낮에 런던 하이드 파크에서 만났다. 베일리는 조금도 튀지 않는 검은색 고어텍스 재킷과 녹색 코듀로이 바지 차림새였다. 안토니의 시그니처로 구레나룻 아래 넓게 길렀던 수염을 시즌 2에서는 사이즈를 좀 줄여 대변신을 시도할 거라며 그가 웃는다. 이탤리언 정원 옆 벤치에 커피를 놓고 앉았다. 서른세 살의 베일리는 거리에서 주목받는 일을 썩 달가워하는 것 같지는 않다. 그는 기질적으로 유명세보다 작품에 좀 더 관심있고, 디자이너 수트를 입고 레드 카펫을 밟는 일보다 디킨스를 낭송하는 시간이 더 편안한 타입의 배우다. 베일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다는 것이 요행이자 완전한 우연으로 여겨지는 이유다.
베일리는 주민이 5천 명도 되지 않는 잉글랜드 남부 옥스퍼드셔 Oxfordshire의 소도시 벤슨 Benson에서 자랐다. 베일리가 네 살 때 뮤지컬 버전 <올리버! Oliver!>를 보고 크게 감명받자, 그의 부모님은 그를 댄스 클래스에 보내주었다. 그로부터 약 3년 후, 로열 셰익스피어 컴퍼니에서 제작한 연극 <크리스마스 캐럴 A Christmas Carol>에서 팀 Tim 역할을 따내고 처음으로 자신의 파트를 해냈다.(당시 감독이었던 이안 저지 Ian Judge에게 코멘트를 요청했을 때 그는 베일리의 성공에 찬사를 보내긴 했지만 실제로 베일리를 기억하지는 못했다.) 비슷한 시기에 대학에 진학하며 집을 떠났던 누나들이 주말이면 집에 돌아와 도시의 밤 문화 에피소드를 풀어놓곤 했다. 누나들은 베일리에게 퀴어들의 영웅인 프레디 머큐리나 프랭키 고즈 투 할리우드 같은 뮤지션들의 음악을 들려주었다. 베일리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한다. “가족들 앞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걸 보여주기 전에 내 방에 올라가서 퍼포먼스를 더 완벽하게 연습하곤 했어요.”
지금까지 베일리는 비중 있는 조연을 맡곤 했으나 주요 스포트라이트를 차지하지는 못했다. <브리저튼> 전까지 그가 주연을 맡은 TV 작품이라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삶을 바탕으로 한 BBC의 어린이 프로그램뿐이었다. “저는 오디션에서 스크린 테스트까지 통과해본 적도 없고 ‘바로 저 사람이 딱이야!’라는 반응을 받아본 적도 없었어요. 항상 많은 남성 또는 여성들의 섹스 심벌처럼 여겨지곤 했는데, 그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꺼려했고요. 자신을 섹스 심벌이라고 생각하는 배우? 짠하잖아요.”

재킷, 아미. 스웨터, 디스퀘어드2. 팬츠, 비비안 웨스트우드.

대도시 밖에서 자라난 많은 퀴어가 그러하듯 자신이 아닌 사람을 연기하는 법을 배운 건 10대 시절부터다. 그는 작곡가 아이버 노벨로 Ivor Novello를 포함해 수많은 ‘성자’를 배출한 5백50여 년 역사의 막달렌 컬리지 스쿨 Magdalen College School을 다녔다. 10대 시절을 지나 20대 초반에 가족과 친구에게 커밍아웃한 이래 지금까지, 베일리는 성별로 정의되지 않는 역할을 맡아왔다. 몇 안 되는 게이 영국 배우, 베일리는 그 길을 계속 걷고 있다. 그가 만약 그러한 자신의 지점을 억눌러야 할 필요성을 조금이라도 느낀 적이 있다면, 그것은 <브리저튼>에 합류했을 때다. 베일리는 누군가 다른 배우 친구에게 건넨 냉정한 조언을 여전히 기억한다. “우리가 알고 싶지 않은 두 가지가 있어. 그건 네가 알코올 중독자이거나 아니면 게이라는 사실이야.” 그 말은 베일리의 뇌리에 선명히 남았다. “그런 자리에 있는, 힘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게 그런 거죠. 저도 당연히 알고 있던 사실이에요. 내가 행복해지려면 이성애자여야 했을 거예요.”
베일리의 커리어에서 그의 의사 결정을 이끌어내는 요소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행복이었다. 그것이 공개적인 자리에서 자신의 성적 지향성을 말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어느 순간 이런 생각에 다다랐어요. ‘망할. 나는 사람들 앞에서 내 남자친구의 손을 잡거나 내 사진을 틴더에 올리는 걸 훨씬 더 좋아해.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을 거야.’” 자신에게 충실하려는 본능은 그가 자신의 업을 더 잘하게 만든 요인 중 하나가 됐다.

코트, 존 로렌스 설리반. 셔츠, S.S. 달리. 팬츠, 폴스미스. 벨트, 엘리엇 로도스. 체인 목걸이, 디스퀘어드2. 펜던트 목걸이, 블루 번햄.

<브리저튼>은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에 올랐던 미국 작가 줄리아 퀸 Julia Quinn의 로맨스 소설을 각색한 작품이다. 베일리는 이 원작 소설이 희곡 <리어 왕> 수준의 깊이와 재치를 품고 있다고 여긴다. 리젠시 시대 영국의 스캔들과 로맨스를 다룬 노골적이고 허황된 이야기로 보일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안토니 브리저튼 같은 사기꾼을 연기한다는 사실이 베일리에겐 꽤 의미 있는 일이었다. 시대극은 여자 형제가 많은 베일리에게 10대 시절부터 평범한 일상이기도 했다. “남자들에게 뒤처지는 여자란 없었어요. 하지만 그 시대 남자들이 왜 그렇게 회피적이고 또 위험한지는 알지 못했죠.” 이번 시즌 2에서 베일리는 왜 작품 속 남자들이 그렇게 음험한지 그 정확한 이유를 탐구한다.
안토니는 정착하기를 열망하며 ‘레이디 브리저튼’이란 칭호를 받을 자격이 있는 여자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섹스가 끝난 후 안토니가 여자에게 말하는 경솔한 발언은 그의 천박한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를 베일리는 아버지를 잃은 깊은 상실감과 가부장적 지위를 차지하고 싶어 하는 뒤틀린 마음을 가진 남자의 증상으로 바라본다. <브리저튼>의 제작자 크리스 반 두센 Chris Van Dusen은 “첫 번째 시즌에선 그를 완벽하게 무너뜨리고 싶었어요. 그래야 두 번째 시즌에서 안토니의 조각들을 다시 이어 붙일 수 있기 때문이었죠”라고 베일리가 맡은 캐릭터를 설명했다. 한편 베일리는 “안토니의 매력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어요. 그가 그런 난봉꾼이 되었다는 것에 가려진 의미, 그의 불안과 자학적 증오가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말이죠”라고 짚는다. 안토니는 베일리에게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해보라’ 강요한 셈이다. 베일리가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 이야기하게 만든, 몇 안 되는 암시 중 하나였다. “안토니를 통해 삶의 경험을 작업에 녹여 넣자는 깨달음을 얻었어요.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이 사적인 감각을 그대로 유지한다는 점이 가장 흥미로운 부분이었죠.”

재킷,팬츠,모두 조르지오 아르마니. 터틀넥, 보스. 슈즈, 살바토레 페라가모. 양말, 팔케. 벨트 엘리엇 로도스.

<브리저튼> 공개 후, 오랜 친구이자 <컴퍼니>로 토니상을 수상한 마리안느 엘리엇 Marianne Elliott 감독은 베일리에게 연락해 베일리가 자신의 경력에서 “가장 미쳤다”고 생각되는 순간을 선물했다. 다시 한번 함께 일하고 싶다는 제안이었다. “우리는 베일리에게 딱 맞는 역할을 위해 수많은 대본을 검토했어요.” 마침내 그들은 <콕 Cock>이란 작품을 낙점했다. 올봄에 초연할 예정인 <콕>은 화려하고 대사가 많으며 무대 연출은 적게 하기로 유명한 극작가 마이크 바틀렛 Mike Bartlett의 작품으로, 존이라는 게이와 (태런 에저턴이 연기할)전 남자친구, 그 남자친구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가 등장한다.
여러 상을 휩쓴 작품에서 연기하는 경험은 앞으로 베일리에게 또 다른 엄청난 순간을 만들어줄 것이다. 요즘 베일리에게는 프로듀서들이 배역을 제안하기 위해 접근해오고, 그 제안이 뒷문을 통해 빠져나가듯 성사되지 않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다. 대부분 <브리저튼> 시즌 2 스케줄과 부딪혀 무산되는 것인데, 어떤 프로듀서들은 “걱정하지 마세요. 우린 얼마든지 기다릴 수 있습니다”라는 메시지를 남기곤 했다. 사람들이 나서서 당신을 계속 기다려주는 이 상황이 어색할 것도 같다는 질문에 베일리는 마치 스스로에게 말하듯 이렇게 답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조금 쑥쓰러워하면서. “그렇죠. 제 말은···, 지금은 이런 상황이 영원할 것처럼 느껴지겠지만 사실은 잠시뿐이에요.” 그가 슬쩍 미소 짓는다. “앞으로 20년 정도, 저는 유명해지기보다 끊임없이 연기하고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