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일이라는 장르가 열렸다.
GQ 덕분에 사이드 암 시구는 처음 봤잖아요.
SI 진짜 너무 떨렸어요.
GQ 한화의 오랜 팬이죠?
SI 맞아요. 그래서 너무 기뻤어요. 전날은 설레어서 잠도 안 오고.
GQ 근데 너무 떨렸다는 고백치곤, 꽉 찬 스트라이크를 팡! 꽂았어요.
SI 야구를 꾸준히 하고 있긴 한데, 그런데 그건 정말 운이 좋았어요.(웃음)
GQ 그동안 ‘하도영’으로 사느라 꽤 바빴죠?
SI 감사하게도요. 작품도, 캐릭터도 모두 좋아해주신 덕분에요.
GQ 작품 이후에 성일 씨 인터뷰가 정말 많았잖아요. 그래서 오늘은 <더 글로리>나 ‘하도영’ 얘기는 안 하려고요. 이러면 서운할까요?
SI 아휴, 아니요. 다른 이야기도 들려드릴 수 있으면 좋죠 전.
GQ 요즘 계속 무대에 서고 있죠? 연극 <뷰티풀 선데이>는 막 끝났고요.
SI 네, 지금은 뮤지컬 <인터뷰> 하고 있어요.
GQ 무대에는 꽤 오랫동안 서 왔죠?
SI 스무 살에 시작했으니까 꽤 됐네요. 그래도 아직까지 긴장하고 떨고 그래요.
GQ ‘하도영’을 벗겨낸 정성일은 어떤 사람이에요? 스스로 보기에.
SI 저 장난기도 많고요, 되게 편한 사람? 주변에 한둘은 꼭 있는 익숙한 사람요. 밝으려 노력하는 부분도 있고요.
GQ 노력한다는 건 원래는 그렇지 않다는 거죠?
SI 제 일이 많은 사람하고 협업해야 하는 작업이라서요. 적어도 ‘나’ 때문에 분위기가 달라지진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좀 더 밝으려 노력하는 것 같아요. 그러면 좀 더 재밌게, 편하게 작업할 수 있으니까.
GQ <더 글로리> 이후 어떤 점이 가장 크게 바뀐 것 같아요?
SI 주변 반응요. 많이 알아봐 주시고, 찾아주시고요. 아니, 제가 언제 한화 구장에서 시구를 해보겠어요.(웃음) 이 생각은 진짜 했어요. ‘나 배우 하길 정말 잘했다.’
GQ 이렇게 다시 기승전 시구.
SI 그만큼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진 것 같아요. 영광스럽게도.
GQ 예전에 오정세 배우가 수상 소감으로 이런 이야기를 한 적 있어요. “모든 작품을 같은 마음으로 열심히 했음에도 결과는 다르더라. 그러니 자책하지 말라, 여러분 탓이 아니다.” 인터뷰 준비하면서 이 말을 성일 씨에게 가져가서 전하고 싶었어요.
SI 맞아요. 지금도 너무 잘하고 있고, 열심히 하는 친구가 많거든요. 저도 이제야 기회를 잡았고요. 정세 형 말이 맞아요. 꾸준히,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는 기회가 오더라고요.
GQ 돌아보면 터널이 길었던 것 같아요?
SI 마흔 살 넘어서 기회가 왔고, 이제 막 관심받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런데 주변에 보면 저보다 정말 더 잘될 수 있는 친구가 많아요. 지금의 저는 아무것도 아니고요.
GQ 기회가 왔을 때 못 잡는 경우도 있고요.
SI 맞아요. 기회는 언제 올지 모르는 거니까. 그래서 준비는 돼 있어야 하죠.
GQ 배우는 선택을 받기도, 또 하기도 하는 입장이잖아요? 성일 씨는 선택의 가치를 어디에 두는 편이에요?
SI 아직 제가 무엇을 선택하는 입장은 아닌데, 했다면 ‘메시지’였던 것 같아요. 그건 분명할수록 좋은 것 같아요.
GQ 그게 캐릭터든, 작품이든.
SI 네, 연극 무대를 오랫동안 해와서 그런 것 같아요. 왜 연극이 시대나 문화, 사회 관련된 이야기들을 줄곧 해오고 있잖아요. 그래서 전달하고, 알리는 역할이 중요하다고 보는데, 갖고 있는 메시지가 분명하면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 같아요.
GQ 그렇게 선택한 작품은 대체로 만족했어요?
SI 그런데요, 재밌는 게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해야 할까요? 지나고 보면 그런 작품이 행복했던 것 같아요.
GQ 이를테면 어떤 작품이 그랬어요?
SI 연극 <보고싶습니다>라는 작품이 그랬어요. 너무 하고 싶었던 작품이라 욕심도 컸죠. 운 좋게 오디션에 붙고, 준비하면서 전부를 쏟아부었는데, 되레 돌아오는 건 혹평이었어요. 답답한 마음에 안 마시던 술도 좀 하고. 그 시간이 많이 힘들었어요.
GQ 만족은 그 후에 따라왔겠죠?
SI 네, 공연 올라가고 나서 “잘했다”라는 말 한마디에 모든 게 씻겼어요.
GQ 만족 말고 다른 것도 얻었다면요?
SI 그때가 제가 딱 자만했을 때였어요. 주변에서 “잘한다”는 소리도 종종 듣고 하다 보니까 착각했던 거죠. ‘나 잘하는구나?’ 그런데 그때 <보고싶습니다>연출님이 제 연기를 보고 딱, 한마디하셨어요. “너 연기 그렇게 하면 안 돼.”
GQ 아찔했을 것 같아요.
SI 맞아요. 그런데 아마 저도 알고 있었을 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 더 배워야 한다는 거. 그래서 그때 정말 열심히 했어요. ‘연기 이거 끝이 없구나’ 싶은 생각도 그때 처음 했던 것 같고요.
GQ 어때요? 그 뒤로 벽에 부딪힐 때마다 방법이 좀 보이던가요?
SI 똑같죠. 대본 안에서 찾는 수밖에 없는 것 같아요. <더 글로리>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고민만 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니까. 대본 붙들고서 이렇게 저렇게 해보는 수밖에요.
GQ 처음 배우를 꿈꿨을 때를 떠올려보면, 지금과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아요?
SI 전혀요. 그때는 배우보다는 연예인, 스타에 가까웠어요. 물론 그때도 연기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은 갖고 있었지만, 꿈꾸던 모습은 그랬던 것 같아요.
GQ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달라지던가요?
SI 꿈에 대한 확신?
GQ 점점 더 또렷해졌군요.
SI 아뇨. 그 반대요. 점점 흐릿해졌죠. 20대 때는 무조건 잘될 줄 알았고, 30대 때는 ‘시간이 조금 걸리겠지만 그래도 잘될 거야’ 싶었죠. 그러다 30대 중반부터는 ‘잘될까?’ 확신이 의문으로 변하기도 했고요. 40대 들어서니까 ‘이거 안 될 수도 있겠는데?’(웃음)
GQ 배우를 오래 하고 싶다면, 가장 큰 이유는 뭐라고 이야기할 것 같아요?
SI ‘내가 이보다 좋아하는 일이 있을까?’ 반문해보면 없어요.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건 행운과 같다고 생각해요.
GQ 이만큼 연기에 푹 빠질 정도면, 계기가 분명 있었겠죠?
SI 고 3이었어요. 대전에서 누나랑 같이 뮤지컬 <사랑은 비를 타고>를 보러 갔는데, 충격 이상이었어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짜릿한 감정을 느꼈는데 ‘이거 뭐지?’ 싶으면서도 또 한 번 느껴보고 싶은 거죠. 그게 시작이었어요.
GQ 영화 같아요.
SI 지금은 이제, 누군가가 날 보고 그런 감정을 느낀다면 정말 좋겠다, 싶죠.
GQ 배우로서 터닝 포인트는 언제였다고 생각해요?
SI 아빠가 되고 나서부터요. 전에는 연기가 좀 딱딱했다고 해야 하나요?
GQ 정석적인.
SI 네, 단단했던 것 같아요. 강했고. 어떤 틀이 존재했거든요. 그런데 아기가 생기고, 아빠가 되고 나서는 시야가 넓어진 것 같아요. 유연해지고. 그런 변화들이 묘하기도 해요.
GQ 어떤 아빠예요?
SI 여느 아빠랑 똑같아요. 아들이 게임을 너무 좋아하는데 같이 게임하고, 나가서 같이 뛰어놀고. 그러다 투닥투닥 싸우기도 하고요.(웃음)
GQ 아들은 아빠가 배우라는 거 알아요?
SI 전혀 모르는 것 같아요. 그냥 자기랑 게임 같이하는 사람, 칼 싸움해주는 사람 정도?
GQ 작년 이맘땐 지금의 정성일을 상상 못 했겠죠?
SI 못 했죠. 이렇게 많은 게 달라질 거라고는 감히 못 했죠. 그냥 한 계단 정도 올라가 있을까? 정도였죠.
GQ 이 정도면 몇 층은 껑충 올라간 거 아닌가요.(웃음)
SI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이도 잠깐이라는 걸 알아요. 그래서 더 소중하고요.
GQ 그럼 내년을 예상해보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해보면 어때요? 이거 오래오래 남는 거니까 신중하게 생각하셔야 돼요.
SI 하, 지금만 같았으면 좋겠어요. 정말.
GQ <지큐> 16페이지를 펼쳤을 때, 성일 씨가 받을 수 있는 선물이 있다면, 뭐가 좋을까요?
SI 음, 제가 야구로는 상을 많이 받았는데, 연기로 받은 건 없어요. 16페이지에 트로피 하나 짠, 하고 들어 있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트로피를 기사나 광고로 쓰긴해요?(웃음) 사람들이 <지큐> 16P는 광고 페이지라고 하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