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 수집에 처음 빠지게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네가 사랑하는 걸 사라(buy what you love)”라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그건 끔찍한 조언이다.

시계 수집에서 가장 흔한 조언은 동시에 가장 쓸모없는 조언이기도 하다. 이게 케이블 뉴스 토론이라면, 나는 여기에 하나의 참고화면을 삽입했을 것이다. 시계 업계의 저명한 인물들이 반복해서 말하는 이 문장을 담은 장면들로 구성해서 말이다.
“네가 사랑하는 걸 사라(Buy what you love).”
아주 널리 퍼져 모두가 알고 있는 문장이지만, 이는 진부함을 넘어 아무 의미도 없다. 누가 그 말에 반대할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시계를 사지 말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롤렉스 익스플로러 1016이나 스와치 카일루아처럼 내가 좋아하는 시계에 느끼는 설명할 수 없는 감정적 연결은 거의 로맨틱한 수준이다.
하지만 “네가 사랑하는 걸 사라”는 조언은 순서를 완전히 거꾸로다. 이 말은 ‘사랑이 결정의 출발점’ 이어야 한다고 암시하지만, 사실 사랑은 좋은 결정의 결과물이다. 내가 몇몇 시계들에 느끼는 “사랑”은 그 시계를 이해하고, 함께 살며, 감상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것이다.
그럼 이 무의미한 문장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아마 처음엔 이런 유용한 상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시계는 투자 대상이 아니다. 이 작은 물건들은 감정적 매력을 지닌 존재이며, 금융 상품으로 봐서는 안 된다.
하지만 시계의 인기가 폭발하고, 사람들이 그것들을 손목 위의 NFT처럼 다루기 시작하면서, “네가 사랑하는 걸 사라”는 말은 순수한 투기적 태도에 대한 반발로 변했다. 그런데 그 상기가 너무 자주 반복되다 보니, 결국 아무 의미도 남지 않게 되었다.

“네가 사랑하는 걸 사라”는 말이 만들어낸 문제
이 말은 수집가가 거쳐야 할 길고 복잡한 여정을 일단락시킨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고 왜 원하는지에 대한 탐구를 잘라버린다는 것이다. 시계를 향한 욕망은 지위, 정체성, 향수, 역사, 기술, 미학이 뒤엉킨 덩어리다. 이 복잡한 그물망이 어떻게 하나의 ‘욕망’으로 응결되는지를 이해하는 과정이야말로, 사실 수집의 즐거움 그 자체다.
또한 이 조언은 열정과 감정에만 의존한 나쁜 결정을 내리게 만든다. 나는 열정을 반대하지 않는다 . 내가 반대하는 것은 맹목적인 열정과 맹목적인 매혹이다. 무언가가 당신을 설레게 하는 이유를 수집가로서 인식하는 건, 그 열정을 죽이는 게 아니라 더 풍성하게 만드는 행위다.
이 조언을 반복적으로 읊조리는 건, 마치 수집의 복잡한 동기를 인정하는 게 ‘진정성 없는 행동’ 인 것처럼 느끼게 만든다. 이건 “그냥 네 열정을 따라가라”는 진로 조언의 수집 버전이다.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또한 이는 현실을 무시한다. 사랑이란 단어가 우리가 원하는 것이 마음에서 직접 내려오는 절대적인 명령인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시계는 늘 외부 요인에 의해 형성된다. 시장, 개인 정체성, 다른 수집가들의 평가, 소셜 미디어 피드, 혹은 어느 날 티모시 샬라메가 레드카펫에서 착용한 시계 같은 것 말이다.
사랑은 변한다. 25살 때 필수처럼 느껴졌던 로열 오크는 45살이 되면 아무 의미 없게 느껴질 수 있다. 라이프스타일이 바뀌고, 취향이 성숙하며, 상황이 달라진다. 하지만 “사랑하는 걸 사라”는 조언은 이런 변화에 대한 어떤 틀도 제시하지 않는다. 그 결과, 수집가들은 사랑이 식었을 때 대처할 방법이 없다.
그 조언은 순간적 매혹과 지속적 만족을 혼동시킨다. 디스플레이 케이스 속 시계를 보고 한눈에 반하는 “첫눈에 반한 사랑”은, 매일 그것과 함께 사는 경험과 완전히 다르다. 이 조언은 욕망의 도파민 자극과 실제 장기적 궁합을 구분하지 못한다. 많은 수집가가 매대 넘어 사랑했던 시계를 6개월 후에 서랍 속에서 먼지만 쌓이게 놔두곤 한다.
게다가 이건 무모하다. 사랑은 그 자체로 비이성적이다. 그래, 나는 파텍 필립 1518 스틸 모델을 사랑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랑을 좇기 위해 2천만 달러를 쓰는 건 미친 짓이다. 감정만으로 수집을 쌓는 건 재앙의 레시피다. 감정적 충동이 이끄는 나쁜 결정이란 것이다.
이 조언은 분석과 자기 성찰을 차단한다. “그 시계를 사랑한다면”, 굳이 그 무브먼트, 역사, 시장을 이해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힘들이 어떻게 얽혀 우리의 취향을 만들고, 우리가 원하는 시계를 형성하는지를 살피는 건, 사려 깊은 수집가가 되기 위한 핵심 과정이다.
시계란 역사, 공학, 지위, 장인정신, 기계미, 인간의 창의성이 아름답게 결합된 존재다. 나는 종종 우리가 사용하는 플랫폼, 그리고 그 플랫폼이 우리로 하여금 몇몇 시계만 사랑하게 만드는 방식에 대해 생각한다. 예를 들어 파텍 필립 노틸러스나 까르띠에 크래시 같은 모델들 말이다. 가끔 사랑은 우리가 반복적으로 보아온 것, 혹은 반복적으로 사랑하라고 세뇌당한 것의 코드처럼 느껴진다.
나는 우리가 더 탐구적이고, 호기심 많고, 인내심 있는 태도를 가지게 하는 조언을 원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렇다: 시계를 본다 → “사랑한다” → 산다.

더 현실적인 조언
“네가 사랑하는 걸 사라” 대신 이런 건 어떨까?
“네가 아는 걸 사라.”
이건 말 그대로의 의미이기도 하다. 초기 빈티지 롤렉스 데이토나를 산다면, 밀러리게 푸셔를 반드시 이해해야 한다. 하지만 이건 그보다 더 깊은 뜻을 가진다. 자신이 무엇을, 왜 원하는지를 이해하라. 가장 만족스러운 구매는 이런 정직한 자기 점검에서 비롯된다. 신화적인 감정적 연결을 쫓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자신이 무엇을 추구하는지를 아는 것에서 말이다.
어떤 수집가들은 기계적 완성도를, 어떤 사람들은 그 이야기나 역사성을, 또 다른 이들은 사회적 상징성을 원한다. 대부분은 그 셋의 조합을 원한다. 그건 천박한 게 아니라, 솔직한 것이다.
내가 가장 감탄하는 수집 컬렉션들은 개인의 일관성을 가진다. 그 사람의 시계 상자를 보면 즉시 “아, 이건 그 사람 거구나” 하고 느낄 수 있다. 그 일관성은 순간의 감정에 따라 “사랑하는 걸 사는” 것에서 오지 않는다. 그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리고 어떻게 맞물리게 구성하려 하는지 이해할 때 생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중요한 포인트는 이거다. 그렇게 컬렉션을 쌓아가다 보면, 당신은 어느 순간 진짜로 그것을 사랑하게 될 수도 있다. 하나의 시계뿐만 아니라, 그 시계들이 함께 만들어내는 당신만의 이야기 전체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