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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석구 “반복 속에서 자유가 와요”

2023.08.29박나나, 전희란

손석구의 말줄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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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이라는 건 만드는 게 아니라 따라오는 것이니까, 그럴 때 예기치 못한 마법 같은 순간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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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D.P.> 시즌 2의 마지막 회 법정 신을 보며 피어난 감응이 제 안에 또렷해요. 이틀이 지났는데 여전히 같은 온도로 존재하는 것 같아요.
SK 정말로, 잘해보고 싶었어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들면 더 안 될 때도 많아요. 그 신은 굉장히 실감나게 지은 세트 안에서 절로 분위기가 엄숙해지더라고요. 분위기가 리얼했다고 해야 할까. 테이크도 몇 번 안 갔어요. 제 기억이 맞다면 메인 신은 딱 한 번. 최종 선택된 오케이 컷은 연습 삼아 해본 컷이고요. 현장에서 감독님께 제가 물었던 기억이 나요. “감독님, 더 찍어야 하는 거 아닌가요?”
GQ 역시나. 호흡이 조금 딸리는 것 같은 ‘로’한 느낌마저 좋더라고요. “이 말은 손석구의 안에서 길어 올려지고 있다.”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SK 그 신을 후반부에 찍었어요. 그 전 에피소드들을 찍으며 전사를 익힌 상황에서 저도 모르게 깊이 몰입된 것 같아요. 나중석 하사로 나온 임성재 배우는 실제로 워낙 친하기도 하고요. 김루리의 사연도 공감이 되고,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어요. (가슴을 움켜쥐며) 여기가, 좀 슬펐어요. 임지섭이란 인물이 많은 잘못을 했잖아요. 늘 반대편에 있으려던 그가 변화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라는 믿음, 책임감을 붙들고 말하죠. 거대한 시스템에 맞서 작은 개개인이 모여 작은 변화라도 만들어보려고 하는 시도, 거기에 나도 드디어 일조를 하는구나, 그런 마음으로요. 연기하면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어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D.P.>의 커다란 주제이기도 하고요.
GQ 임지섭의 해방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SK 그렇죠,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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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문자로만 존재하던 텍스트가 촤악 펼쳐져 생명이 깃드는 매지컬한 순간. 법정 신에서 제가 느낀 그런 순간은 연기하는 순간 배우 스스로 느끼기도 하나요?
SK 그런 순간이 오기를 배우들은 항상 바라요. 자주 오기를 기다리면서 현장에서 각자 나름의 루틴을 갖고 있죠. 저는 그런 마법같은 순간이 반드시 오지 않더라도, 편집이 빚는 마법 또한 있다고 믿는 편이고요.
GQ 마음을 비우는 건가요?
SK 기대하지 않으려고 해요. 기대하면 되레 그 순간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GQ 내려놓을 때 비로소 찾아온다고 믿는 건가요?
SK 현장에서 이런 농담을 자주 해요. “감독님, 저는 아마 안 될 거예요. 이런 (어려운) 신을 왜 저에게 주셨어요? 안 돼요, 못 해요.”(웃음) 그렇게 스스로에 대한 기대치를 많이 낮추고, 별 생각 없이 하려고 해요. 실제로 경험이 쌓일수록 생각을 비우게 되기도 하고요. 목숨 걸지 않는 거예요. 사실은 저 어딘가에서···.
GQ 목숨을 걸고 있지만.
SK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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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나무 위의 군대>에서도 저는 몇 번 본 것 같아요. 어떤 마법같은 순간들요. 어때요? 연극에는 편집이 존재하지 않잖아요.
SK 연극하며 제가 많이 배우는 것이 바로 그 지점이에요. 저는 영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서는 마법 같은 순간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최대한 산뜻한 상태로 있으려고 해요. 리허설을 반복하기보다는 촬영에 들어가기 전에 충분히 대화를 하면서 준비를 많이 했죠. <나무 위의 군대>를 시작할 때는 반복적으로 매일 같은 것을 한다는 것에 겁이 났어요. 같은 것을 반복하다 보면 내가 너무 차가워지지 않을까? 무뎌지지 않을까? 이 작품은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감정이 격해지기 때문에 마법같은 순간이 자주 찾아와 주지 않으면 자칫 극이 밋밋하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오늘은 그분이 오실까?’ 시작할 때부터 그런 부담을 안고 들어가요. 그 부담감이 되레 방해가 되죠. 그럴수록 상대방에게 잘 주자, 잘 이야기해주자고 다짐해요. 감정이라는 건 만드는 게 아니라 따라오는 것이니까. 그럴 때 예기치 못한 마법같은 순간이 불쑥 찾아오는 것이니까. 우리 공연이 총 48회인데, 이제 12회 남았어요. 지금까지 36회를 한 거예요. 정확히 절반 쯤, 20회 넘어갈 때부터 마법 같은 순간이 자주 찾아왔어요. 정말 신기하게도, 반복 속에서 자유가 오더라고요. 그러면 머리로 생각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막 돼요.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우리는 지금도 뜨겁게 회의를 해요. 20회 차 넘어간 뒤로는 마법같은 순간이 없으면 없는 대로, 또 마법이 생기더라고요. 무뎌질 줄 알았는데, 갈수록 지금이 더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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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반복이 주는 자유라니, 아주 섹시하게 들리는데요.
SK “Repetition keeps me green.” 알파치노 선배님이 했던 이야기예요. 연극 <베니스의 상인>을 할 때 어떤 대사를 이해하지 못한 채로 연기를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알겠더래요. 저도 그걸 경험했어요. “연기를 왜 머리로 해, 몸으로 하는 거지.” 어렴풋이 듣던 말들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 거예요. 연극하면서 모르는 대사나 장면이 있으면 전에는 머리로 이해하려고 했는데, 지금은 몸으로 먼저 막 해봐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유레카가 ‘빡’ 와요. 이게 이거였어?
GQ ‘그분’은 주로 무대로 오시나요?
SK 연습 때도 오고, 공연하면서도 와요. 신기한 건, 몸으로 익힌 배움은 적어두지 않아도 된다는 거예요. 다음 날 절로 알아서 돼요. 거기서 또 다른 게 피어나요. 너무 재밌어요. 어떤 순간을 넘어선 뒤에 더 많은 미지가 펼쳐져요.
GQ 지금 이 시기에 <나무 위의 군대>를 만난 것이 필연으로 느껴지기도 해요?
SK 배움이 있었던 것만은 필연인 것 같아요. 저는 어떤 경험을 하고 나면 간결한 문장으로 남길 수 있을 만큼 배움이 있기를 바라요. 하나의 작품이 끝날 때 마다 간략한 문장으로 남겨요. 단어일 때도 있고, 느낌일 때도 있고, 문장일 때도 있고, 당시 나눴던 대화일 때도 있어요. 제가 기억하기 편하다면 어떤 방식이든 괜찮아요. 그것을 점점 더 짧게 만들려고 해요. 에센스만 남도록.
GQ 그 습관은 언제, 어떻게 생긴 거예요?
SK 아주 오래전, 연기하기 전부터 가진 습관이에요. 실수를 하면 얼마간 우울해지잖아요. 제가 우울함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배움이었어요. 실수를 해도 무언가 배움이 있었다면 그걸로 값진 경험이다, 라고. 작품 하나 끝날 때마다 배움들이 차차 쌓이는데, 새로운 작품을 시작할 때마다 그것을 모두 리뷰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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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늘 “나를 연기한다”고 말해왔죠. 신병은 어떻게 손석구 안으로 가져왔나요?
SK “나를 연기한다”는 말을 더 구체화해서 말해볼게요. 내게 축적된 경험을 통해 내 안에 어떤 정서가 생기잖아요. 감정과는 다른, 정서. 저는 하나의 캐릭터를 하나의 정서로 간주하고, 제안의 정서를 꺼내어 펼치기 시작해요. 가령 <나의 해방일지>의 구 씨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가 가장 컸던 30대 초반의 정서를 꺼냈고, <범죄도시 2>의 강해상은 20대 초반에 가졌던 울분을 꺼냈어요. 그러면서 ‘그때 나는 어땠지? 어떤 행동을 하고 어떤 말투를 썼지? 어떤 생각을 했지?’ 더듬어 가요. 어떤 때는 없는데 찾았다고 착각할 때도 있어요. 착각하고 연기하다 보면 내 몸이 알아차려요. 부대끼죠. 내가 지금 누구 따라 하는 거 같은데, 라는 기분이 들고요. <나무 위의 군대> 신병의 정서를 찾는 데 가장 오랜 시간이 걸렸어요. 더듬고 더듬다 보니 10대로 거슬러 올라가더라고요. 아빠의 말이 곧 법이었던 8~10세 남짓의 저로요. 그러니까 상관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신병을 조금 이해하겠더라고요.
GQ 자기 안에서 찾지 않으면 괴로워요? 부끄러워요?
SK 내가 모르는 걸 억지로 하게 되면 내 자신도 속이는 것 같고, 관객도 속이는 기분이 들어요. 어디서 본 듯한 연기를 하게 된다는 것이 가장 괴로워요. 본 것을 그럴듯하게 하려면 관찰력이 아주 뛰어나거나 흉내를 잘 내는 끼가 있어야 하는데, 배우로서 제 장점이 그건 아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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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나무 위의 군대>는 믿음에 대한 여러 질문을 던지죠. 의심덩어리인 저는 자신의 믿음을 따라 나아가는 신병이 어리석다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했어요. 손석구가 연출한 <언프레임드 : 재방송> 속의 이모에게도 그런 믿음이 있죠. 저는 이모의 바보 같은 믿음이 아름답게 느껴졌어요.
SK 그 말씀, 정말 신기해요. 저는 나이를 먹으면 아이로 돌아간다고 생각하거든요. 쭉 돌아서 원점으로 오는 것처럼, 다시 아이같은 순수함을 찾아가는 것 같아요. 동네 할머니, 어르신들이랑 얘기하다 보면 가끔 혼란스러워요. 평생 별의별 일을 다 겪으면서 사셨을텐데 어쩜 이렇게 순수하지? 왜 이렇게 때묻지 않았지? <언프레임드 : 재방송>의 이모도 그렇고요.
GQ 이모로 분한 변중희 배우는 정말로 순수하지 않고서는 나올 수 없는 눈빛을 가졌죠. 그 순수함마저 연기라면 정말 연기 천재인 거고요.
SK 맞아요. 사실은 그 순수함을 간직하고 있는 게 천재죠.
GQ <언프레임드 : 재방송>은 볼 때마다 마음 깊숙한 곳을 자꾸 찔러요. 볼 때마다 좋은 신이 바뀌고요. 최근에는 버스 신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요. 이모가 수인에게 이렇게 말하죠. “다 사라진다/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거지/서두를 거없어.” 이렇듯 덤덤하게 쿡 찌르는 대사는 어떻게 쓰는 건가요?
SK 거의 다 제가 삶에서 들었거나 누군가와 대화하면서 나눈 말들이에요. 마치 ‘덕통’하듯이 어르신들에게 치이는 순간이 있잖아요. 순수하다 못해 바보 같다고 생각한 이가 어떤 말을 하는 순간 ‘뭐야, 이 사람은 지혜롭다 못해 지혜가 체화된 단계잖아?’ 싶은 기분이 들 때가 있어요. 저는 그것을 어른들을 보면서 종종 느껴요. 불현듯 툭 뱉어져 나오는 엄청난 지혜들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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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손석구는 왜 쓰나요? 어떤 때 쓰고 싶다고 느껴요?
SK 내 얘기를 하기 위해서 쓰는 것 같아요. 더 정확하게는 제가 느끼기에 재밌는 경험들을 드라마타이즈 해보고 싶은 것에 가까워요. 공유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얘기이거나, 제가 뼛속까지 디테일하게 알고 있는 이야기라서 드라마타이즈 할 수 있겠다 싶은 이야기가 몇 가지 있어요.
GQ 작년 한 인터뷰에서 올해 목표로 대본의 초고를 완성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 목표는 어디쯤 와있나요?
SK 계속 진행 중이에요. 그런데 게을러서 원.(웃음) 요즘은 이야기로도 많이 써요. “들어봐” 하며 말하면서 수정하기도 하고, 상대의 반응을 살피면서 바꾸기도 하고요. 말하면서 글을 쓰는 테크닉이 좋더라고요. 가장 좋은 점은, 애매모호 했던 것이 걸러져요. 요즘은 기획 의도를 열심히 쓰고 있어요. 투자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획 의도를 잘 써야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알겠더라고요. <언프레임드 : 재방송> 하면서 느낀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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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그러는 한편, 다작이란 목표에도 굉장히 충실하고 있죠.
SK 몸만 괜찮다면 다작은 좋은 것 같아요. 기회는 언제나 주어지는 게 아니니까, 제가 하고 싶다고 늘 할 수는 없잖아요.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할 수 있을 때 최대한 해두어야겠다 싶어요. 가끔 주변 배우들 보면 숙연해질 때가 있어요. 와 이 사람은 뼛속까지 배우다, ‘찐’ 연기자구나. 제게 그런 뜨거움이 있나 돌아본다면 음···. 반드시 그렇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 같아요. 최근에 <살인자 O난감> 같이 한 (이)희준 선배네 놀러 갔는데, 연기를 위해 준비하는 여러 자료들이나, 연기 이야기를 하며 즐거워하는 모습이 놀랍고 존경스럽더라고요. 한번은 제가 물어봤어요. “형, 아직도 그렇게 재밌어요?” 그러면 너어무 재밌대요.
GQ 얼마만큼 해야 그만두어도 아쉽지 않을 거란 걸 알 수 있을까요?
SK 모르죠. 사실은 저도 아직 너무 재밌고 설레고 짜릿해요. 만나는 사람도, 촬영장도 계속 바뀌고 변화무쌍해서 아직은 재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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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나를 연기해야 하는데 다작을 하면 비슷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없어요?
SK 요즘 들어 그런 고민을 해요. 그러니까 나답게 잘 변화하려면 많은 경험을 해야겠죠. 후에 지금의 나를 쓸 수 있게 지금을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고요. 그런데 계속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반복적일 수도 있을 거예요. 부활의 김태원 선생님을 되게 좋아하는데, 한번은 그분이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부활의 노래가 다 똑같은 것 같다고 하는데, 지겨우면 다른 음악을 듣고, 그러다 그리워지면 다시 돌아와서 우리의 음악을 들어달라고. 그 말에 정말 공감해요. 저도 지금은 경험하고 쌓이는 것보다 소비가 더 많은 시점인 것 같아요. 그러다 보면 분명히 누군가는 제가 지겨워질 수 있어요. 대중이 그렇다면 순리대로 잠깐 쉬었다가 감사하게 다시 기회가 생기면 나올 수 있겠죠. 결국 중요한 건, 내가 아닌 것을 하려고 무리하는 것보다는 사람들이 저를 안 찾기 시작한다는 사실에 초연해지는 것 같아요. 그것이 두려워서 오버하면 안 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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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박해영 작가가 ‘구 씨’ 연기를 보며 “저 사람은 완전히 자기 것을 하고 있다”고 했죠. <나의 해방일지> 대본집에 손석구가 이렇게 적었더라고요. “이 작품을 찍고 나서 전보다 대사나 지문을 전달하는 데 더 여유가 생겼습니다”라고.
SK 박해영 작가님의 대본은 쉽지 않아요. 마냥 구어체가 아니고, 간략한 부분도 있지만 아주 서술적인 부분도 많아요. 대본을 보고 실제로 연기한다고 상상해 보시면 이해가 빠를 수도 있어요. 초반에 구 씨가 미정이랑 친해지면서 방언 터지듯이 말을 하는 신이 있었는데, 처음 제 연기를 보고 감독님이 그러셨어요. “대사 그렇게 빨리 안 쳐도 돼요.” 제 스스로 마음의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민망하니까 와라락 대사를 쳤던 거예요. <나의 해방일지> 때 가장 크게 배운 건, 말을 음미하면서 하는 거였어요. 하기 어려운 대사일수록 더 음미하면서 해야 전달이 되고, 나도 말하면서 무슨 말인지 알겠더라고요.
GQ 뭘까요? 말을 음미한다는 것이란.
SK 뭐랄까···. 외줄 타듯 하는 것 같아요. 제가 외줄 위에 올라가 있는데 안 떨어지려면 균형을 잘 잡으면서 가야 하잖아요.(양팔 벌리는 시늉을 한다.) 빨리 가면 떨어지니까 서둘러선 안 되죠. 그런 느낌이요. 말을 빨리 할 필요도, 행동을 빨리 할 필요도 없고, 다 알고 갈 필요도 없지만 외줄 타기 하듯이 음미하면서.
GQ ‘좋은 사람이 되어야 연기를 잘할 수 있다’는 가르침은 누가 알려준 거예요?
SK 캐나다에서 연기를 가르쳐준 선생님요.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공감하면 상대에 대한 미움이 없어지잖아요. 그러면 그 사람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게 된다, 그런 맥락에서 말씀하셨던 것 같아요.
GQ 당시에도 그 말이 잘 이해가 됐어요?
SK 어느 정도는 받아들인 것 같아요. 30대 초반의 화두는 ‘나는 왜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할까? 좋은 사람이 아닌가?’였어요. 자책을 많이 했죠. 그런데 이 해는 억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지금 돌이켜보면 굉장히 자연스러운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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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지금은 스스로 좋은 사람이라고 느껴요?
SK 마법 같은 순간을 기다릴 때처럼,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마음 역시 내려 놔야 하는 것 같아요. 당장 이해하려고 하면 이상한 불순물이 섞여서 논리로만 이해하려고 하잖아죠. 전혀 자연스럽지 않아요. 이해하려는 마음이 스트레스가 되기도 하고요. 요즘은 되는 만큼만, 이해되는 만큼만 이해하고, 싫을 때는 한동안 싫어하고 미워해요. 저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GQ 한 인터뷰에서 어렸을 때의 나를 만나면 어떤 조언을 하겠냐는 질문에 “그 아이의 말을 듣고 오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답변했죠.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어요. 좋은 사람, 적어도 좋은 사람이려 노력하는 사람인 것 같다고 느꼈고요.
SK 어렸을 때의 저를 돌이켜보면 그 점이 제일 안타까워요. 당시 한국 사회는 들어주기 보다는 조언과 충고가 더 많았던 것 같아요. 사람마다 달라서 적용하기 어려운데, 안 되면 또 자책하잖아요. 나대로 사는 것도 괜찮다고, 이대로도 나쁘지 않다고, 눈치 보지 않아도 되겠다고 깨달은 게 서른 초중반 즈음이었어요. 아쉽죠. 20대 때 깨달았으면 더 많은 걸 해볼 수 있었을텐데. 스스로 사고하는 법을 저는 배우지 못한 것 같아요. 요즘 영재 발굴 프로그램을 막 울면서 봐요. 요즘 애들은 어쩜 저렇게 자기 생각을 잘 얘기할까? 그게 너무 기뻐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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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어린 석구가 지금의 손석구를 보면 좋아할까요?
SK 아주 좋아할 것 같아요. 어릴 때도 상상한 적 있거든요. 20년 뒤로 가서 내 미래를 잠깐 보고 싶다. 성공했는지, 존경받고 있는지 궁금했던 것 같아요.
GQ <지큐>의 9월호 주제가 ‘RSVP : Yes’예요. <창밖의 영화>에서 <브로크백 마운틴>을 인생 영화로 소개하면서 잭이 아녜스에게 보낸 엽서에 무엇이라 답할 거냐고 물은 적이 있죠. 이번에는 손석구에게 물음표를 돌려볼게요. 그 반가운 초대장이 온다면 뭐라고 답하고 싶어요?
SK 짧게 하고 싶어요. 예스면 예스. ‘노’라면 장황하게 설명하고요. 혹은 동그라미···. (손바닥에 동그라미를 그려본다.) 예스, 예스가 좋은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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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이해되는 만큼만 이해하고, 싫을 때는 한동안 싫어하고 미워해요. 저는 이것이 자연스러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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