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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채민 “강해지려고 해요. 그 안에서 유연함도 간직하면서”

2026.02.24.박나나, 전희란

꿈의 안팎에서, 이채민.

새틴 트렌치코트, 실크 새틴 셔츠, 실크 뒤셰스 새틴 벨트 팬츠, 글레이즈드 레더 스탠턴 더비 슈즈,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비스코스 실크 셔츠,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GQ 파리가 처음이었다면서요?
CM 첫 파리, 첫 유럽이었어요. 밤 9시쯤 파리에 도착했는데, 호텔로 가는 차 안에서는 아직 파리에 왔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어요. 여기가 정말 파리인가? 아직은 반쯤 잠든 채로, 비몽사몽이었죠. 호텔에 도착해 유명하다는 햄버거를 룸서비스로 주문해 한 입 베어 물고, 과일, 샐러드 조금 먹다 잠들었어요.
GQ 언제 파리에 왔다는 걸 실감했어요?
CM 잠에서 깨는 순간 느꼈어요. 여기는 확실히 한국이 아니구나. 아침에 호텔 문을 열고 나서니 공기가 무척 맑았어요. 유럽은 날씨 변덕이 심하다고 들었는데, 운이 좋았어요. 촬영하러 왔지만, 여행 온 것 같았어요. 파리만의 여유로움이 무언지 느꼈어요. 마치 오마카세처럼 조식을 3시간씩 먹으면서.(웃음)

실크 새틴 셔츠와 타이, 실크 뒤셰스 새틴 벨트 팬츠, 글레이즈드 레더 스탠턴 더비 슈즈,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GQ ‘여유’라는 말을 자주 쓰더군요. 이채민에게 중요한 키워드라도 되는 거예요?
CM 맞아요. 여유라는 키워드가 저에게 요즘 크게 와닿아요. 여유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폭군의 셰프>를 할 때는 명상하면서 큰 도움을 받았어요. 어느 때보다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게 중요하다고 느끼고 있고, 평소에 여유를 갖는 습관을 들여야겠다고 생각해요. 오죽하면 유튜브로도 검색해요. ‘여유있게 생각하고, 여유 있는 삶을 살기’.
GQ 여유를 찾기 위해 지키는 매일의 루틴이 있어요?
CM 짧게나마 산책을 하려고 해요. 단 10분이라도 한강이나 집 근처를 걸으면서 공기를 맡고,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해요. 그럴 땐 아무 음악도 듣지 않아요. 음악을 들으면 제가 듣고 싶은 음악을 재생하게 되잖아요. 그러면 제 생각에, 세상에 갇히게 되는 것 같더라고요. 음악을 들으며 생각을 비우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해보니까 아무것도 듣지 않고 걸어야 생각이 비워지더라고요. 그리고 요즘 통기타를 연습 중이에요. 집에서 혼자 피아노 치고, 기타 연습하는 게 여유 찾기에 도움이 되더라고요. 치다 보면 1시간이 훅 지나가 있어요.

울 모헤어 재킷, 실크 하보타이 벨트 팬츠,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실크 트렌치코트, 스트라이프 쿠프로 트윌 파자마 셔츠,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GQ 어릴 때는 무대 공포가 있었다면서요?
CM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1월 13일이니까 13번이 읽어보자” 같은 식으로 책 읽기를 시키잖아요. 3학년 때인가, 제 번호가 24번이었는데, 24일 아침이 되면 무서웠어요. 반 아이들 앞에서 단 한 문단을 읽어도 손에 땀이 나고 벌벌 떨렸어요. 읽다가 틀리는 건 아닐까? 공포에 시달리고, 너무 두려웠어요. 그때부터 느꼈죠. 아, 나는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게 어려운 아이구나.
GQ 더 완벽하게 잘하고 싶은 마음에서 피어난 공포였을까요?
CM 어릴 때부터 완벽주의가 있었어요. 해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되게 심했어요. 장점이자 단점인데, 제게 너무 엄격해요. 고치고 싶어도 고쳐지지 않더라고요. 누군가 칭찬을 해줘도 의심을 먼저 해요. 진짜 잘한 게 맞을까? 이것이 장점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제 스스로를 갉아먹는 느낌이 들어요. 안 되는 건 될 때까지 하고 싶다는 고집이 있고요. 될 때까지 무식하게 반복, 반복.

실크 하보타이 셔츠와 팬츠, 글레이즈드 레더 스탠턴 더비 슈즈,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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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완벽주의에는 끝이 없으니까요.
CM 네. 그래서 이런 고민에 대한 저만의 해결 방법을 찾으려고 하는데, 그것이 좀 아까 말한 ‘여유’와도 연결돼요. 거기다 저는 멀리부터 차근차근 준비해오는 스타일이 아니라, 몰아쳐서 해야 효율을 보는 편이에요. 급박함이 느껴져야 더 열심히 하게 돼요. 완벽주의인데, 벼락치기형. 딜레마예요. 벼락치기로 효율을 보는 건 맞는데, 이왕이면 더 먼저 시작했으면 잘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그 두 생각이 늘 대립해요.
GQ 생각이 많군요.
CM 많아요. 너무 많아요. 그래서 조금 비우고 싶어요.
GQ 비워내는 방법을 조금은 터득하고 있어요?
CM 아직은 비워내기보다는, 제 그릇에 넘칠 듯이 채운 뒤에 그 넘치는 것들을 조금씩 덜어내고 있는 단계인 것 같아요.

울 모헤어 재킷과 쇼츠, 스트라이프 실크 파자마 셔츠,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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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꿈도 많이 꾸나요?
CM 많이 꿔요. 주연을 맡고 나서는 깊게 잠들지 못하게 됐어요. 개꿈도 꾸고, 어떨 때는 상징적인 꿈도 많이 꿔요. <폭군의 셰프> 캐스팅되기 직전에 집이 엄청나게 큰 불에 휩싸여서 죽을 뻔하는 꿈을 꾸다가 식은 땀을 흘리면서 깼어요.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실감이 나는 꿈이었어요. 챗 GPT한테 해몽을 부탁했는데, 굉장히 길몽이라고 하더라고요. 곧 좋은 일이 일어날 거다. 그러다 갑자기 <폭군의 셰프> 이헌 역에 캐스팅이 됐어요. 최근에 꾼 꿈요? 좀 더러운데.(웃음) 대변이 나오는 꿈이요. 대변 꿈에도 길몽이 있고 흉몽이 있다던데, 제가 꾼 꿈은 다행히 길몽이래요.
GQ 문득 궁금하네요. 요즘도 긴장해요?
CM 지금도 카메라 앞에 서면 떨려요.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데뷔 때보다는 나아졌지만 거의 비슷해요. 긴장과 떨림을 숨기는 방법을 알게 되었을 뿐이죠. 안 그런 ‘척’하는 거예요.(웃음) 안 떨리는 척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에게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거든요. 나는 떨고 있지 않아. 그렇지만 이 떨림은 평생 극복될 것 같지는 않아요. 그 미세한 떨림을 이제는 즐기려고 하고 있고, 그게 마냥 싫지 않은 느낌이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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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마냥 싫지 않은 느낌’이라는 말이 좋네요.
CM 저도 이렇게 즐기게 될 줄 몰랐어요.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매번 신기해요. 그리고 궁금해요. 언젠가 전혀 떨리지 않는 때가 오게 되면 어떨까? 너무 안 떨리면 재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해요. 무엇이든 장단점이 있는 거니까.
GQ 무엇이든 장단점이 있다는 진리는 누가 알려줬어요? 스스로 터득했어요?
CM ‘그럴 수도 있지’. 제 성향이 그래요. 무엇이든 좋은 면이 있으면 안 좋은 면도 있다고 생각해요. 양면성을 인정하려고 해요. 그러지 않으면 세상의 아무것도 받아들일 수가 없더라고요. 저는 꽉 막힌 우물 안 개구리가 되고 싶지 않아요. 그래서 더 열려고 노력을 해요. 현장에서도 결국 함께 일하는 분들과 잘 지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그래야 연기도 더 편하게 나오고, 더 좋은 결과물을 위해 제가 원하는 바도 말씀드릴 수 있고, 편하게 소통할 수 있는 것 같아요. 농담 삼아 ‘분위기 메이커’를 자처하는데, 현장에서 시답지 않은 농담도 많이 하려고 해요. 그래서 가끔 더 멀리하는 분도 계신데. 농담이고요(웃음). 저는 무게 잡지 않아요. 편한 존재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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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마지막 현장마다 울던 이채민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요즘도 자주 울어요?
CM 네. 제가 우는 데는 이렇다 할 포인트가 없어요. 제 마음에 훅 다가오는 것이 있으면 왈칵 눈물이 나요. 감정이 말라 있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연기하고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니까. 어릴 때부터 리액션이 굉장히 큰 편이었어요. 웃을 때도 박장대소하고, 울 때도 펑펑 울었죠. 턱이 벌벌 떨릴 정도로 서럽게 울었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항상 그러셨죠. “너는 할리우드에 가야 해”.
GQ 감정을 꺼낼 수 있도록 존중해주는 훌륭한 부모님이었네요.
CM 제 감정, 제 생각을 굉장히 존중해주셨어요. 거기서 영향을 많이 받았죠. 한번도 “공부해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어요. 제 선택을 믿고 맡겨주셨어요. 그 점이 너무 감사해요. 나이가 들면 제가 어떻게 변할지 모르겠지만, 제 순수한 감정을 최대한 오래 가져가고 싶어요. 그런데 저희 가족 네 명 다 울보예요. 아빠는 영화관에 갈 때 어떤 장르든 휴지를 챙겨 가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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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울고 싶은데 참아야 할 때는 어떻게 해요?
CM 참지 않아요. 눈물은 부끄러운 감정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누구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고요. 화는 피해를 주니 참아야겠지만, 눈물은 참으면 더 아프잖아요. 마음에 병이 생기잖아요.
GQ 순수한 감정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해요?
CM 줏대를 가지고 살아가려고 해요. 제 생각이나 가치관을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요. 쉽게 휘둘려서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배우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강해지려고 해요. 그 안에서 유연함도 간직하면서.
GQ 가장 변치 않고 싶은 것은 뭐예요?
CM 솔직함. 순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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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Q 아직 보여주지 않은 이채민의 얼굴은 뭘까요?
CM 바보 같고 단순한 모습. 친한 사람들만 아는데 아직은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오늘이 제 인생에서 가장 젊은 날이잖아요. 젊을 때 아직은 더 멋있고 싶어요.
GQ 어떤 사람이 멋있다고 느껴요?
CM 강강약약. 정말 어려운 거니까요. 돈이 많거나 가진 게 많다고 될 수 있는 게 아니고, 내면의 그릇이 꽉 차 있어야 가능한 일 같아요. 강한 사람들에게 강하고, 약한 사람에게 약한 사람들 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낭만 있다.
GQ 낭만.
CM 그런 분이야말로 여유와 카리스마를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따르고 싶은 리더,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멋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고요.
GQ 이채민이 말하는 힘이나 카리스마는 차갑고 딴딴한 느낌이 아니라, 유하고 유들유들한 느낌이에요. 그런 부드러운 이미지가 안개처럼 눈앞에 그려져요.
CM 저는 그게 좋아요. 딱딱한 건 안 좋아해요. 뭐든 융통성 있게, 말랑말랑한 게 좋아요.

울 모헤어 재킷, 코튼 포플린 슬림핏 팬츠와 셔츠, 실크 새틴 타이, 글레이즈드 소재 스탠턴 더비 슈즈, 모두 생 로랑 by 안토니 바카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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