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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라이더의 셀린느가 그린 파리지엔의 옷장

2026.03.28.하예진

연필을 깎듯 또렷해진 윤곽. 셀린느 2026 F/W 컬렉션.

프랑스 학사원에서 열린 셀린느 2026 F/W 쇼는 베뉴만으로도 새 컬렉션의 분위기를 짐작케 했다. 프랑스 지성의 심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센강을 사이에 두고 파리의 두 세계가 만나는 지점. 패션의 화려함을 상징하는 북쪽 리브 드루아트와 철학과 문학의 전통이 흐르는 남쪽 리브 고슈가 이어진다. 그 경계에서 열리는 쇼라면 으레 클래식하고 지적인, 그럼에도 반짝이는 무엇을 기대하게 했다. 학사원 내부는 무언가를 그리기 직전의 도화지처럼 정갈하게 비워졌다. 사운드 아티스트 마테오 가르시아가 셀린느를 위해 특별히 제작했다는 묵직한 목조 스피커만이 종이 위에 문진을 얹듯 곳곳에 놓였다. 이제 그 위에 옷이 그려질 차례였다.

스케치처럼 런웨이를 채운 것은 옷장에 있을 법한 클래식 아이템들이었다. 테일러드 재킷과 트렌치코트, 컬러 셔츠, 크롭트 팬츠, 슬림 로퍼. 점잖고 단정한 실루엣이었지만 그럼에도 날카로운 익숙함으로 다가온 이유는 이를 채색하는 방법에 있었다. 가장 다재다능한 건 스카프였다. 볼드한 스카프를 목에 사탕처럼 감거나 한쪽 어깨의 앞뒤로 흐르게 해 클래식 룩의 경직을 풀었다. 원형 버클 디자인의 슬림 벨트는 꼬리를 정리하지 않고 밖으로 늘어뜨려 우아하면서도 경쾌한 변주를 더했다. 깃털 헤어피스는 착용하면 언뜻 머리가 삐죽 삐쳐 나온 듯 보여 묘한 반항기를 부여했는데, 이 대목에서 부르주아 집안에서 자랐지만 가슴속엔 록스타를 새긴 엘리트 청년에 대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가족의 옷장에서 꺼낸 올드 셀린느 룩을 제 입맛대로 소화하며, 셔츠의 한쪽 깃과 소매만 빼며 멋내는 그런 파리지엔이 런웨이에 오른 것 같았다.

마이클 라이더는 쇼 노트에 “연필을 깎는 일”이라는 표현을 썼다. 데뷔 시즌이 셀린느의 유산을 탐색하는 과정이었다면, 이번 컬렉션은 그에게 연필심을 뾰족이 하듯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고 셀린느의 선을 날카롭게 다듬는 작업이었을까. 새로운 셀린느는 ‘입을 수 있는 옷’이면서도 현실에 발을 붙인 채 그 현실을 조금 더 근사하고 예리하게 보정한다. 날 선 연필로 라이더가 그려갈 셀린느가 조금 더 또렷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