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art

과거와 현재가 만나는 공간, 국내 건축 여행 지도

2026.04.14.김은희

다층적 공간을 향하여.

서울 연희정음
건축가 김중업(개·보수 건축가 김종석) |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맛로 17-3

“가능한 한 김중업의 언어를 되살린다.” 1984년 김중업이 설계한 주택은 30여 년 동안 그 쓰임을 다하고, 이후 지하 일부가 증축되어 카페와 주점으로 쓰이며 다른 모습이 되어가다 지금의 건축주이자 리모델링 건축가 김종석을 만났다. 그는 김중업의 언어를 최대한 살린다는 기조 아래 1층 스테인드글라스와 원형 계단을 원위치로 수리하고, 반원형 천장이나 곳곳의 원형 창문 등 여러 마감재 아래 묻힌 원의 디테일을 복원했다. 지금은 사라진 제주대학교 본관의 빙그르르한 계단, 서산부인과의 둥근 외관 등 김중업 건축에서 원형은 여러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이를 두고 현대인들은 처마 곡선과도 같은 한국 전통 건축의 소담한 미, 서구 모더니즘에서 기인한 구조감, 이 둘이 합쳐진 독창적이고도 과감한 예술적 조형성이 김중업 건축의 언어라 평한다. 이제는 연희정음이라 불리는 이곳은 김중업의 건축적 언어를 되살리려는 시도 뿐 아니라 내재된 예술적 사유도 이끌어내고자 전시와 세미나, 공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펼친다.

온양 구정아트센터
건축가 이타미 준 | 충남 아산시 충무로 123 온양민속박물관 내

건축가 이타미 준의 다른 이름은 유동룡이다. 일제강점기 시절 일본에서 태어나 평생 그곳에 살았으나 유동룡이라는 한국 이름과 국적을 지켰다. 제주 들판의 나지막한 오름 같은 포도호텔, 이름처럼 방주 그 자체인 제주 방주교회, 최근 유동룡의 설계를 표절한 것으로 입증된 경주타워의 원안인 황룡사 9층 목탑 형태에서 영감 받은 ‘유리의 탑’과 같이, 유동룡이란 건축가의 손끝에서는 부드럽고도 강직한 선의 힘이 전해진다. 구정아트센터의 골자는 거북선에서 길러왔다. 아산이 충무공이 자라나고 영면한 땅이라는 상징성을 살리기 위해 지붕을 거북선처럼 만들고, 내부 구조는 충청도의 ‘ㅁ’자형 가옥 구조에, 지역 일대의 풍부한 자원인 돌을 활용해 돌담으로 조성했다. 이 건축이 자리한 온양민속박물관의 설립자는 한국 최초로 아동 서적 전문 출판사를 만들고 문화적 뿌리를 튼튼히 하는 일을 중히 여긴 구정 김원대 선생이다. 구정아트센터에는 두 사람의 뜻이 한데 모여있다. 그것은 온고지신,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미루어 새로운 것을 아는 일.

강릉 초당성당
건축가 김영섭 | 강원도 강릉시 연당길 49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물고기 모양인 대지를 도화지로 두고 오병이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인 성경 속 기적을 건축적 상징으로 삼았다. 성당의 소박한 백색 겉모습에 가까이 다가서면 그 외벽이 자잘하니 깨진 타일로 이뤄진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를 두고 어떤 이들은 물고기 비늘이 연상된다, 아픔을 딛고 달걀 껍질이 깨지는 순간이다, 의미를 더하곤 한다. 하나 진실은 “척박한 현실 속에서 한계 상황의 건축을 실현하기 위해 온갖 싼 재료에 대한 실험은 다 해본” 결과다. 1997년 착공해 2002년 성당을 완공시킨 건축가 김영섭은 그해 월간에 밝혔다. “그건 참 눈물이 나는 장면이에요. 깨진 타일을 왜 썼겠어요? 한국 건축 현실의 척박함이 여기 있어요.” 그 척박함이란 당시 만난 안도 다다오가 굉장히 저렴한 건축을 하고 있다고 “자랑”하길래, “그래, 제가 픽 웃으면서 당신은 평당 1백30만 엔 정도 하지 않느냐, 우리 돈으로 1천3백만원. 우리는 일본의 10분의 1로 작업”한다 여민 자그마한 호주머니. 3×3센티미터 타일 깨진 것, 버린 것 수소문해서 외장 마감하고는 “그러면서도 구현해내야만 하는 작가의 천형이 있는 것”이라 짓고 마는 너털웃음. 죽어야 이 업보가 끝나리라 생각한다는 건축가는 십자가를 짊어진 마음과 다름없이 구원의 공간을 빚었다. 이곳을 찾는다면 깊이 안으로도 걸어가보기를 권한다. 고도차가 7미터쯤 되는 대지 특성을 살려 본당 내부로 향하는 복도가 굽이굽이 은은히 고난한데, 죽음을 뜻하는 회색으로 채색한 그 길 끝에 펼쳐지는 환한 빛에 닿으면 종교 건축이 품은 차분한 힘이 차오른다.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다 해도.

동해 무릉별유천지
건축가 김효영 | 강원도 동해시 이기로 97

1978년부터 40년 넘게 석회석을 생산하던 광산의 영광이 저물며 커다랗고 굼뜬 덩어리마냥 방치돼 있던 쇄석장이 무릉별유천지라는 새 이름을 얻었다. 속세와 떨어진 별천지란 의미다. 암석을 내주느라 절벽이 된 산등성이는 기암괴석처럼 특별나 보이고, 파낸 땅에 물이 고여 자연스레 호수를 이룬 수면은 석회석 성분이 빛에 산란돼 에메랄드색으로 빛난다. 그 호수에는 청옥호란 애칭이 생겼다. 늙고 쇠한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을 폐쇄석장의 일면들이 생기 넘쳐 보이는 연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과거 빛나던 속세를 애써 붙잡듯 커다란 하트로 도배하거나 금칠을 하는 대신 장소의 정체성에 충실한 건축의 힘이다. 이번 폐쇄석장 문화재생사업을 통해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처음 진행해봤다는 건축가 김효영은 그 과정이 마치 화가가 자화상 그리는 일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회상했다. 왕성했던 산업 역군. 닥쳐온 IMF 시절 떠밀리듯 명예 퇴직한 가장 같은 쓸쓸함. 그러나 다시 아무렇지 않은 듯 입어야 하는 옷. 건축가 김효영은 그 오랜 정장을 찢어진 청바지처럼 만드는 대신 솔기를 잘 쓸고, 틀어진 어깨선을 맞추고, 보풀을 깔끔히 정리해 말쑥하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컨베이어 벨트가 돌아갈 것같이 쇄석장 본연의 역할을 단정하게 살린 건축체가 중심을 잡아주는 덕분에 호수 곁에 조성한 라벤더 밭도, 호수 위를 가르는 스카이글라이더도, 발랄하게 느껴진다. 라벤더는 6월에 만개한다.

해남 유선관
건축가 김대균(개·보수) |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376

유선관이라는 공간에 닿기까지 자분자분 걸어가는 길 자체가 한 줄기 여행인 곳. 두륜산 도립공원 입구 매표소부터 고려 이전에 지은 절인 대흥사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한 유선관은 절을 찾는 수도승과 방문객을 위한 숙소로 1910년대부터 운영됐다. 1970년대 들어 일반인에게도 개방하면서 근대식 여관의 시초가 된 이곳을 경건한 틀은 그대로 두고 최소한으로 고쳐 현재는 한옥 호텔로서 손님을 맞는다. 서울 서촌에 자리한 시인 이상의 집을 다듬고 양구백자박물관을 설계한 김대균 건축가는 유선관을 새롭게 쓸고 닦은 과정을 씨간장에 비유한다. “씨간장이 새 간장을 더해 생명을 이어가듯 유선관이 지닌 핵심 구조는 유지하되 현대인이 불편함이 없어 계속 이용하는 공간이 되어야겠다 싶었지요.” 한옥의 매서운 웃풍은 전통 창살문을 닮은 현대식 새시로 차단하고, 바깥의 화장실은 각각의 방으로 들여 독립성을 만들었다. 한옥의 고운 처마선은 여전해서 이곳을 둘러싼 두륜산 기슭의 소나무, 삼나무, 측백나무, 편백나무, 벚나무, 숱한 녹음이 부드러이 어우러진다.

군위 사유원
건축가 승효상, 최욱, 알바로 시자 외 | 대구 군위군 부계면 치산효령로 1176

이게 가능한 일인가, 몇 번을 눈을 끔뻑였다. 불가능할 것도 없지, 심드렁하게 여기기에 이 땅은 너무도 광활하고 수놓인 이야기는 촘촘하다. 사유원은 대구의 중견 기업으로 꼽히는 태창철강 유재성 회장이 팔공산 자락 70만 제곱미터 면적에 조성한 수목원이다. 여의도공원 면적이 22.9만 제곱미터다. 여의도 공원을 세 번 이어 붙여야 맞먹는다. 유재성 회장이 평생 아꼈다는 바위, 소나무, 배롱나무, 모과나무 등을 한데 모아 만들고자 했던 사색의 공간은 2009년 5월 배롱나무 최초 이식 – 2009년 11월 소나무와 소사나무 최초 이식 – 2010년 3월 모과나무 4그루 최초 이식 등등 기록을 이어오다 2021년 9월 사유원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열었다. 2026년 현재 사유원에는 108그루가 넘는 모과나무와 200년이 넘은 배롱나무, 느티나무, 팥배나무, 감나무, 소나무가 우직하고, 5월에는 맥문동이, 6월에는 산수국과 수련이, 8월에는 참나리가 한들거린다. 한국을 대표하는 조경가 정영선과 김현희, 일본 조경가 카와기시 마츠노부, 그 사이 속속 빛을 비추는 건축 조명 디자이너 고기영까지, 그야말로 대작을 그리듯 여러 전문가가 손을 모았는데, 여기에 더해지는 아름다운 한 획은 건축이다. 승효상, 최욱, 알바로 시자, 안드레아 리베라니가 숲 곳곳에 공간이라는 숨을 불어넣었다. 빈자의 미학, 승효상. 수평의 자태, 최욱. 아무것도 창조하지 않고 단지 실재를 변형할 뿐이라는 알바로 시자. 절제와 균형, 안드레아 리베라니. 이들의 건축미가 숲속 새벽 안개처럼 투명하고도 조용히 퍼져 있다.

제주 본태박물관 신관 본스타
건축가 안도 다다오 |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산록남로762번길 69

2012년 개관한 본태박물관은 쿠사마 야요이의 노란 호박부터 우리나라 제례 기물이 그려진 제기도병풍까지 현대 미술과 전통 공예가 맞닿아 있는 곳이다. 안도 다다오가 예의 노출 콘크리트와 빛, 물로 빚은 이 공간은, 콘크리트라는 소재가 주는 딱딱함 너머 자유로이 바람이 오가는 길이 연상되는 그의 이질적이고도 단일한 건축적 매력과 퍽 잘 어울린다. 14년만의 신관 또한 안도 다다오가 담당했다. 다만 이번에는 그의 기존 건축 언어에서 달리 나아가 새 재료를 활용했다. 스테인리스다. 신관에 대해 본태박물관은 “제주 자연의 변화하는 표정을 담아낸다”하는데, 실제로 잠깐 동안에도 제주 바람에 지나가는 구름, 그늘, 빛, 앞바다의 물결 따라 스테인리스 외벽이 반짝이다 일렁이다 사그라지다 다시 뜨겁게 피어난다. 개관을 기념하며 2027년 4월 5일까지 안도 다다오의 주요 프로젝트를 조망하는 전시 가 열린다. 물성과 자연, 인간을 어떻게 하나의 공간 경험으로 엮어내는지 체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기회다.

🚙 쉬어가세요
건축 여행지 주변 식도락 목적지들

서울
<대화: 두 건축가의 운명적 만남> 연희정음에서 3월 31일까지 열리는 김중업과 그의 선생 르 코르뷔지에 사진전. 평면적 회고 대신 이를 토대로 가구 디자이너 박종선 등 현대 작가가 재해석한 결과를 함께 전시한다.

온양
<한국인의 삶> 향토음식, 의관정제 등 전통 의식주와 지혜를 전하는 온양민속박물관의 상설 전시. 말끔한 효자손과 면 실내화 등 박물관 굿즈도 멋스럽다.

강릉
초당마을숲 조선시대 문인 남매 허균과 허난설헌의 생가 터가 있는 마을 이름 ‘초당’은 이들의 아버지 허엽의 호에서 따왔다. 생가 터를 둘러싸고 여든 살 넘은 소나무 3천여 그루가 푸르게 군락을 이루고 있다. 📍강릉시 난설헌로193번길 1-16
동화가든 초당의 또 다른 자랑거리. 허엽 선생이 동해 바닷물로 두부를 만들었더니 고소하고 몽글몽글해 유명해진 초당순두부다. 어딜 가든 하얗고 말간 순두부가 담백하고 순한데, 이곳은 거기에 최초로 빨갛고 매운맛을 더했다. 일명 짬뽕순두부 맛집. 📍강릉시 초당순두부길77번길 15

동해
무릉반석 무릉별유천지 근처 무릉계곡 초입에 자리한 너른 암반인 무릉반석에 대자로 누워 있어볼 것. 그 위에서 봄가을마다 지역 어린이들의 사생대회가 열릴 만큼 드넓은 반석, 장수돌침대 같은 암반의 매력이 별 다섯개. 📍강원도 동해시 삼화동 859-1 베틀바위 산성길

해남
대흥사 두륜산 도립공원 매표소부터 유선관을 지나 대흥사 일주문까지 편도 40분 거리 산책길을 장춘숲길이라 부른다. 봄길이 길고도 좋아 ‘장춘’이다. 매표소 왼쪽은 포장도로, 오른쪽은 날것의 산책로다. 흙 냄새 맡는 오른쪽 길로. 📍전남 해남군 삼산면 대흥사길 400

군위
매화 동행 산책 명상 시간을 비롯해 해설사와 함께 매화 나무를 따라 산책하는 사유원 프로그램. 최욱이 건축한 가가빈빈에서 즐기는 매실차가 화룡정점. 3월 31일까지.

제주
삼거리식당 본태박물관에서 큰길로 나오다 만나는 삼거리의 식당. 큼직한 갈치 조각, 푹 조린 무, 칼칼한 맛이 기분 좋은 맛집이다. 다층적 공간은 이렇듯 곳곳에. 📍제주 서귀포시 안덕면 일주서로 1332

일러스트레이터
조성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