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올드 트레포드의 시간

2009.04.10GQ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 구장 올드 트래포드에 다녀왔다. 이‘오래된’경기장엔 박지성도 있고, 서울도 있고, 배려, 역사, 자부심도 있다.

에브라 옆에 박지성, 박지성 옆에 파비오, 파비오 옆에 라파엘이 앉습니다.

선수 대기실에서 박지성 옆엔 누가 앉을까? 오른쪽은 단짝인 에브라, 왼쪽은 파비오, 라파엘 형제가 앉는다. 내부는 반원 모양이다. 선수들이 빙 둘러앉고,정면엔 커다란 텔레비전이, 그 양쪽으론 작전 판이 있다.선수들은 이 안에서 옷을 갈아 입고 대기한다. 개인별 라커는 없다. 퀴즈 하나 더. 루니 옆 자리는 누굴까?호날두 옆 자리는? 독일 월드컵 8강전에서 호날두가 심판에게 루니의 파울을 일러바친 이후로 둘은 나란히 앉는다. 월드컵이 끝난 후 둘의 관계에 대해 언론이 관심을 갖자 붙여 놓은 게 아닌가 싶다.

서울시는 지난해 9월부터 맨유를 공식 후원하고 있다.액수는 25억 선이고, 계약은 5월에 만료된다. 맨유 경기를 자세히 보면 경기장 안에 설치된 디지털 보드에 ‘Visit KOREA, Discover SEOUL’이란 문구가 뜨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에디터가 방문했을 때는 경기장 입구에 가로 세로 10미터가 넘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 곱게 한복을 입은 여자 사진 위에 ‘Hi Seoul’이라고 적혀 있다.‘Hi Seoul’은 관중석 한쪽 벽에도 있다. 고개를 들고 구장전체를 둘러 보면 나이키 로고 다음으로 눈에 띈다.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 취재진도 와 있었는데, 놀라며 부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정말 부러워할 만한 일인진 확신이 안서지만, 세계 최고 구단의 홈 구장에서‘서울’을읽는건 색다른 경험이긴 했다.

‘Hi Seoul’이 새겨진 벽 앞은 휠체어석이다. 올드 트래포드에서는 장애인도 불편 없이 경기를 관람할 수 있다. 일반인보다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장애인들을 위한 펍, 전용 출입구, 전용 휴게실,전용 의무실도 있다. 공간이 넓어서 움직이기에 좋다.그라운드 한가운데엔 비슷한 모양의 기계들이 여러 대들어서 있었다. 경기도 없는 날이고 하여, 무대라도 설치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초등학교 운동장도 아니고,올드 트래포드에서 전국노래자랑이 열릴 일은 없다.가까이 가서 보니 인공 햇빛이었다. 대단한 장비긴 한데,왜 우리나라 구장들은 그렇게 안 하냐고 할 것까진 없을 것같다. 영국은 일조량이 적다. 가만 두면 잔디가 엉망이 된다.

정작 부러운 건 이런 것이다. 올드 트래포드 실내를 돌아다니면 유난히 낡은 통로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딱 그 부분만 오래전에 지어진 것처럼 보인다. 맞다.올드 드래포드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폭격에 의해 상당 부분 파괴됐다. 이 통로는 그때 살아남았다. 폭격전까지만 해도 선수들은 이 통로를 통해 경기장으로 들어갔다. 의미가 남다른 통로였다. 우리나라 같았으면,다 허물고 새로 지었을 텐데, 영국인들은 남은 것을 보수하고, 그 위에 하나하나 새로 쌓아 올렸다.이제 선수들은 다른 통로를 통해 경기장으로 들어가지만,그 통로는 역사의 한 장면으로 보존돼 있다. ‘역사’를 지나 걸어 들어오면, 양쪽으로 홈팀과 원정팀 벤치가 나온다. 중계 화면에선 둘 사이의 거리가 꽤 멀어보이는데, 실제론 이야기를 주고받을 수 있을 만큼 가깝다.

올드 트래포드는, 영국인들은 축구 없이 살 수 없는사람들이란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그들에게 축구 역사는 소중한 유물이다. 구장 바깥 벽엔 바늘이 멈춘시계 하나가 달려 있다. 시계엔 ‘FEB 6th 1958 MUNICH’라고 적혀 있다. 1958년, 챔피언스컵 준결승행을 결정지은 맨유 선수단을 태운 비행기는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에서 맨체스터를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비행기는 뮌헨에서 사고를 당했다. 15명이 사망했다.시계는 그날의 아픔과 소중한 선수들을 기억하기 위한 의지이며, 기념비다.올드 트래포드에서 팬들은 경기만 보고 가는 게 아니다.올드 트래포드의 역사, 맨유의 역사, 축구의 역사를 다 보고간다. 동시에 그건 그들의 할아버지, 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자신들의 역사이며, 그들 자신의 정체성이다.

    에디터
    이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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