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회색 인간

2010.03.31박나나

‘아메리칸 클래식’ 의 파발마, 패션 디자이너 톰 브라운을 뉴욕에서 만났다. 발목이 휑한, 바로 ‘그’ 회색 수트를 입은 그와 대낮에 샴페인도 한잔 했다. 그가 내놓은 샴페인 잔은 뭉툭하고 뚱뚱했다.

예상대로 오늘도 회색 수트를 입었네요. 다른 건 안 입어요?
절대요.

다음 질문이 ‘그렇다면 어떤 옷을 입나요’ 인데도요?
미안해요. 전 이 옷이 제일 편해요.

도대체 ‘그’ 회색 수트는 몇 벌이나 있어요?
생각보단 많지 않지만, 남들보단 좀 많긴 하죠.

매일 아침 조깅을 한다면서요? 오늘도 센트럴 파크를 달렸나요?
오후에 할 생각이에요.

조깅할 땐 무슨 옷을 입어요? 회색 수트를 입진 않겠죠?
흰색 티셔츠를 입고 나이키 운동화를 신어요. 운동복은 나일론으로 만든 건데 평범한 거예요. 아, 그것도 회색이네요.

조깅 말고 다른 운동은 안 해요?
꾸준히 할 수 있는 운동이 달리기뿐이에요. 뉴욕에선 마땅히 운동할 수 있는 장소도 찾기 어렵잖아요. 수영도 했는데 이젠 더 이상 안 해요. 테니스도 해봤지만 별로 재미가 없었어요.

그렇게 운동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당신이 만든 회색 수트를 입기 위한 건가요? 톰 브라운 옷을 입은 사람은 많이 봤지만, 당신만큼 잘 어울리는 사람은 없거든요. 당신 옷은 ‘몸’이 중요하죠.
고마워요. 하지만 꼭 그런 건 아니에요. 약간 도움이야 되겠죠.

요즘 옷들은 대부분 키가 크고 날씬한 사람들을 위한 거죠. 하지만 당신 옷은 조금 달라요. 가끔은 그런 사람들에게 어색하고 어렵기까지 하죠. 혹시 가늘고 긴 것에 대한 콤플렉스라도 있나요? 샴페인도 쿠프(짧고 뚱뚱한 잔)에만 마시잖아요.
그건 저 때문에 생긴 오해인 것 같아요. 사람들이 제 몸을 보고 톰 브라운 옷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게 된 거죠. 하지만 제겐 아주 다양한 고객들이 있어요. 키가 작고 마른 사람부터 키가 크고 뚱뚱한 사람까지요. 연령대도 다양하죠. 사무실에 있는 톰 브라운 남자 직원들은 대부분 모델 같은 몸을 갖고 있어요. 모두 저와 똑같은 옷을 입었지만, 아무도 저 같진 않죠.

톰 브라운을 제대로 입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자신감이 필요해요. 물론 옷을 만들 땐 제가 원하는 정확한 스타일이 있어요. 하지만 옷이란 건 누가 입느냐가 가장 중요하죠. 제 옷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든 재미있게 받아들이든 그건 그 옷을 입은 사람의 몫이에요.

당신 컬렉션은 언제나 완벽해요. 재킷 형태, 양말 무늬, 단추 개수까지 모든 게 바둑판처럼 정확한 틀에 맞춰진 것 같아요. 귀마개에 달린 털의 개수까지 모두 정해져 있는 게 아닌가 할 정도예요.
그렇게 보인다니 기쁘네요. 하지만 세상에 완벽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제 생각도 그래요. 너무 완벽한 건 오히려 갑갑해질 수 있으니까요. 톰 브라운에서 약간의 여유를 찾는다면 어떤 부분일까요?
유머요. 전 컬렉션를 위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오랫동안 고민해요. 하지만 관객들까지 진지한 건 싫어요. 그래서 유머가 필요한 거예요. 아주 여성스러운 옷을 입은 남자 모델을 등장시키거나, 셔츠를 정석대로 입지 않는다거나, 바지 길이를 짧게 하는 것처럼요. 일부러 헛점을 보이는 거죠. 그럼 사람들은 웃느라 심각해질 틈이 없어요. 모든 게 지나치게 진지해지는 순간, 그건 지루함으로 바뀌거든요.

예전엔 모델들을 ‘고문’하고 ‘혹사’시킨다는 얘기도 많이 들었죠? 그만큼 ‘쇼’를 많이 보여줬다는 얘기겠죠. 하지만 최근 몇 번의 컬렉션에선 ‘쇼’를 많이 덜어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콘셉트가 바뀐 건가요?
모든 게 달라졌죠. 언젠가부터 장소에 공을 많이 들이게 됐어요. 수영장에서 진행했던 밀라노 컬렉션 때부터였던 것 같아요. 이번 컬렉션을 위한 파크 애비뉴 아모니도 완벽한 장소였기 때문에 다른 게 필요 없었어요.

이번에 톰 브라운 컬렉션을 처음 본 여성지 에디터들은 마치 오튀 쿠튀르를 보는 것 같다고 했어요. 어떤 여성 컬렉션보다 더 많은 공을 들이고 더 화려했다는 얘기겠죠?
정말 듣기 좋은 말이네요. 제가 무뚝뚝하고 담담한 성격인 것 같아도, 제 옷을 본 사람들이 거기에 들어간 공을 알아주길 바라거든요. 애들 같죠? 하지만 그게 패션을 하는 이유예요. 아름답게 만들어진 건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법이니까요.

당신은 보여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그걸 다 담기에 어쩌면 뉴욕이 작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파리에 가려는 건가요? 네. 지금 당장요.

하지만 디자이너들이 파리에서 모두 성공한 건 아니에요. 불안하지 않아요?
전혀요. 전 제 할 일을 할 거예요. 물론 모든 책임은 제가 져야겠죠. 파리로 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제일 큰 이유는 비밀이에요. 파리에 가면 옷을 더 빨리 생산하고 판매할 수 있으리란 기대도 있고요.

파리에서의 톰 브라운은 뭐가 달라질까요?
달라지는 건 없을 거예요.

당신이 떠나고 나면 뉴욕은 톰 브라운을 그리워할 거예요. 다행인 건 컬렉션 외에도 당신이 뉴욕에서 하는 일이 참 많다는 거죠. 몽클레르, 브룩스 브라더스, 클럽 모나코….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하나요?
많이 바쁘긴 해요. 하지만 디자인하고 컬렉션을 준비하는 건 제겐 아주 쉬운 일이에요. 사업을 하려면 많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데 그게 훨씬 힘들죠.

다른 패션 디자이너들은 영화도 만들고 가구도 만들고 심지어 화장품도 만들어요. 당신은 패션 외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 같아요.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언젠간 다른 일도 꼭 해보고 싶어요. 가끔 이런 마음을 컬렉션에서 보여주기도 해요. 눈치 못 챘어요?

얼마 전 버그도프 굿맨에서 톰 브라운 가격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가격을 많이 내렸더라고요. 왜 그랬어요?
지금 톰 브라운은 브랜드 확장 단계예요. 더 많은 소비자층을 확보하기 위한 노력 단계라는 말이죠. 가끔 젊은이들이 정말 원하는 옷을 구매할 능력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많이 봤어요. 그들을 위해서라도 기존의 제품 수준을 유지하면서 가격을 내려야겠단 생각을 했어요.

사업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이지만, 요즘 디자이너들은 과거의 디자이너들보다 능력이 뛰어나요. 옷도 잘 만들지만, 사업 수완도 좋거든요. 스스로도 사업을 잘하는 게 패션의 현실이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톰 브라운 스스로의 패션 사업 능력을 평가한다면 어느 정도일까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단 사업도 잘한다고 생각해요. 어눌하거나 소심한 남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전 그 능력에만 집중하고 싶진 않네요.

그럼 언제든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도 있겠군요?
그렇죠. 하지만 옷을 만드는 게 가장 먼저죠. 제가 가장 큰 책임감을 갖는 부분이니까요.

당신은 이미 미국 클래식 역사에 포함되어 있어요. 브룩스 브라더스, 랄프 로렌, 그리고 톰 브라운으로 이어지는 아메리칸 남성복 클래식 계보를 어떻게 이어나갈 건가요?
톰 브라운의 회색 수트, 사실 꼭 회색이 아니더라도, 톰 브라운 수트의 미묘한 비율을 기억하게 만들 거예요.

같은 패션 디자이너로서 동경하는 사람이 있나요?
한 사람을 꼽긴 싫어요. 한 명을 언급하면 다른 사람은 잊히기 마련이죠. 전 스타일이 확실한 디자이너가 좋아요. 그들은 ‘패션’을 정의하기보다 ‘나의 패션’을 말할 수 있으니까요.

그럼 스타일이 확실한 패션은 빛의 속도로 바뀌는 유행에 상관없어도 되는 걸까요?
지금까지 패션계를 주도한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소신대로 옷을 만들었죠. 물론 모두가 다 좋아했던 건 아니었고, 가끔은 대중들의 외면을 받기도 했죠. 하지만 이런 ‘창작’ 활동은 사람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후대의 패션 디자이너들에게 많은 영감을 줬어요.

당신도 그런가요?
그렇게 되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만들고 싶은 옷을 소신껏 만드는 거죠.

60년대 수트가 가장 아름답다고 한 적이 있죠? 그럼 현재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뭔가요?
개인적으로 지나치게 치장한 남자를 좋아하지 않아요. 여자도 마찬가지고요. 신경 쓰지 않은 것 같지만 좋은 느낌을 주는 것. 그게 제일 아름다운 것 같아요.

최근에 구입한 것 중 참 아름답다는 생각이 드는 건 뭐예요?
샴페인과 나이키 신발요.

샴페인을 정말 좋아하네요. 매일 마시나요?
네.

뚱뚱하고 투박한 잔에만 마시나요?
항상은 아니지만 대부분 그렇죠.

지금 톰 브라운을 입는 남자는 세련되고, 현대적이며, 돈이 많다는 얘기예요. 매일 톰 브라운을 입는 톰 브라운, 당신도 그런가요?
저를 위해 만드는 옷이니, 당연히 제가 그런 남자여야겠죠.

    에디터
    박나나
    포토그래퍼
    김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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