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독한 남자들

2013.08.26GQ

<황금의 제국>의 손현주, <스캔들>의 박상민,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정웅인.

Television판형

<황금의 제국>의 손현주
대체로 한국 영화와 드라마의 남자 악역은 분수다. 분노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불도저처럼 욕망을 밀어붙이는 단순한 조연 캐릭터가 많다. 하지만 손현주가 연기하는 <황금의 제국>의 최민재는 저수지에 가깝다. 오랫동안 회사와 혈족에 대한 자신의 부단한 노력과 치미는 분노를 저수지가 물을 가두듯 머금고 기회를 기다린 인물이다. 최민재는 끝없는 좌절과 압박에도 끝까지 최후의 순간을 노리는 현실적인 악인이다. 그것은 전작 <추적자>에서 약자였던 백홍석이 강동윤을 노리며 취하던 태도와 닮아 있다. <황금의 제국> 3회에서 최민재는 이렇게 토로한다. “대리부터 시작했다. (중략) 내가 키웠어, 성진건설! 정치꾼들 비위 맞춰서 땅 사고, 공무원들 장단 맞춰서 허가받고, 살아보겠다고 버티는 놈들 강제철거에 경찰에, 용역까지 썼다. 사람이 다치고 사람이 죽어도 성진건설을 위해서, 성진그룹을 위해서…. 내가 이긴다.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최민재는 백홍석의 윤리적 분노에 대권을 노리는 강동윤의 현세적 욕망이 더해진 인물이다. 이러한 입체적 인물은 손현주의 연기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소시민적 절실함으로 가능해진다. 손현주의 치밀한 포석과 집요한 노력이 맞아떨어진다면, 우리는 <황금의 제국>의 말미에 여느 드라마에서 보기 어려운 인간적인 악당의 욕망과 비애로 가득찬 추락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김수경(시나리오 작가)

장태주(고수)의 욕망이 확장되는 것을 지켜보는 아연함과 죄의식 없는 가해자 최민재(손현주)의 자존심이 거듭 꺾이는 것에 연민이 교차하는 <황금의 제국> 초반, 손현주의 붉어진 눈시울엔 자주 치욕이 고인다. 저마다의 이력을 토설하거나 빙 둘러가는 화법 속에 진의를 담는 장면이 유독 많은 박경수 작가의 드라마에서 배우가 그 이력을 감당할 만큼의 중심을 잡지 못한다면 자칫 대사만 남을 위험성이 크다. 손현주는 중량감은 물론이고, 절묘한 호흡의 ‘리액션’에는 ‘인간’이 슬쩍 스치는 매력이 있다. 이를테면 카폰으로 통화하며 다른 손으로 더듬더듬 양갱을 찾던 정한용이 손현주가 건넨 양갱을 낚아채자 반사적으로 눈을 흘겼다가 손이 부끄러운 듯 멋쩍은 표정을 짓는 장면. 맡은 배역이 악역이라는 자의식에 충만한 연기를 하는 배우들이 종종 놓치는 인간다운 반응을 과하지 않게 살려내는 점은 손현주의 특장이다. 단단한 골조 위에 집요한 디테일을 새기는 극본과도 썩 어울린다. 성진그룹의 경영 일선에서 떨어져 나가는 모멸을 겪은 최민재가 그룹 복귀를 꿈꾸며 세운 회사 이름은 ‘성진개발’이다. 그룹의 바닥부터 시작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입지를 다졌던 그의 욕망이 매인 곳이 어디인지는 분명하다. 알량한 시혜조차 부메랑으로 돌아와 뒤통수를 치는 경험을 한 최민재에겐 이제 여유도, 사랑하던 아내도 없다. 유선주(TV 비평가)

<스캔들 : 매우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의 박상민
태하건설의 회장 장태하는 드라마 부제의 ‘부도덕’을 담당한다. 그는 태하건설을 갖기 위해 선대 회장인 장인을 배신했고, 부실 공사로 무너진 건물 속의 생존자를 구출하지 않은 채 권력과 결탁해 사건을 무마시켰으며, 자신의 안위를 위해 내연녀와의 섹스비디오를 언론에 팔아넘겼다. 고아로 자라온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자기 자신과 자신의 핏줄뿐이다. 박상민은 사무실에서 아령으로 몸을 단련하는 첫 장면에서부터 장태하가 얼마나 마초적이며 권위의식에 사로잡힌 사내인지를 확실히 보여준다. 흥미로운 점은 박상민의 대표작인 <장군의 아들> 속 김두한과 <스캔들>의 장태하가 상반된 캐릭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김두한이 돈과 권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강한 남자’이고 싶은 욕망을 그대로 간직한 채 살아갔다면, 그 또한 장태하처럼 늙어가지 않았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박상민은 중년의 김두한과 같이 여전히 강하고 남성적인 자신의 얼굴에 삐뚤어진 부성애를 덧입히며 장태하를 충분히 있을 법한 존재로 그려내고 있다. 언제나 더 큰 권력 앞에 빌붙으면서 약한 자의 생을 가벼이 여기고, 부도덕과 불법을 무심결에 자행하며 더 크고 강한 것만을 끊임없이 욕망하는 중년의 남성이라니. 이들의 존재가 충격적이고 부도덕한 사건을 매일같이 만들어내는 한국 사회가 아닌가. 윤이나(TV 평론가)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정웅인
배우 정웅인에게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세 친구의 얼굴이 존재한다. 첫 번째 친구의 얼굴은 바로 평범하고 진중해서 조금은 답답해 보이는 사내의 얼굴. 그의 히트작이자 그 후 연기생활에 발목을 잡기도 한 MBC 시트콤 <세 친구>의 정신클리닉 원장 정웅인이다. 두 번째 친구의 얼굴은 자신감 없고 유약한 사내의 얼굴. 정웅인은 이 얼굴로 가끔씩 사랑에 실패하는 남자의 모습을 연기했다. 그때 정웅인의 입가에 감도는 미소는 텁텁하니 쓴맛이 난다. 세 번째 친구의 얼굴은 바로 사기꾼처럼 비열한 사내의 얼굴이다. 이 순간 쓴맛이 나는 그의 미소는 싸늘한 눈빛과 함께 종종 썩어가는 미소로 돌변한다. 몇 편의 사극에서 그는 썩어가는 미소와 더불어 얄밉고 야비한 인물들을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그리고 정웅인은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드디어 세 친구의 얼굴을 모두 모은 민준국이란 악역을 연기한다. 민준국이 무서운 까닭은 그의 얼굴이 지극히 평범한 사내의 것이기 때문이다. 민준국은 드라마 <추적자>의 절대 권력도 아니고 영화 <추격자>의 사이코패스도 아니며 애니메이션 <진격의 거인>의 거인처럼 무시무시한 괴물도 아니다. <너의 목소리가 들려>에서 정웅인은 진중하고 유약하고 야비한 민준국의 얼굴을 평범한 카드처럼 보여주다 결정적 순간에 온몸에서 악의 피비린내를 풍기는 얼굴을 한 장의 조커처럼 던진다. 그 순간 시청자들은 흔하디흔한 백색 와이셔츠를 입은 남자가 어느새 피범벅이 된 셔츠를 입은 채 광기의 미소를 짓고 있는 걸 깨닫고는 그만 경악하고 만다. 박진규(소설가)

    에디터
    글 / 김수경(시나리오 작가), 유선주(TV 비평가), 윤이나(TV 평론가), 박진규(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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