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ULTURE

EDITOR’S LETTER – 발로 쓴 詩

2014.06.23이충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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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회에 가면 한국 사람들은 흥분시키기 가장 어려운 국민 같다가도 월드컵만 되면 생각이 싹 바뀐다. 어느 날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고 말 무상한 세상에서 그때만 되면 다들 머리 잘린 닭처럼 날뛴다. 올림픽에서조차 가끔 박수나 치던 소심한 친구의 느닷없는 광기를 어떻게 잊나? 움츠리지 않는 정직, 불필요한 미화 없이 말하려는 열망은 축구의 한 요소라지만, 수줍고, 역설적이고, 억제된 개인의 성품이 축구 안에서 그렇게 으르렁거릴 줄은 몰랐다. 그 안엔 옅은 웃음보단 무시무시한 눈물이 있었지만.

월드컵이 세계에서 가장 큰 사회적 이벤트라는 진실은 우리를 교란시키는 사회적 장광설, 월드컵의 철저한 비전, 사면초가에 몰린 사람, 전부를 휩쓸어버렸다. 그 기간 동안 나는 한국 사람으로서 감수해야 마땅한 역할로부터 귀를 막는다. 거리 응원이 신호인지 소음인지 모르겠어서. 웅장한 응원이란 굉장한 망상 같아서. 콜라텍에서 벌어지는 노인들의 광란 같아서. 실은 간절하고도 공격적인 민족주의가 무서운 거지. 종족골이 뽀개지건 말건 조국을 위해 죽는다는 게 뭔지 직접 들이대는 눈알들도 무섭고, 햇빛 아래 피부는 선홍빛으로 달아오르고, 취객들은 거위처럼 소리를 지르며, 맥주 5천시시와 치킨 다섯 마리를 먹고는 내갈긴 오줌 위에 엎어지고, 모르는 사람과 감격적으로 껴안는 광경은 두 배 더 무서웠다.

패하고 나면 다들 혼백이 떠돌았다. 축구 팬이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열등감과 과대망상의 이상한 혼합. 스포츠건 정치건, 어떤 주제건 결코 질 수 없는 사람들이라서 영원히 휘어질 프리킥이 단숨에 상대편 골네트를 가르지 않으면 회한이 가슴을 채운다. 패배는 비유성을 잃고, 직접적인 상흔을 남긴다. 그러니 나는 ‘공동체 의식’을 주입하려 한다는 의심 없이 축구를 볼 수가 없다. 아니, 요즘의 잡다한 문화적 배경 속에서도 축구가 국가 정체성의 심오한 가치를 대변하는 게 합당하기나 해? 차범근이 5분 동안 세 골을 넣고, 김재한이 코너킥을 백발백중 헤딩슛으로 연결하던 시절엔 그 잘난 의심 따위 없었다.

그런데 펠레는 왜 축구가 아름다운 게임이라고 한 거지? 공이 밖으로 나갈 때마다 양쪽 다 자기 편의 스로인이라고 우기는 게 뭐가 아름답지? 한쪽은 항상 거짓말한다는 거잖아. 옐로 카드만 보이면 왜 죄다 흥분해선 야생적으로 달려들지? 엄격함에 대한 축구의 멸시는 타고난 건가? ‘아름다움은 진실, 진실은 아름다움’이라는 키츠의 시는 좀 아귀가 안 맞는 것 같다. 두꺼운 허벅지를 장착한, 야망에 찬 골룸 부대가 그라운드를 달리는 걸 보면 신은 무슨 생각을 할까? 축구에 관심이나 있을까? 그나저나 마라도나하고 펠레하고 누가 더 뛰어난지 결론이 났나? 그 이슈 하나로 그들은 20년이나 불화했잖아. 자기 엄마도 단연 우리 아들이라 그랬다고, 자기중심적 망나니 마라도나가 말하긴 했지. 뭐가 됐든, 쓰러질 것 같은 기대건, 무너질 것 같은 과찬이건 명성을 얻은 선수들은 이름만으로도 즐겁거나 혐오스러운 에너지를 뿜어낸다.

복싱이 축구의 간결함에 도전한다면, 축구엔 비폭력이라는 뚜렷한 우위가 있다. 힘을 제압하는 기술의 아름다움은 선수에게 궁극의 승리라는 냉소적인 힘을 부여한다. 한편, 득점 단위인 골은 너무 드물고 투박해서 운이랄까, 무작위성이 경기 전반에 민감하게 배어 있다. 축구에서 승리는 부분적으론 확률의 문제. 믿음은 또한 세리머니의 큰 요소. 하지만 야구는 통계학자의 환상과 같다. 모든 경기는 확실한 질문에 명백한 답을 만든다. 별개이며 독립적이다. 대조적으로 축구는 유동적이다. 멈추지도 감지되지도 않은 채 미묘하게 이어지는 선수끼리의 소통이라는 점에서. 어떤 선수는 절대 공을 차지 않고 궤적이 큰 타원으로 달리기만 함으로 써 동료가 골을 넣는 데 필요한 공간을 제공한다. 쉬지 않고 움직이는 그림자들은 관중에겐 몰라도 필드에만은 깊이 각인된다. 강인함에 비해 잘 알려지지 않은, 어떤 불운과, 수그러들지 않는 정신성과, 전투적인 무정함을 지닌 선수들은 순수한 박애주의의 제스처를 웅변하는 것이다.

축구는 음악이나 콜라처럼 범지구적이다. 누구나 모르는 사람과 공을 차본 적이 있다. 아프리카 어디에도 레알 마드리드 셔츠를 입은 아이가 있다. 농구처럼 체형과 체중을 따지지도 않는다. (특히 미국에서) 두 개의 성에게 환영받고, 승마처럼 특정 장비나 트레이닝에 기대지 않는다. 버려진 땅의 한 부분과 공 모양 누더기 천이면 된다. 시에라리온의 물 긷는 아 이도 호날두의 예술가적 기교를 염원할 수 있다. 로맨틱한 헛소리가 아니라 펠레도 그랬고, 축구 역사에 남을 선수들이 다 그랬다.

축구는 가장 재미있거나 정교한 경기도 아니다. 하지만 11명으로 이루어진 팀을 상대한다는 사실엔 단순한 경기를 넘어 인간성에 호소한다는 의미가 있다. 단체 경기면서도 스타 한 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에선 자유기업체제와 사회주의 모두에 대한 은유이기도 하다. 막대한 부로 팬들이 꿈꾸는 인생을 반영하는 선수들, 팬에 대한 상업적 이용, 인류라는 TV 시청자에도 불구하고, 축구는 여전히 지역성과 공공가치에 뿌리를 두고 있다. 정체성을 담은 노동자의 스포츠로서.

토요일 오후, 세계 어디서건 경기장 안에 있으면 축구라는 비즈니스와 그에 따른 부가물이 주는 염증 대신 그 근본에 남은 순수를 본다. 그것이 바로 시골 분교 꼬마와 경기장의 축구 스타를 직접 이어주는 고리이다. 그래서 4년마다 우리는 서로 웃고 두려워하고 조롱하며 매초마다 사랑을 했다. 오직 월드컵 동안만. 하지만 월드컵이 끝나면 너나 할 것 없이 버려 졌다. 우리가 이 추한 세상에 참 중요한 존재라는 억지 믿음으로부터.

    에디터
    이충걸 (GQ 코리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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