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자동차 4 (현대 그레이스 / ‘폴리스 스토리 4′)

영화 역사에 등장한 가장 매혹적인 자동차 100대, 자동차 역사에 아로새길 100편의 영화. 우리는 영화를 떠올리며 자동차를 생각했다. 자동차를 기억하며 영화를 다시 봤다.

현대 ‘그레이스’ < 폴리스 스토리 4 > 1996 1990년 대까지 홍콩영화의 황금기였다. 젊은 성룡은 대역 없이 액션을 소화했고 인기는 하늘을 뚫었다. 홍콩과 러시아, 우크라이나, 호주 등을 배경으로 한 첩보 액션 영화에 현대 그레이스가 등장했다. 하지만 존재감은 미미했다. 성룡을 연행한 차가 지나가는 배경에 슬쩍 걸쳐 등장한 게 전부였으니까. 딱 2초였다. 해외 영화에 첫 출연한 국산차는 초절정 단역이었다. 줄거리나 주인공과의 연관도 없었다. 한낮 배경이고 엑스트라였다. 그래도 신기하고 반가웠다. 당시 집에서 쓰던 짐차가 그레이스였기 때문이다. 온갖 짐을 부리고, 아무나 타고, 어디든 다니던 짐차는 아버지 몰래 밤새 달리던 초보 탈출용 차였고 친구들과의 전국일주 여행의 동반자였다. 기아 봉고의 대항마로 1987년 나온 그레이스는 자동변속기를 달고 고급 장비를 넣는 등 차별화 전략으로 인기가 좋았다. 1997년생 동생 스타렉스가 나온 후 인기는 시들해졌고 2003년, 배기가스 규제로 결국 단종됐다. 그레이스는 10대와 20대를 관통한 내 청춘의 아이콘이다.

 

올즈모빌 ‘98’, < 택시 드라이버 > 1976 누구나 야성은 있다. 사회에 길들여지면서 퇴화됐을 뿐.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1976년 작 < 택시 드라이버 >는 인간의 불안정한 내재 심리를 폭발적으로 터뜨린 수작. 베트남전 참전 후 돌아온 주인공 트래비스(로버트 드 니로)는 매일 밤 옐로캡 택시를 몰고 차창으로 세상을 봤다. 더럽고 추악한 뉴욕의 밤거리에 1970년형 올즈모빌 98은 무기력하게 달렸다. 메르세데스-벤츠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차를 만들던 메이커는 GM에 편입된 후 미국의 대표 브랜드로 시대를 풍미했지만, 판매 부진으로 2004년에 사라졌다. 올즈모빌이 잃어버렸던 야성을 터뜨렸다면 세계 자동차 시장은 어떻게 변했을까?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아쉬운 건 어쩔 수 없다.

 

현대 ‘EF 소나타’, < 본 슈프리머시 > 2004 이라크에 참전한 폭발물 제거반은 수시로 생사를 넘나들었다. EF 쏘나타는 무려 10분이나 등장했지만 결말은 비극이었다. 차에 실린 폭탄이 터지면서 처참한 몰골로 스크린에서 사라졌다. 스티븐 스필버그 작품 < 우주전쟁 >에서는 외계 생명체가 지구를 공격하는 초반 신에 등장했다. 아주 잠깐 단독 컷도 받았지만, 레이저 한 방으로 초라하게 사라지는 단역이었다. 단역을 벗어난 건 < 본 슈프리머시 >에서였다. 영화 초반 숨막히는 추격전에서 악당은 EF 쏘타나로 인도 시내를 총알처럼 달렸다. 운전 잘하는 악당 덕에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그게 전부였다. 실제와 영화 속 EF 쏘나타는 많이 달랐으니까.

 

현대 ‘제네시스’ < 인셉션 > 2010 이 영화에서 제네시스는 꿈속을 달렸다. 3분 동안 달리고 돌고 부딪치고 멈췄다. 심지어 기차를 들이받고 메르세데스-벤츠와 충돌해도 너무나 멀쩡해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꿈 속이니 불가능은 없다. 덕분에 제네시스는 인구에 회자됐고, 영화 흥행과 함께 ‘2015 북미 올해의 차’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돈은 좀 들었지만, 현대자동차는 크게 만족했다.

 

토요타 ‘AE 86 스프린터 트레노’ < 이니셜 D > 2016 평범한 고등학생 스트리트 레이서가 도전자들을 쓰러뜨렸다. 만화는 도시괴담 같은 소재로 일본 자동차 마니아들을 십수 년간 열광에 빠뜨렸다. 두부가게 외아들 후지와라 타쿠미가 신명 나게 몰던 낡고 오래된 두부 배달 차는 도요타가 1983년부터 1987년까지 만든 소형 스포츠카 AE86 스프린터 트레노. 누구나 탈 수 있는 스포츠카를 목표로 개발한 도요타의 명차였다. <이니셜 D>의 영향력은 대단했다. 마니아들을 들끓게 했으며 식어버린 일본 튜닝 시장에 다시 불을 지폈다. <이니셜 D>의 인기에 힘입어 토요타는 만화 속 타쿠미의 차 AE86 이름과 컨셉트를 살려 86을 출시했다. 와인딩에서 즐거운 차 86은 국내 차 마니아들도 인정하는 수작이다.

 

현대 ‘프레스토’ < 에린 브로코비치 > 2000 가난한 이혼녀와 거대 기업 간의 법적 다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에 현대 프레스토가 나왔다. 이 차는 주인공의 궁핍한 현실의 상징이었다. 살림이 나아지자 곧바로 쉐보레 블레이져로 바꾸며 주인공은 날아갈 듯 기뻐했다. 프레스토가 그토록 진절머리 났을까? 영화 속 국산차는 주인공의 빈곤을 상징하던 시절이 있었다.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조롱과 허상의 대상으로 오르내린다. 이제 좀 나아질 때도 됐건만. 지혜로운 홍보와 전략적인 마케팅을 통한 브랜드 이미지의 견인이 필요하다.

 

페라리 ‘몬디알 T 카브리올레’ < 여인의 향기 > 1992 늙은 퇴역 장교와 여드름 고등학생의 만남. 주인공 프랭크는 갑자기 뉴욕에 가야겠다며 비행기에 오른다. 여자 승무원에게 치근덕거리며 술을 들이키던 프랭크가 말한다.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게 있지. 하나는 여자 그리고 페라리.” 뉴욕의 페라리 쇼룸은 고등학생과 맹인에게 시승차를 내어줄 리 만무했다. 프랭크는 찰리의 아버지를 자처하며 딜러에게 2천 달러를 쥐어주고서야 키를 받아낸다. 그 차가 바로 1989년형 페라리 몬디알 T 카브리올레. 당시 판매 가격이 11만 달러(약 1억 3천만원)에 달했던 최고출력 3백 마력의 스포츠카다. 시대의 로망이자 일탈의 정점에 선 페라리 카브리올레는 주연 이상의 존재감으로 스크린을 달렸다.

 

르노 ‘알핀 A310’ < 에반게리온 > 1995 시대를 초월한 세계관과 독특하고도 광범위한 설정이 매력적인 만화. 자신을 버린 아버지의 갑작스런 호출을 받은 14세 소년 이카리 신지는 파란 스포츠카를 몰고 마중 나온 여인 카츠라기 미사토를 만난다. 카츠라기가 몰고 나온 차가 바로 르노 알핀 A310이다. 르노가 포르쉐와 경쟁하기 위해 만든 고성능 스포츠카. 1971년 스위스 제네바 모터쇼에서 공개된 후 1985년까지 1만여 대가 팔렸다. 만화지만 일본 교통상황에 맞춰 오른쪽에 운전대를 달았고, 수동 모드를 지원하는 H매틱 자동변속기도 충실하게 묘사했다. < 에반게리온 >의 인기와 더불어 알핀 A310 중고차 시세는 천정부지로 치솟았고 매물은 한동안 아무리 뒤져도 안 나왔다.

 

토요타 ‘코롤라’ < 이터널 션샤인 > 2004 간밤 주차장에서 뺑소니 사고를 당한 낡은 차를 조명하며 영화가 시작된다. 코롤라는 대중차의 대명사면서 토요타의 대표 준중형 세단이다. 1966년 등장해 저렴한 가격과 튼튼한 내구성, 무난한 성능으로 인기가 높았다. 전 세계 누적 판매량은 4만 대가 넘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차로도 유명했다. 추억은 평범함을 특별함으로 바꾸는 촉매제. 자동차는 추억과 맞닿아 있다. 당신의 첫 차 또는 지금 당신의 차를 찬찬히 바라본 적이 언제인가? 크고 작은 흠집만큼 켜켜이 쌓인 추억을 음미할 때다.

 

메르세데스-벤츠 ‘230 SL 10’ < 노킹 온 헤븐스 도어 > 1997 뇌종양에 걸린 마르틴(틸 슈바이거)과 골수암 말기 판정을 받은 루디(얀 요제프 리퍼스). 같은 병실에서 만난 이들은 함께 바다로 향했다. “천국에는 별다른 얘깃거리가 없어. 그저 바다의 아름다움과 석양을 얘기할 뿐.” 마르틴의 한마디에 루디의 마음이 끌렸다. 병원 주차장에 세워진 하늘색 1967년형 메르세데스-벤츠 230 SL을 훔쳐 여정을 떠났다. 마피아들의 차를 몰고 우여곡절 끝에 바다에 도착했다. 첫 만남처럼 천국의 문 앞에 앉아 데킬라를 나눠 마시며 삶의 끝을 맞았다.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는 이들의 뒷모습을 기억하는가? 주옥 같은 명장면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다.

 

영화와 자동차 5 (시트로앵 DS / ‘고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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